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텔라 하만
세틴은 줄지어 도착하는 결혼 중개인들과 파티 초대장, 직접 방문하는 귀족들과 그 영애들로 인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견디다 못한 세틴은 ‘폐하의 병세가 위중하니 자중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파티는 3 일에 한 번만 참가하고, 모든 방문자는 바네사와 올릿을 거치도록 하여 직접 접촉하는 일을 줄여야 했다.
바네사는 파티에 다녀오거나 귀족 영애들과 즐겁게 환담을 나누고 나면 유독 우울해지는 세틴이 무척이나 신경쓰였다. 세틴은 컴컴한 방안에 우두커니 앉은 채로 밤을 지새우는 날도 적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내뱉고, 내키지 않는 웃음을 보여야 하는 심정도 이해가 갔으나 모두가 시오미 때문임을 바네사는 잘 알고 있었다.
시오미를 한 번 만나보기라도 할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소식만 들으면 발가벗고 춤이라도 추겠다는 식으로 생각이 극단으로까지 치닫는 경우도 적지 않은 세틴이었다.
세틴은 그런 와중에도 청랑대의 훈련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청랑대의 현 과제는 무엇보다 관저의 경비였다. 60 명이라는 인원이 관저의 크기에 비해 너무 적은데다 오랫동안 방치된 관저의 허술한 시설들도 문제였다. 세틴은 참군의 십인대를 근접호위에 배치하고, 정문 통제에 한 십인대, 시설 보수 및 정비에 두 십인대, 순찰 경비에 두 십인대를 배치했다.
3 교대로 빠듯하게 돌아가는 경비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검법과 진형을 비롯한 각종 훈련까지 병행해야 했으므로 청랑대는 칼같이 서슬 퍼런 군기가 유지되었다.
그렇게 10 여 일이 지나 세틴 일행의 황도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될 무렵 카스텔라가 갑작스럽게 세틴을 방문했다. 사전 예고도 없는 방문이었으나, 그녀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카스텔라는 3 황자의 셋째 딸로 일반적으로 황녀의 대접은 받는 여자였다.
“난 카스텔라 하만. 네가 제국 제일의 신랑감이라는 세틴이지 ? 만나서 반가워. 우린 사촌인 데다 내가 네 살이나 위이니 말 놔도 되지 ? 근데 생각보다 더 어려보인다. 그래도 귀엽긴 하네. 호호호.”
“브라스트 대공가의 소가주 세틴이 공주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귀한 발걸음을 하셨는지요 ?”
“어머, 얘 무게 잡는 거 좀 봐. 내가 그래도 네 사촌누나인데 꼭 무슨 용무가 있어야 볼 수 있는 거니 ?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것이긴 한데 우리 그냥 좀 편하게 얘기하자. 응 ?”
“네 그러면 편하게 말씀 하시지요.”
“이렇게 서서 ?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별로 급할 건 없는 얘기야.”
세틴의 방 탁자에 차를 세팅한 바네사와 두 시녀는 약간 떨어져서 시립하고 있었다. 카스텔라가 그들은 내보내라는 눈짓을 연신 보냈으나 세틴은 가볍게 무시했다. 특별한 비밀 얘기가 아닌 이상, 시녀들은 주인의 대화를 들을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공주님, 브라스트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시녀들은 주인의 모든 행동을 같이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수련도 같이 해야 하고, 공부도 같이 해야 합니다. 혹시 무슨 특별한 비밀 얘기라도 있는 겁니까 ?”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냐. 뭐 듣는 거야 상관없긴 한데 내가 좀 불편해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법도가 있고 의무가 있으니 저라고 해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용건을 말씀 하시지요.”
카스텔라는 언짢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곧 평상적인 태도를 회복하고 은근히 말했다.
“내가 요즘 보니까 아버지께서 너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시더라고.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황도에 왔으니 적당한 일을 고르느라 고심하시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세틴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 ? 있으면 말해. 내가 아버지를 졸라서라도 꼭 하게 해줄게.”
“말씀은 고마우나 제가 브라스트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국은 물론 황도가 돌아가는 사정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이란 게 있을 리 없습니다. 그저 폐하의 명이 있으면 따를 뿐이지요.”
“그건 그렇지. 그럼 황도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 봐. 내가 아는대로 알려 줄게.”
“궁금한 일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무엇보다 폐하의 병세가 어떠신지, 제가 폐하를 알현할 수 있을지가 제일 알고 싶습니다. 황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3 황자께서만 폐하를 알현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맞는데 그 부분은 아버지께서 일체 말씀을 안 하셔. 나도 궁금해서 몇 차례나 여쭤봤는데 ‘아직 돌아가시지는 않았다’는 정도로 대답하시곤 해. 그런대로 건재하시다는 얘기인지 곧 승하하실 것 같다는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저는 폐하에게서 ‘짐을 보필하라’는 명을 받고 황도에 왔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맡게 되더라도 일단은 폐하를 뵙고 난 이후겠지요. 폐하의 용안도 뵙지 못하고 누가 시키는 일인지도 모르는 채 덜컥 떠안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려고 두 달 넘게 걸려서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니지요.”
어떻게든 호의적으로 얘기를 풀어보려는 카스텔라의 노력이 무색하게 세틴의 태도는 시종 사무적이고 냉담했다. 원래 참을성이 별로 없는 카스텔라가 폭발하고 말았다.
“야, 세틴. 어린 게 인질로 황도까지 잡혀 온 게 불쌍해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는데 너 너무 건방진 거 아냐 ? 사람들이 제국 제일의 신랑감이라고 떠받들어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
세틴은 난처한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공주님, 누가 절 인질이라고 그럽니까 ? 대공께서 승상으로 부임하기 힘들면 아들이라도 보내서 ‘짐을 보필케 하라’는 황명이 거짓이라는 말입니까 ? 그렇다면 거짓 황명은 누가 꾸민 일입니까 ? 대체 누가 절 인질로 잡고 싶어하는 거지요 ?”
카스텔라는 자신이 대형 사고를 쳤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홧김에 대놓고 인질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고 말았으니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아, 아니. 황도에서는 그런 소문도 있다는 말이지. 누가 감히 폐하의 왼손자이자 대공가의 소가주인데다 ‘제국 제일의 신랑감’을 인질로 삼을 생각을 하겠니 ? 그냥 그런 말도 있다는 거지.”
세틴은 더 이상 카스텔라를 난처하게 해봐야 득이 없다고 보았다.
“공주께서 홧김에 한 말이지 본심은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제 태도가 지나치게 딱딱하다고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칙사로 왔던 카우스 백작의 태도가 너무 경망스럽고 이유없이 찍어누르려는 식이어서 제가 좀 날카로워진 점도 있습니다.”
“맞아. 그 영감탱이는 진짜 밥맛이야. 아버지는 왜 그런 자를 싸고도는지 몰라. 듣기 좋은 말로 사람 후리는 데만 재주를 타고난 인간인데...... 그런데 네 태도를 보니 혹시 아버지가 날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해야. 아버지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많은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적어도 딸을 정략의 수단으로 이용해먹을 만큼 막되 먹은 사람은 아냐. 나도 그런 장단에 춤출 생각은 절대 없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방문인지라 공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저도 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사실 세틴은 오락가락하는 카스텔라의 태도에서 아직 ‘본래의 용건’은 나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것이 무엇일지도 대충 알 수 있었다. 황가나 큰 귀족가문에서 친형제도 남보다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니 사촌지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사촌임을 내세워 친근하게 다가서 보려는 카스텔라의 태도는 ‘제국 제일의 신부감’이 되어보려는 야심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거기에 3황자의 의중이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요즘도 혼담을 넣어보려고 줄을 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마음에 드는 신부감은 찾았니 ?”
“보시다시피 전 아직 어립니다.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여자를 보는 눈이 없으니 그저 대공비 전하께 맡길 뿐입니다. 대공비께서 제국 전역에 청혼 서신을 뿌려놓았으니, 찾아오는 사람을 냉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소란도 가라앉겠지요.”
“그래도 원하는 조건은 있을 것 아냐. 네가 배경보다는 사람을 중히 여길 거라는 느낌이 들긴 한다만, 원한다면 내가 좀 도와줄까 ?”
“어떻게요 ?”
“일단 어떤 처자를 원하는지부터 말해 봐. 내가 그걸 알아야 도움을 줘도 주지.”
세틴은 짐짓 진지하게 읊어나갔다.
“저는 성격은 명랑하되 겸손하고, 차림은 정갈하되 소탈하고, 말수는 적되 행동에 빈틈이 없고, 머리는 명석하되 뽐냄이 없고, 가족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는 대공비께서 어릴 적부터 저에게 심어준 여성상이기도 하고 대공비께서 스스로 잘 지키려 노력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뭐야, 그건 솔라스 경에 나오는 말이잖아. 설마 지금 날 놀리는 건 아니지 ?”
“놀리다니요. 솔라스 경 372조에 나오는 말이 맞습니다. 저는 솔라스 경 1000 조를 있는 그대로 실천하는 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솔라스 경에 틀린 말이 하나라도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사흘 밤낮을 토론할 용의가 있습니다.”
“아, 참. 고리타분해. 제국 제일의 신랑감이 이런 사람이라니...... 이거 내가 소문 낸다 ?”
“그런 소문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솔라스 경의 말들을 절반, 아니 삼분의 일이라도 지키려 노력했다면, 어찌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을까요. 일반 사람들은 그만두고 배운 귀족들이라도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나한테 ‘너는 낙제야’하고 외치는 소리 같은데...... 솔직하게 말할게. 아버지한테 브라스트에 혼담을 넣어보라고 부탁할 생각이야. 그 전에 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서 온 거지.”
세틴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건 3 황자와 대공의 결속을 위해서 한 생각인가요 ?”
“맞아. 내가 정치는 잘 모르지만 인질이니 뭐니 하면서 불화하는 것보다 두 분이 힘을 합쳐야 지금 제국의 난맥상을 해결할 희망이 생길 거라 생각했어. 내가 너무 엉뚱한 생각을 한 거니 ?”
“아닙니다.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생각입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정략을 위해 희생하시는 건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
“그건 귀족가의 여식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야. 난 포기한 지 이미 오래 됐어. 네 어머니만 해도 대공의 얼굴도 모르는 상황에서 결혼한 거잖니.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황녀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을 나라고 어떡하겠어.”
“저보고 고리타분하다더니, 어째 공주께서 더 고리타분하십니다. 하하하.”
“놀려도 괜찮아. 어차피 각오하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래서 너는 절대불가라는 거야 ?”
“아닙니다. 결혼 자체에 대해서는 제가 좋다 나쁘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집안의 화해와 협력이라는 대의에는 절대 찬성입니다. 저나 대공은 제국의 3황자를 적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니까요.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브라스트의 기질은 적대하려는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지만, 야망을 위해 이유 없이 누군가를 적대하지는 않습니다. 머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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