폴린의 고대 유적
마빈 놀란 백작은 여러 모로 놀라운 사람이었다. 깔끔하게 승마복을 차려 입은 그는 단신으로 사절단을 마중나왔다. 산책 나온 사람처럼 사절단에게 다가왔으나 후작과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예절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큰 키에 짧게 깎은 머리, 부리부리 한 눈과 한결같은 미소는 누구나 선망할 만한 외모였다.
무엇보다 세틴을 놀라게 한 사실은 놀란 백작이 마법사라는 것이었다. 마법사에 대한 소탕령이 내려진 지 수십 년이 지난 제국에서 작지 않은 영지를 다스리는 고위 귀족이 마법사인 것도 놀라운데, 놀란은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노골적으로 마나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빈은 사절단의 방침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하듯 영주성으로 모시겠다는 말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사절단을 사우셔 항구의 한 음식점으로 인도했다. 사절단은 얼떨결에 풍성한 해물을 위주로 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마빈이 야영지로 추천한 바닷가의 모래사장은 아름다웠다. 맑은 하늘, 부드럽게 물결치는 파도, 가벼운 산들바람은 일행에게 환상적인 기분을 선사했다.
영지에 관한 자료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항목마다 자세하게 달려있는 주석은 누가 보더라도 놀란 영지의 상황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완벽했다.
“백작의 일처리는 실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소. 오면서 본 황량한 영지 풍경과는 달리 생각보다 식량 사정도 나쁘지 않고 영지민들도 오스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로 보이오. 백작의 성의와 사절단의 방침에 부합하는 점을 근거로 지원을 늘려야 마땅하나,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덜 겪고 있으니 놀란이 조금 양보를 해줘야겠소. 놀란에 대한 지원은 당초 설정된 8 만 부르와 5천 골드로 하겠소. 양해를 부탁드리오.”
마빈은 후작의 결정을 싹싹하게 수용했다.
“우리가 이번에 구호 물자 구입과 수송을 맡아 어느 정도 챙긴 것은 누구나 짐작할 것입니다. 놀란은 말에서 얻는 수익과 어업 및 무역 중개 수익도 있어서 다른 백작령들보다 사정이 나은 것도 사실입니다. 처가에서 지속적인 지원을 받고 있기도 하구요. 후작 각하의 결정에 이의가 없습니다. 첫 번째 물량이 사흘 후에 사우셔에 들어옵니다. 어차피 수입 물자를 확인은 하셔야 할 터이니 그때까지는 여기서 쉬다가 가시지요. 13 공자께는 제가 몇 가지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는지요 ?”
세틴은 마빈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수락의 뜻을 보이려 하는데 셔틀리가 끼어들었다.
“공자께서 따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하오. 사절단의 임무 전체보다 13 공자의 안위가 중요하다는 것이 대공 전하의 뜻이자 후작 각하와 내 의지이기도 하오. 공자께서도 조금 답답한 점이 있더라도 자중자애 하시기 바랍니다. 길지 않은 일정에 벌써 몇 차례 사단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하하. 내가 생각이 좀 짧았나 봅니다. 공자의 안위를 그렇게까지 중히 여기는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티리아는 제가 조금 아는데 다소 엉뚱하지만 무모하게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있다 해도 적어도 놀란에서는 준동하지 못합니다. 그건 제가 백작의 명예를 걸고 장담하지요. 그래도 사절단의 방침이 확고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쉽지만 제가 물러서는 수밖에요.”
마빈의 말에는 다분히 세틴을 도발하는 의도가 깔려있었고, 공자를 ‘새장 속의 새’로 키우려는 거냐고 비웃는 느낌도 있었다. 명예를 걸고 장담한다고까지 말하는데 단칼에 자르기도 어려웠다.
후작이 물었다.
“명예를 걸고 장담한다는데 우리의 방침 만을 고집하는 것도 도리는 아닌 듯하오. 다만 무슨 일인지 미리 밝힐 수는 없겠소 ?”
“아, 죄송합니다.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 행선지와 목적도 말하지 않고 공자를 모시려 한 것은 저의 실수입니다. 다름 아니라 최근 놀란에서 고대의 유적 몇 곳이 동시에 발견되었습니다. 제가 배움이 짧아 봐도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죠. 유명한 브라스트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신 공자의 지식과 지혜를 빌어 견문을 넓힐 요량이었습니다. 물론 공자께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틴이 흥미를 보였다.
“고대 유적이라면 ?”
“북방 민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폴린 왕국을 세우기 전에는 이땅에 이렇다 할 문명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폴린 왕국을 건설한 북방 이민족의 초기 발자취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사할 가치가 충분히 있네요. 아니, 꼭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 폴린어는 이제 사어(死語)나 마찬가지지만 재미있게 배웠던 과목 중 하나에요. 흑룡기사단이 다 움직일 필요는 없고 셔틀리 공만 동행하시지요. 제 호위들도 문무를 겸한 인재들이라 도움이 될 테니 제 식구들과 셔틀리 공이 함께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마법사의 던전 같은 곳도 아니니 그 자체로 위험은 없겠지요.”
후작이 매듭을 지었다.
“폴린 왕국의 역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브라스트 공국에서는 사소한 일이 아니오. 직접적인 사절단의 임무는 아니지만 완전히 무관하다고도 볼 수 없소. 비록 대공가에 의해 멸망 당한 왕국이기는 하나, 폴린은 지금 우리 공국의 근간을 이루는 한 기둥이니까요. 저는 굳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다음날에도 마빈은 옆집에 마실 나온 사람마냥 혼자서 말을 타고 야영지에 찾아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스스럼없이 호감과 믿음을 나타내고 거침없이 호의를 배푸는 것으로 친구로 믿게 만드는 대단한 마력을 가진 사내였다. 세틴은 그가 진정 믿을 만한 사람인지, 선인인지 아닌지를 섣불리 가늠할 수 없으나, 적으로 만나기보다 친구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았다.
세틴은 마차를 타기에는 어딘가 마빈에게 눌리는 느낌이 들어 다른 ‘남자들’처럼 말을 타고 가기 원했으나, 셔틀리에 의해 간단히 기각당했다. 세틴의 마차는 방호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 공격 설비까지 갖춘 전투 장비였다.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이나 다른 공격에 우선 노출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이유로 세틴은 여자들 네 명과 동승해야 했다.
일행이 처음으로 도착한 유적지는 야영지에서 멀지 않은 작은 호숫가의 동굴이었다. 사람이 드나들 만한 바위틈을 세 번 꺾어 들어가니 환상적인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 높이 난 꽤 큰 구멍으로 햇빛이 들어 전혀 어둡지 않았고,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단단하고 고르게 다진 흙바닥을 비롯해서 여기 저기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이 거쳐 간 흔적이 있었다.
“원래 여기는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소. 언뜻 봐도 딱이지 않소 ? 워낙 유명하다 보니 여기서 밀회를 즐겼다간 동네방네 소문이 날 수밖에 없지.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고 간혹 아이들이나 놀다 가는 곳이 되었다오. 보물찾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바닥을 파헤치다 발견한 비석 하나가 유물 발굴의 시작이었소. 이것이 바로 그 비석이오.”
세틴과 울브린, 토마스가 한참 동안 비석을 살펴 보았다. 반짝이는 반구형의 비석은 지름이 두 뼘 남짓이었다. 기괴한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는데 글이라기보다 아이들이 장난처럼 그린 그림에 가까웠다.
울브린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토마스가 말했다.
“폴린어를 배운 적은 있으나 우리는 몇 가지 단어 말고는 잘 모르겠소. 처녀, 어머니, 바다, 배신자......”
“오, 두 분도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셨나 보오 ?”
마빈이 놀랍다는 듯 물었다.
“부끄럽지만 우리 둘도 브라스트 성을 씁니다. 아카데미는 브라스트라면 누구나 갈 수 있지요.”
“그것 참 부럽소. 아카데미 같은 배움의 기회를 선망하는 사람이 나 뿐은 아닐 것이오.”
그때, 세틴이 낭낭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 나갔다.
“여기는 죽어가던 폴리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처녀의 땅
재커둠의 가호가 죽음의 바다에서 우리를 이끈 곳
폴리스와 재커둠을 배신한 자들에게 저주 있으라.
진정한 재커둠의 안식처를 찾아 우리는 떠나지만
재커드가 없다 해도 재커둠은 폴리스의 영원한 어머니
두고 볼 것이다, 남자가 아이를 낳는지
재커둠을 떠난 폴리스는 폴리스가 아닐진저.”
일행 중에 무슨 말인지 알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틴이 글을 낭송하는 동안, 모두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세틴이 마지막 구절을 낭송할 때에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머릿속을 강타하는 기분이었다. 마빈이 세틴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나도 정확한 의미를 모두 알지는 못하오. 내가 아는대로 이 글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만도 몇 시간 강의를 해도 모자랄 것이오. 잠시 기다리면 개요를 정리해서 알려 드리죠.”
세틴이 한참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말했다.
“이 비석은 폴린 왕국을 세운 일파에서 갈라져 나온 일단의 무리가 새긴 것으로 추정되오. 원래 폴리는 형제, 정확히 말하면 같은 어머니를 둔 사람이라는 뜻이죠. 폴리스라는 명칭은 부족명이라기보다 일반적으로 부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어요. 폴린 왕국도 ‘형제의 나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소. 수렵 생활을 하던 북방 이민족들은 아마도 주로 사냥하는 짐승의 이름을 부족명으로 쓴 것 같소. 재커둠은 재커드라는 짐승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볼 수 있소. 그들에게는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자 숭배 대상이었던 것 같아요. 무슨 이유인지 폴린 왕국을 세운 세력에서 갈라져 나온 이 무리는 그들이 처음으로 도착해서 발견한 이곳을 또 다른 삶을 개척하는 시발점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소.”
마빈이 물었다.
“와, 참으로 신기합니다. 몇 안 되는 이 문양들이 그토록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을 줄은 몰랐소. 들어도 확연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꽤나 의미심장한 것 같은데, 공자께서 보시기에 이 유물이 얼마나 가치가 있다고 보시오 ?”
“솔버트 학장께서 이 비석에 대해 들으시면 아마 열 일 재쳐 놓고 달려오실 거라 장담합니다. 솔버트 학장은 폴린의 역사와 언어에 정통하실 뿐 아니라 폴리스의 주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죠. 내가 거의 접근할 수 없는 주술적 의미까지 해석이 된다면 이 비석의 가치는 무궁무진할 거요. 그런데 백작께서는 여기 말고도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마빈이 대답했다.
“사실 이 비석이 발견된 지는 꽤 오래 되었소. 구릉지가 많은 놀란에는 동굴이 많지는 않은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동굴이 몇 있습니다. 비석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서 동굴들을 일제히 조사하도록 한 것이 최근 일이오. 그 동굴에서도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죠. 다음 동굴까지는 거리가 꽤 되지만, 오늘 거기까지는 다녀올 수 있을 듯합니다. 바로 출발하실까요 ?”
이날, 세틴이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게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일행에게 말하지 않은 변화가 세틴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유적지로 향하는 세틴의 마음은 전에 없이 설레고 가슴 벅찬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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