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의 사정
오디어스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사실 내게 쓸만한 아들이 없는 건 사실이지.
하나같이 멍청하고 게으른 돼지같은 작자들 뿐이라......
세틴 자네도 저스틴을 내 후계자로 공표하는 것이 황태자로서 내 지위를 공고히 하고 제위를 승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
세틴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저스틴 부마가 내 형이라서 그를 위해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일각에서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황태자 전하에 대한 불순한 소리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오디어스가 입맛을 다시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해......”
그러면서 비언차이의 눈치를 살피는 오디어스였다.
이 사안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세틴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기도 했고, 감찰 이후로 강제로 자숙하고 있는 비언차이가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
세틴이 비언차이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그대의 생각을 궁금해 하시는군.
오늘은 자리가 자리이니 만큼 내 특별히 허락할 것이니 할 말이 있거든 해 보게.”
비언차이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세틴 사령관님의 말씀이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충언이라고 생각하옵니다.
굳건한 황실을 바라는 마음이야 황궁 내에 있는 저희나 황비마마님들 뿐만 아니라 제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
저의 비루한 소견으로는 전하께서 오늘 마음을 정하시고 당장 내일이라도 널리 공표하시면 좋겠사옵니다.”
오디어스의 표정이 그제서야 풀렸다.
“다들 그런 생각이라면 미룰 이유야 없지.
오늘 밤에 충분히 생각을 해보고 내일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네.”
오디어스는 물론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세틴이 왜 오디어스의 후계자를 공표하는 문제를 그토록 중시하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상 오디어스를 내치기로 마음을 굳힌 세틴은 황궁이 정리되는 즉시 차기 황제를 세울 생각이었다.
그들은 모두 세틴이 차마 오디어스를 내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든 도우려 하는 줄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세틴에게 결코 편하지 않은 자리였다.
오디어스의 우둔함과 억지도 말할 수 없이 싫었고, 내관들과 황비들의 비위를 맞추는 소리도 역겨울 뿐이었다.
내관들이 찧고 까불며 오디어스가 이미 황제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다는 듯이 온갖 아부를 늘어놓고 있을 때, 세틴이 더 이상 참고 있기 어렵다는 듯 한 마디 했다.
“저번 황궁 감찰의 뒤처리를 인명을 다치지 않고 화합을 다지는 차원에서 조용히 마무리하기는 했으나, 황궁에 쌓인 적폐는 분명하게 기록되었고, 이는 역사에 남을 것이오.
내가 지금까지 황태자 전하의 체면을 생각해서 참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황궁에서 또 요상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지금 폐하께서 오랜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시고, 내관들과 황비들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근신 처분을 받고 있는 상황임을 벌써 잊은 듯 싶소.
황태자 전하께서 보위를 잇는 거야 누구라도 토를 달 수 없지만, 전하께서 보위에 오른다고 해서 그대들의 잘못이 모두 덮어질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용납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하오.
외척이나마 황실의 피를 이은 내가 백성들 보기에 창피해서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지 그대들이 예뻐서 봐주는 게 아니란 말이오.”
비언차이를 비롯한 내관들과 황비들이 감히 세틴에게 말대꾸는 하지 못하고 은연중에 오디어스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나서서 세틴에게 한 소리 하라는 뜻이었다.
오디어스가 난처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령관의 말이 말이야 다 옳은 말이지.
어느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네 말대로 요즘 황비님들과 내관들도 반성을 많이 하고 자숙하고 있음은 물론, 조정에서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니 비상금으로 간직하고 있던 돈까지 꺼내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네.
어떤 내관은 밖에 부모형제들이 살고 있던 집까지 팔아야 했다지.
그럼에도 하루 빨리 재정을 복원해달라는 소리 한 마디 없는 걸 보면 그만큼 자중하고 있다고 봐줘야 해.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도 고통을 겪고 있는 황비님들과 내관들을 격려하려는 배려도 있었으니, 자네도 그쯤 하고 좋게 좋게 자리를 마무리하도록 하세.”
그러나 세틴은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요즘 전하께서 폐하의 처소를 전혀 방문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일, 이 황자께서 이미 돌아가신 상황이니 폐하의 용태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전하의 효심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행여 전하께서 폐하를 소홀히 대하신다는 소문이라도 생길까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디어스가 말했다.
“자네는 참 귀도 밝군.
어찌 황궁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 소상히 알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폐하를 소홀히 한다는 말은 헛소문일세.
요즘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는 때가 극히 드물고,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한 지가 꽤 되었어.
그래서 어의들이 꼭 필요한 용무가 아니면 가급적 외부 노출을 삼가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고, 폐하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근위대도 최근 부쩍 사람들의 출입을 심하게 단속하는 모양이더군.
그러니 내가 폐하의 얼굴이나 뵙자고 들락거릴 수는 없지 않은가.
참나, 그런 소문까지 돌고 있다니 세상 인심이 이래서야......”
세틴은 이러쿵 저러쿵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 정도 말이 나왔으면 황태자가 별 이유 없이 황제의 처소를 방문할 가능성을 차단한 셈이었다.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또는 다른 의혹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출입을 삼갈 가능성이 커진 셈이었다.
세틴은 황비나 내관들과는 일체 말을 섞지 않았고, 이래 저래 어색한 분위기가 지속되니 자리가 오래 갈 수 없었다.
세틴은 물러나오면서도 찬바람이 쌩 하니 불기라도 하듯 내관들을 냉정하게 쓸어보고야 발걸음을 돌렸다.
관저로 돌아온 세틴을 뜻밖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전에 갈리온의 사자로 세틴을 방문했던 설파였다.
우살리드의 북동부를 평정한 후로 제국군의 정보부대는 동부와 남부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틴은 남부가 돌아가는 사정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는 편이었고, 최근 만난 놀란으로부터도 대략을 상황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설파가 갑작스레 다시 세틴을 찾은 이유야 묻지 않아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정중하면서도 꼿꼿한 자세로 예를 올린 설파가 말했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일전에 사령관님을 만나 뵙고 돌아간 이후로 저 나름대로는 가급적 남부가 제국군이나 조정에 대립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오늘은 협상이 아니라 부탁을 드리기 위해 찾아 뵈었습니다.”
세틴은 설파를 가볍게 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찌 되었든 자신이 모시는 사람에 대한 충심이 한결같고, 모든 일에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깡마른 얼굴이 전보다 훨씬 초췌해진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이 일기도 했다.
“설파 경은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나는 경을 좋게 보고 있고, 남부를 적대하거나 내치려는 생각을 추호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설파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열리고 있는 총독회의에 제가 참관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이는 저 개인의 부탁이 아니라 갈리온 후작 각하의 깊은 뜻이 담긴 부탁입니다.
사실 남부는 적극적으로 조정을 적대시한 적이 없음에도 늘 경계하고 따돌리는 대상이었습니다.
우리의 잘못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런 상태로 남게 될까 두려움이 크다 하겠습니다.”
설파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고개를 길게 내밀며 속삭이듯 말했다.
“후작께서는 적당한 기회에 사령관님을 차기 황제로 추대하려는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이루신 공적으로 보나 향후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나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더 길게 설명하려는 설파를 세틴이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두 번 들어 보았겠습니까 ?
그에 대해서는 구차하게 내 입장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대신 하나 묻겠습니다.
설파 경은 남부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하셨는데 이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
의외로 설파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각하께서 4 황자 전하를 이용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보려는 생각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4 황자께서 지존의 그릇이 아니라는 사실은 저도, 후작께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작께서도 최근에는 미망에서 많이 벗어나신 것도 사실입니다.
사령관님을 추대하겠다는 이유도 4 황자 대신에 사령관님을 앞세워 행세를 해보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협상이 아니라 부탁을 드리러 왔다는 얘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자면, 남부는 지금 혼란이 극에 달한 상태입니다.
남쪽 바다에 연한 항구도시들에서는 최근 무역과 상업이 크게 흥하면서 후작 각하의 입김이 전혀 닿지 않고, 전통적인 영주들은 자신들도 곧 영주로서의 권리를 잃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에 싸여 있습니다.
사실 그런 영주들이 후작 각하를 앞세우기는 했지만, 후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기보다 자신들의 권리를 어떻게든 지켜보겠다는 생각이 우선입니다.
저는 차라리 사령관님의 힘을 빌어 주변 영주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편이 낫겠다는 건의를 여러 차례 올린 바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진작부터 사령관님을 찾아 뵙고 싶었으나, 남부 자체가 어수선하고 각하께서도 분명한 방향을 잡지 못하시니 저도 꼼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추대 건은 사령관님께 못들은 걸로 하시겠다니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총독회의를 참관이라도 하려는 이유는 이번 총독회의에서 향후 각 지방이 어떻게 다스려질지 방향이 정해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부도 제국 전반의 큰 흐름에서 배척당하거나 소외되지 않고 같이 참여할 길을 찾고 싶습니다.
사실 이번에 후작 각하께 이것이 마지막 남은 구명줄이라고 반 협박을 해서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부디 남부도 원활하게 제국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설파의 간곡하고 솔직한 말에 세틴도 적지 않게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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