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동부인의 의지
베른이 아난의 술수를 간파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말한 대로 아난은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 그것도 매우 중요한 지역을 이끌어온 대영주의 모습하고 너무 거리가 멀었다.
만약에 아난이 진심으로 항복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부터 따졌을 터였다.
아무리 어리숙한 시골 영주의 행색을 보이고자 하더라도 자신의 영지과 백성을 보존하려는 습성은 영주 귀족들의 본능과도 같은 것일진대, 아난에게는 그런 진정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베른이 겪어본 북동부인들은 순진할지는 몰라도 결코 쉽게 남에게 굴복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북동부에서 중앙으로 향하는 관문을 맡고 있는 영주라면 어쩌면 자주 그런 북동부인들을 대표하거나 대변하는 위치에 있는 자였다.
아난의 말과 행동에서는 그런 의기나 책임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아무리 무지렁이 같은 자라 하더라도 일정한 위치와 지위에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는 기세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베른의 말대로 아난은 이제 꼼짝없이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아난은 차라리 꼼짝하지 않고 자신의 저택에 움츠리고 있다가 세틴군이 몰려오면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매달리는 편이 나을 뻔했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아난도 관문을 맡아 수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접하면서 닳고 닳은 사람이었다.
일개 선봉장에게 자신의 술수를 간파당했다는 당혹감은 잠시, 아난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말했다.
“솔직히 매우 놀랐소.
내 그대를 일개 장수라고 만만히 보았음을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소.
오늘 만나본 베른 장군과 선봉 부대의 당당한 모습 하나만 보더라도, 북동부인들이 정면으로 맞선다면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거라는 건 분명하오.
당신의 생각이 맞소.
북동부인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국군에 호락호락하게 무릎을 꿇지는 않을 것이오.
당신은 지금 당장 내게 양자 택일을 하라지만, 그럴 수는 없소.
내가 직접 세틴 사령관을 만나 보고 나서 결정을 하도록 해줄 수는 없겠소 ?”
베른은 자신의 부대만으로도 숄키닌을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난의 머리를 쳐버리고 숄키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북동부인들에게 본을 보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세틴이 분명하게 천명한 방침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초반에 강하게 눌러 놓아 기를 죽이는 편이 북동부를 평정하는데 더 좋다는 베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세틴은 북동부인들을 마음을 최대한 다독이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북동부의 병사나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거나 탄압하는 것은 물론, 약탈이나 약탈로 보일 만한 행동조차 세틴의 허락을 직접 얻기 전에는 엄격하게 금한다는 방침이었다.
공격해 오는 적군에 맞서 싸우지도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베른이 생각 끝에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오늘 당신이 내게 보인 말과 행동 만으로 그대를 처단할 명분이 충분하오.
방금까지도 그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소.
굳이 사령관님을 뵙고 나서 결정을 하겠다는 이유가 뭐요 ?”
아난은 애써 차분하게 말하는 베른이 실제로 당장 자신을 죽이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대답이 베른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즉시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자연히 대답하는 아난의 목소리가 가라앉고 떨려왔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당당하게 말하려 했다.
“나는 세틴 사령관께서 북동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독여 줄 수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당장 목이 달아난다 하더라도 결코 항복할 수 없소.”
아난의 염려와는 달리 베른의 대답은 시원하게 나왔다.
“좋소.
그런 이유라면 받아 들이겠소.
그럼 일단, 우리가 함께 할 일을 합시다.
선봉장으로서 내 임무는 숄키닌 저택을 접수하는 게 아니오.
숄키닌 저택의 정면까지 진출해서 진을 치는 일이지.
여기까지는 협조할 수 있겠지요 ?”
아난이 살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마침 나의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군이 머물 만한 장소가 있소.
그리 크지는 않으나 호수가 있어 물을 조달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직접 그곳으로 안내하고 진영을 설치할 준비를 하는 데도 사람들을 동원하여 돕도록 하겠소.”
베른이 자신의 판단대로 힘을 앞세워 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욕구는 남다른 바가 있었다.
그런 베른이 나름 절제된 언사로 아난의 일을 일차 마무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베른이 북동부로 진격하는 작전에서 선봉을 맡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난다가 바쁜 와중에도 베른을 불러 한 나절이나 설교를 해댔다.
난다는 그냥 그대로 베른을 보냈다가는 반드시 사고를 칠 거라는 확신을 가진 것처럼 수없이 베른을 윽박질렀다.
만약에 이번 작전에서 제멋대로 설치다가 세틴의 일을 그르치는 날에는 군법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고 자기에게 죽을 줄 알라는 협박이었다.
몇 마디 하면 알아 듣고도 남으련만 난다는 지난 일들을 들먹거리고, 세틴이 어떤 사람인지 구구절절 읊어가며, 비슷한 얘기를 반복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세틴의 지침을 절대 어기지 말라’, 덧붙이자면 ‘최소한 울브린의 의견을 들어 보고 그와 합의한 내용이 아니면 어떤 결정도 하지 말라’였다.
그런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도 베른은 사실 기분이 좋았다.
아직까지 여전히 그에게 상관인 난다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시간을 내어서 떠들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른에게는 어느새 무언가 충동적인 결정을 할 상황이 되면, 때로는 귀엽게도 느껴지는 난다의 화난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이날도 여러 대목에서 아난을 더 심하게 윽박지르거나, 힘으로 협박을 해서라도 굴복을 시키려는 충동이 일었고, 베른이 그나마 온건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난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였다.
오래지 않아 울브린의 부대가 합류했다.
울브린은 베른과 달리 보병, 기병, 궁병이 짜임새 있게 갖춰진 5 천의 선봉대를 이끌고 있었다.
말하자면 베른은 전원 기병으로 구성된 기동정찰대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고, 실제 전투에 대비한 본대의 역할이 바로 울브린의 선봉대였다.
숄키닌의 저택은 북동부의 관문답게 상당한 위용을 갖춘 저택이었다.
성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있으나, 제법 넓은 저택을 높고 튼튼한 담장이 둘러싸고 있었다.
베른과 울브린은 숄키닌의 저택으로 진입하려는 시도는커녕, 아난의 정중한 초대마저 거부하고 저택 밖에 머물겠다고 했다.
이는 세틴 사령관의 지침에 따르는 것이니 자신들을 결코 이를 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숄키닌의 저택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상당히 경사가 가팔라 보이는 산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저택의 서편에 계곡물이 고여서 형성된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숫가에 여기 저기 잡초가 우거진 넓은 백사장이 있었는데, 그곳이 대군이 머물기에 적합할 거라는 장소였다.
울브린과 베른이 십 여 명의 장교들을 거느리고 주변을 샅샅히 둘러보고 있었다.
숨어 있다가 갑자기 기습을 가해올 만한 지형도 없고, 산짐승이나 마수가 출몰할 만한 곳도 아니었다.
베른과 울브린이 서로를 마주 보며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리려 할 때, 장교 하나가 말했다.
카이문이라는 말끔하게 잘 생긴 젊은 장교였다.
“다른 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주둔을 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저 호숫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관은 만약에 누가 나쁜 마음을 먹고 저 호수에 독을 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베른과 울브린이 서로 마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베른이 말했다.
“카이문, 역시 똑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곳 영주 아난이 우살리드의 명을 받고 저 호수에 독을 풀어 우릴 몰살시킬 음모를 꾸밀 수도 있다는 말이지 ?
여기, 호수에 독을 풀어 많은 사람들을 독살했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 있나 ?”
베른이 동행한 장교들을 둘러 보았으나, 서로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베른이 다시 말했다.
“아무도 없나 보군.
나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세상엔 이상한 독도 많고, 호수에 풀어서 일거에 많은 사람들을 독살할 수 있는 독이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지.
카이문, 그대의 우려는 잘 들었다.
그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뜻으로 명을 내리겠다.
지금부터 수하 병사들을 데리고 이 호수에 독을 푼다면 어디서 어떻게 풀 것인지 조사해보고,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할지 오늘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까지 보고하도록.”
카이문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갑자기 꽁무니를 내렸다.
“저는 다만......”
“다만, 뭐 ?”
“조심할 필요는 있다...... 는 의견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 의견은 잘 들었고, 그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의미로 임무를 주었는데 그게 뭐가 이상한가 ?”
카이문이 더 이상 끌었다가는 큰 질책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차려 자세를 하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조사에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카이문이 물러가고 나자 베른이 다른 장교들에게 말했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말하는 건 언제든지 환영한다.
난 언제나 침묵 만을 지키는 장교를 무척 싫어하는 편이지.
하지만 의견을 말할 때는 두 번, 세 번 생각을 해보고 해야 한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지껄이는 건 의견이라고 할 수도 없지.
내가 카이문에게 누가 보더라도 쓸 데 없는 임무를 내린 건 장군이든 장수든 장교든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
“네, 알겠습니다.”
장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장교들의 머리 속에서는 대부분 다른 생각들이 돌고 있었다.
괜히 한 마디 했다가 몸이 고달프고 십중팔구 부하들에게 원망까지 듣게 될 카이문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그냥 말로 호수에 독을 풀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주면 어디가 덧나나 하는 생각들을 다들 비슷하게 품고 있었다.
울브린도 여러 모로 느끼는 점이 많았다.
처음부터 주로 명령하는 위치에 서있는 것이 익숙한 베른과 어려서부터 기사단과 군대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성장해 온 자신과의 사이에 확실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울브린은 베른이 왜 그런 처분을 했는지도, 장교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대략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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