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
코데옹은 뚜렷한 결론 없이 대체로 인질을 보내되 누구를 보낼 것인가만 남아 있는 상태로 끝났다. 6 백작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고, 멀린의 최종 결정만 남은 셈이었다.
멀린의 고뇌가 깊어졌다. 자신도 세틴을 보내기는 싫었고, 조스핀은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펄쩍 뛰었다. 이미 세틴이 자청을 한 마당에 가기 싫다는 아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보낸다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세틴의 요청으로 마주 한 자리에서 멀린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오늘은 공국이고 가문이고 다 떠나서 아버지와 아들로 얘기해 보자. 나는 아버지로서 도저히 너를 황도로 보낼 수 없다. 아비된 자가 어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볼모로 보낼 수 있겠느냐. 너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아비의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세틴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먼저 아들의 얘기를 들어보시지요. 제가 황도에 가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형님들과 후계자 자리를 두고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을 후계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지요. 아버지를 황도로 불러들이려는 세력이 누구든 좋은 의도가 아님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브라스트 대공이라는 존재가 부담스러울 만큼 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외무대신의 말처럼 병력을 이끌고 가서 힘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지 않는 한, 아버지께서 황도로 향하는 순간 브라스트 공국은 안팎으로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6 백작은 말할 것도 없고 대공령의 귀족들 중에 어떤 상황에서도 충성을 다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나마 그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죠. 반대로 공국에 대공이 건재한 상황에서는 인질은 인질이 아니게 됩니다. 오히려 제 눈치를 살피려 하는 자들이 더 많을 겁니다. 이것이 제가 인질이 아니라 황제의 외손자로서 간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황도에 가야 제국의 전체 정국을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세력의 판도와 각 세력의 허실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대비해나간다면 누가 감히 함부로 브라스트 대공가를 건드리겠습니까 ?”
“다른 부분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나는 첫 번째 이유가 신선하게 들리는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신통하다. 너는 마치 내가 널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후계 경쟁에 뛰어들겠다고 생각한 순간, 저는 제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쟁에 나설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요. 지금 상황은 누구라도 볼모로 끌려가는 거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와 가문을 위해 한 몸 희생한다는 것보다 더 좋은 후계의 명분이 어디 있을까요. 더구나 황명의 명분까지 실린 일입니다.”
“그 부분은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구나. 하지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 과연 너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겠느냐야.”
“제가 이번에 6 백작령을 순행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6 백작이 명분으로 대공의 휘하라고는 하지만, 그들 각자가 하나의 소왕국이나 다름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국이라고 크게 다를까요 ? 브라스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황실의 권위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황실을 지탱할 인재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국의 귀족들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제 살 길을 찾고 조금이라도 땅덩이를 넓힐 기회를 찾느라 혈안이 되었을 테지요. 브라스트와 저를 적대하는 자들이 반, 연줄이라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자들이 반이라면 저는 절대 안전합니다. 이점도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우리를 견제하고자 하는 자들이 왜 직접 우릴 건드리지 못하고 그림자에 청부를 넣고, 황제의 권위를 빌어 압박하려 하겠습니까. 그들조차도 노골적으로 브라스트를 적대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가 호락호락 당하지도 않겠지만, 제 짐작에는 ‘넌 볼모다’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자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멀린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나는 그 모든 얘기들이 네 머리 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구나. 혹시 누군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느냐 ?”
세틴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버지께서 모르실까요 ? 굳이 말씀드리자면 이번 순행에서 올란드 후작에게 배운 바가 무척 많습니다. 그는 진정한 브라스트의 충신입니다.”
“충신이지. 나에 대한 충성을 떠나서 온전하게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유일한 사람이야. 난 그 사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나보다 먼저 가버릴까 봐......”
잠시 후 멀린이 다시 말했다.
“다 좋은데 나는 도저히 네 어미 만은 설득할 자신이 없다. ‘애비가 되어서 어찌 자식을 사지로 보내느냐’는 질책에 대답할 말이 없어.”
“어머니를 설득하는 건 제게 맡겨 주시지요.”
다음날, 조스핀이 앞장 서서 세틴을 정식으로 후계자로 삼아 황도로 보내자고 주장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조스핀이 극적으로 태도를 바꾸게 한 한 마디는 ‘제국 제일의 신랑감’이었다. 세틴은 조스핀에게 공식적으로 널리 신부를 구한다는 서신을 제국 각지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서신 한 장으로 세틴 자신의 안전은 반석 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는 말에 조스핀이 홀딱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세틴이 제국 전역에서 누구나 탐내는 결혼 상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적인 기대는 조스핀에게 있어 결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세틴을 보내기로 마음 먹은 조스핀은 어릴 적 기억을 바닥까지 긁어내어 세틴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지만 신통한 것은 없었다. 브라스트로 시집온 지가 40 년이 넘은 조스핀에게 황도에 내세울 만한 인연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세틴,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황실에서 너를 도와줄 것이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구나. 첫째 오라버니는 무뚝뚝하고 무덤덤한 사람이라 속을 알 수 없고, 둘째 오라버니가 그나마 이 어미를 무척 예뻐했다. 내가 해달라는 걸 거부한 적이 없었지. 그 사람들도 이제 칠십이 다 되었을 테고, 둘 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고 들었다. 둘째 오라버니는 적어도 널 괄시하지는 않을 듯 하구나.”
“어머니, 그 말씀 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황자께 어머니의 각별한 그리움과 정을 꼭 전해 드릴게요. 그분께서 아무런 세력이나 권력이 없다 해도 저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적지 않을 거에요. 제국의 이황자라는 그 이름 하나 만으로도 만만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지요. 대공가의 공자도 귀족 가문의 여아들을 시녀로 들이는데, 명색이 황자면 오죽 하겠어요. 큰 도움이 될 거에요.”
조스핀은 말하다 말고 또 눈물바람이었다.
“내가 대공께 널 보내자고 말까지 했지만, 막상 떠나보내려니 오만 가지 걱정이 고개를 드네.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너무 없어......”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관심도 없겠지만 아들이 싸움을 좀 할 줄 알아요. 저번에 마스터급 암살자를 단 일격에 보내버린 실력이라구요. 어떤 상황에서도 제 몸 하나 뺄 자신은 있으니 안심하셔도 되요. 장담하는데 제국의 결혼 적령기의 딸 가진 귀족이란 귀족은 브라스트의 후계자와 맺어주려고 달려들 겁니다. ‘제국 제일의 신랑감’을 감히 해코지 하려는 자들은 그들 모두를 적으로 삼을 각오를 해야 해요.”
조스핀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그럴까 ?”
며칠 후, 브라스트 가문의 소가주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이는 황가를 제외한 모든 귀족들이 후계자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13 공자 세틴을 브라스트 가문의 소가주로 임명한다. 이 순간부터 소가주는 가주와 가모를 제외하고 가문 내에서 최고의 지위를 갖는다. 브라스트 가문에 속한 자는 나이, 신분에 관계 없이 소가주에게 경어를 사용해야 하고, 소가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소가주는 가주가 위임한 사안에 대해서 전권을 행사할 수 있고, 가주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가주를 대신할 수 있다.”
임명식은 멀린의 선언과 소가주를 인증하는 반지를 수여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났다. 몇몇 공자들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세틴과 대공 기회를 줬음에도 황도에 가겠다고 자청하지 않은 그들이 이의를 제기할 명분이 없다는 것도 모를 수는 없었다.
황명에 따라 ‘적법한 후계자’로서 황도에 가게 된 세틴은 실제 3 년 후에 멀린이 후계자로 결정해주는 것 이상으로 확고한 명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암묵적으로 황제까지 인정한 후계자가 된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황도로 출발하는 날짜는 그로부터 3 일 후로 정해졌다. 수행 인원을 최소한으로 하라는 칙사의 요구가 있었고, 세틴도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으나, 멀린은 기사단 하나를 딸려 보내야 한다고 고집했다. 결국 일상 기거를 수발할 수행원과 60 명 이내의 기사단이 수행하는 것으로 타협을 이끌어냈다.
“청랑대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
“네. 그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멀린이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청랑대는 정식 기사단도 아니고, 브라스트 가문 외의 젊은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겠지 ? 공국이 자랑하는 기사단이 한둘도 아닌데 왜 굳이 그 아이들을 데려가려는 거냐 ?”
세틴의 태도는 확고했다.
“대공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미 브라스트 가문의 사람들은 대부분 안락에 젖은 무골충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뼈저리게 느낀 사실입니다. 이번 기회에 가문 밖의 사람들을 중히 여긴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저와 함께 황도에 감으로써 많은 가문 밖의 사람들이 브라스트의 이름으로 운명공동체라는 점을 부각할 수 있습니다. 비록 청랑대가 정식 기사단은 아니나, 신분이나 연줄이 부족하니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올라온 자들입니다. 저는 그들을 이번 황도행에서 어느 기사단 못지 않은 전력으로 키워낼 생각입니다.”
멀린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다 좋은데 나는 경험많은 기사가 꼭 동행을 했으면 좋겠구나, 세상 구경 한 번 못해 본 아이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제가 흑룡기사단과 순행을 같이 하면서 느낀 바가 있습니다. 셔틀리 공은 훌륭한 기사이고 충심 또한 대단하나,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답답할 때가 많았지요. 급변하는 세상에는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하고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맡은 임무에만 충실하면 되던 기사들로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청랑대를 보내 주시지요.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청랑기사단으로 승격을 해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더 이상 말릴 수는 없겠구나. 네 신변에는 기존의 식구들을 그대로 데려갈 것이냐 ?”
“아닙니다. 울브린, 토마스, 상카는 모두 데려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세 가지 군사적 과제를 기억하실 겁니다. 군제 개편에는 울브린과 저스틴 형, 정보부대 강화에는 토마스, 외인부대 창설에는 상카를 적극 활용해주시기를 부탁드릴 게요. 상카를 제외하면 아직 너무 젊어서 책임자급으로 쓰실 수는 없겠지만, 잘 키우면 크게 쓰일 인재들입니다. 울브린과 토마스는 제가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겪은 브라스트 가문의 자재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사람들이고, 저스틴 형은 무재와 군재가 탁월합니다. 상카는 용병이라는 신분상의 한계가 있으니 적당한 무가의 가주를 부대의 장으로 세우시고 그를 보필하게 하시면 될 듯합니다.”
“알았다. 꼭 기억해 두마. 그런데 그러면 네 주위가 너무 허전하지 않겠느냐 ?”
“시녀장과 시녀들은 떼어 놓으려야 떼어 놓을 수 없으니 데려가기는 할 겁니다. 다만, 이번 행도에는 제가 청랑대와 동고동락 할 생각입니다. 그들을 공국의 동량으로 키워내려면 그 정도 각오는 필요합니다. 별도의 호위는 두지 않을 생각입니다. 밀착한 호위가 있으면 아무래도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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