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맞이 어전회의
새해가 되고 3일 째 되는 날, 황태자가 주재하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세틴은 미처 황자들을 모두 찾아 보지 못했기에 회의를 앞두고 간단하게 새해 인사를 올렸다.
모그란데와도 인사를 나누었는데 모그란데의 표정이 무척 밝고 자신감이 넘쳤다.
환하게 웃으며 세틴에게 덕담을 건네는 모그란데의 눈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황태자를 비롯한 황자들과 모그란데의 인사말이 끝난 후, 세틴에게도 모두에게 인사말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제국군 사령관이 으레 하는 일이었다.
“제가 올해 열 여덟이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성인으로 인정을 해주는 나이죠.
어린 나이에 제국군 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아 폭주하는 일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많은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난 연말에 동부 가도를 정비하러 나가 있는 정비단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가도를 정비하고 병참을 건설하는 일은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날이 풀리면 우살리드 토벌을 위해 진격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황도에 돌아오고 나서 제일 많이 들은 얘기가 황실과 조정의 재정이 너무 부실해서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황태자님과 여러분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의미에서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올해부터 브라스트, 6 백작령, 노스롭, 제국 남서부, 서부 에메랄드 호변, 서북부, 서부 가도의 영지들에서는 제국에 바치는 조세를 정상적으로 납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황실과 조정의 안정을 위해서는 나라 안팎의 변란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일을 할 수 있는 재정이 우선입니다.
북동부 출정을 앞두고 재정에 일조할 수 있게 되어 무척 다행입니다.
황실과 조정의 재정만 튼튼히 뒷받침 된다면, 제국군이 앞장 서서 어떤 적이라도 물리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틴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장내에서 점점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세틴이 던진 조세의 정상화라는 화두가 가져온 파문은 실로 엄청났다.
세틴이 말을 마치고 앉자마자 재무대신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 치듯이 외쳤다.
“사령관님의 말씀은 실로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희소식이자, 진정으로 제국을 생각하는 충신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령관님이 언급하신 일곱 지역은 실로 제국의 거의 절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의 조세가 정상화된다면 제국의 안정이 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현재의 재정난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습니다만, 다른 지역의 영주들이 세틴 사령관님을 본받아 조세를 제대로 상납한다면 더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지역의 영주들이 이제 무슨 명분으로 조세 납부를 거부할지 지켜볼 일입니다.”
황태자 오디어스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세틴을 치하해 마지 않았다.
“역시 폐하의 외손자가 황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구려.
제국군 사령관으로 군무만 잘 해내도 대견할텐데, 황실과 조정의 재정에도 신경을 써서 누구도 따르지 못할 선물을 안겨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습니다.
재무대신의 말대로 다른 지역의 영주들도 모두 세틴 사령관의 뒤를 따른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여러분 그렇지 않소 ? 하하하하하.”
오디어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더없이 귀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이 모그란데였다.
모그란데의 입장에서는 세틴에게 뒤통수를 맞아도 한 방 제대로 맞은 격이었다.
조세를 정상화한다는 거야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명분있는 일이지만, 자신에게는 직격탄을 날린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현재 북부는 조세를 내기는커녕 북부군 10만이 황도 부근에 주둔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재정을 대부분 갉아먹고 있었다.
모그란데가 아무리 낯이 두꺼워도 세틴이 조달한 재정으로 조정이 안정되었으니. 그걸로 북부군을 눌러 앉히겠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보나마나 모든 화살이 모그란데를 향하게 됨은 불을 보듯 뻔했다.
북부도 조세를 내야 하며, 재정을 좀먹고 있는 북부군을 해산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모그란데는 가만히 있다가는 조정이 통째로 세틴에게로 기울고 자신이 버티기 힘든 지경까지 몰린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그란데의 안색이 희다 못해 파랗게 보일 정도로 창백해졌다.
모그란데가 입을 열었다.
“조세를 정상화한다는 결단은 누가 보더라도 용기있는 일이 틀림 없소.
내가 보기에도 제국군 사령관을 정말 잘 뽑은 듯하오.
사실 오늘 신년회를 맞아 나는 중대한 결단을 발표할 생각이었소.
세틴 사령관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참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린 듯하오.
우살리드 토벌은 우리 북부군이 맡겠소.
제국군은 겨우 3 만 여에 불과하고 노스롭 토벌로 인한 상처와 피로가 아직 다 가시지도 않은 상황이오.
세틴 사령관과 제국군이 우살리드 토벌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당장 다가오는 봄, 우살리드 토벌전에 다시 또 제국군이 나선다면, 사람들은 조정이 세틴 사령관을 너무 혹사한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틴이 너무 혼자서만 공을 탐한다고 떠들지도 모르오.
물론 제국군은 완전히 빠지라는 말은 아니오.
제국군이 정찰과 선봉을 맡아주면 북부군이 본진이 되어 우살리드를 쓸어버리겠소.”
세틴에 이어 모그란데까지 연이어 터지는 폭탄선언에 어전회의가 새해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세틴은 드디어 모그란데가 넘어왔구나 하는 생각에 한편으로 안도하면서 즉각 나서지는 않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오디어스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갑자기 ?
북부군은 해산하고 돌아가라는 말이 나올까 봐 미리 선수를 치자는 거요 뭐요 ?
제국군이 착실하게 준비를 해나가고 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원......
다 좋은데 북부군이 우살리드와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는 것이오 ?
내가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부군은 아직까지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걸로 아는데......
어디 복안이 있으면 들어나 봅시다.
어설프게 나섰다가 우살리드에게 패전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 뒷수습은 누구도 감당키 어려울 것이오.”
모그란데는 오디어스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화가 어지간히 났으나, 애써 표정을 눅자치며 말했다.
“싸움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니 북부군이 경험이 없다는 말은 그냥 못들은 걸로 하겠소.
아무려면 북동부 그 촌구석에서 나온 병사들을 못 당할까.
그래도 만전을 기하기 위해 경험 많은 제국군에 정찰과 선봉을 맡기려고 하는 것이오.
세틴 사령관이 직접 참전하지 않아도 정찰이나 선봉역 정도는 감당할 장수들이 제국군에는 수두록 하다고 들었소.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든든한 지원군을 준비해두었소.
군사에는 기밀이 생명인지라 이 자리에서 모두 밝힐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오디어스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냥 믿고 맡겨달라는 소리만 반복하는구려.
그래서 승상이 직접 참전해서 지휘를 할 생각이오 ?”
모그란데가 말했다.
“아직 황도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승상이 자리를 비울 순 없소.
북부군에도 뛰어난 장수라면 얼마든지 있소.
그리고 나와 세틴 사령관이 황도를 단단히 지키고 있어야 딴 생각을 하는 무리들이 준동하지 못하오.
내가 승상직과 가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소.
만약 우살리드에게 이기지 못한다면 내 깨끗이 물러나리다.”
세틴이 생각하기에 갈리온이 모그란데에게 지원을 약속했을 가능성은 낮았다.
단정할 근거는 없으나, 사라진 옴비두스와 예전의 일을 생각하면, 혹시 동부왕국연합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동부연합이 제국으로 밀고 들어와 모그란데와 힘을 합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었다.
이때, 세틴이 골트릿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만 보아도 무언가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세틴이 넌지시 먼저 나서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골트릿이 일어서며 말했다.
“승상께서 우살리드 토벌에 북부군이 나서게 한다 하시니 이는 제국을 위한 충정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군사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으니 함부로 승패를 논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얘기 중에 다소 우려되는 바가 있어 이렇게 나섰습니다.
저는 현재의 정세를 봄에 있어 큰 기준이 있습니다.
누가 더 옳으냐 그르냐, 누가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제국에 벌어진 난국을 하나라도 수습하려 하느냐, 난국을 더 부추기느냐가 그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우살리드 토벌전 또한 누가 주도하느냐를 떠나서 난국을 수습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승상께서 기밀이라 하시니 캐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내 생각에 우살리드 토벌에 나설 만한 세력은 갈리온 후작의 남부와 동부왕국연합 뿐입니다.
만약 갈리온 후작이 승상을 도와 우살리드 토벌에 나선다면 나도 쌍수를 들어 환영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동부왕국연합이 끼어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승상께서 답변하기 난처하다면 굳이 명백하게 밝히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자리에서 제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합니다.
동부왕국을 제국으로 끌어들이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역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모그란데에게 골트릿은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생각과 가는 길이 다름을 떠나서 평생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그란데의 안색이 흙빛인지 똥빛인지 알 수 없도록 검붉게 변했고,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세틴의 짐작이 맞았고 모그란데는 골트릿에게 정곡을 찔린 셈이었다.
골트릿이 그렇게까지 분명하게 말을 했으니 조정에서 감히 반대할 사람이 없었고, 이 문제에 대한 여론의 향방도 불문가지였다.
가까스로 표정을 수습한 모그란데가 말했다.
“이황자님의 말씀은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우살리드 토벌에 북부군이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군사에는 기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제국군과 힘을 합쳐 우살리드를 반드시 무찌르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세틴이 조세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모그란데는 우살리드 토벌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외통수게 걸렸다.
하지만 모그란데가 동부왕국을 끌어들인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앞날은 한층 어두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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