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정국
선물이라 했을 때 설마 피임을 위한 마도구라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조차 못한 세틴이었으나, 막상 시오미에게 그 말을 듣자 무슨 뜻인지를 곧바로 깨달았다.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 하고 있는 세틴을 향해 시오미가 조금은 대찬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그 태도는 ?
설마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지 ?”
당황한 세틴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지.”
시오미가 다그치듯이 말했다.
“우리 서로 잘 알잖아.
지금은 아이가 생기면 안된다는 걸.
아이가 생기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우리 둘 다 난감해지지.
하지만 난 하루라도 빨리 더 가까워지고 싶어.
마침 전에 세틴이 준 마도구 중에 인간의 몸에 어떤 작용을 하는 걸 발견했어.
그래서 그걸 여기 적용해본 거야.”
세틴은 필요는 발명의 아버지라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시오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전생의 성경험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세틴이 어쩌면 시오미보다 간절하고 현실적으로 원했던 일이었다.
세틴이 짧게 말하며 시오미를 껴안았다.
“말 할 수 없이 고마워.”
그렇게 둘은 그날밤 처음으로 합방을 했다.
설파와의 면담을 전해 들은 호아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저는 왠지 갈리온이 모그란데에게도 사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에게만 동맹을 요청할 이유가 있을까 싶네요.
만약에 그 둘이 손을 잡는다면 우리가 궁지에 몰리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갈리온이 속을 알기 힘든 자임은 확실합니다.
설파가 꺼낸 제안들을 보건대 어떻게든 제국을 자기 손아귀에 놓고 싶어 하는 야욕을 버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요.
다만, 모그란데와 손을 잡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갈리온이 모그란데에게 손을 내밀기에는 명분이 너무 없고, 모그란데가 그 손을 잡아주기도 어려울 거에요.
일단은 모그란데가 우살리드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면 윤곽이 나오겠지요.
갈리온이 우살리드 토벌에 앞장 서겠다면 적극 환영이라는 입장을 전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나올 거라 보시나요 ?”
호아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 생각엔 갈리온이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무엇보다 남부군이 총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우살리드에 맞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지요.
남부는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이 가장 발달했지만, 오랜 세월 군사적인 사건이 없던 곳입니다.
재정이야 어디보다 퐁족하더라도 군사력을 단기간에 키우기는 만만치 않을 겁니다.
갈리온은 군사적인 모험보다는 재력을 바탕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가져간다는 기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가 동부 가도에 다녀온 사이에 조정에서는 이미 빈약한 재정으로 인한 갈등이 터지기 시작했더군요.
재정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황도의 안정을 바라기는 어려워요.
갈수록 이 문제가 크게 부각될 텐데 갈리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생길 여지가 많겠습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갈리온이 자신의 사위인 4황자를 제치고 황태자를 지지하기는 어렵습니다.
황태자와 모그란데의 갈등이 커지고, 모그란데가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된다면 갈리온의 존재가 부각될 수도 있지요.
그것보다 재정 문제가 떠오르면서 북부군에 대한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얼마 후면 해가 바뀌는데 아마도 새해가 되면 모그란데가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갈수록 몰리는 처지가 될 테니까요.”
카스텔라는 꽤나 화려한 점심상을 차려 놓고 세틴을 맞았다.
정식으로 둘 만의 만남은 세틴이 황도에 돌아온 뒤 처음이었다.
“어서 와, 세틴. 오랜만이네.
이제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사람이 되어 버렸군.”
세틴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황녀님께 인사 드립니다.
우살리드 토벌을 준비하느라 몸을 빼기 어려워 두 차례나 만남을 미루게 된 점 심히 송구합니다.”
카스텔라가 웃었다.
“빈틈없이 예의바른 건 여전하군.
우리가 사촌인 건 둘째 치고 잘 하면 부부가 되었을 수도 있는 사이인데 말이야.
표정만 봐도 얼른 용건만 끝내고 돌아가고 싶어하는 줄 알겠어.
아무리 급해도 내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니까 일단 식사부터 하자.”
황도에서는 귀하고 싱싱한 재료로 만든 요리가 수십 가지였다.
음식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지만, 세틴은 간단하게 몇 가지를 맛보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다.
“듣기로 세틴이 전장에서는 그렇게 무섭게 잘 싸운다던데 그렇게 먹고 어떻게 버텨 ?
나보다 식사량이 적네 ?”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많이 먹지 않아서 장군치고는 몸집이 작지요.
하지만 덩치가 크다고 잘 싸우는 건 아닙니다.”
흥미를 잃은 카스텔라도 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옮겼다.
“황태자께서 우리 혼사를 다시 추진할 의사가 있는 듯해서 내가 말렸어.
나도 더이상 자존심 상하기 싫고 세틴에게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고, 어차피 정략 결혼이라면 브라스트 가문에서 사람을 찾고 싶어.
이런 얘기를 다른 누군가와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부득이 세틴을 보려 한 거야.
혹시 추천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다시피 내가 브라스트 가문에서 막내입니다.
13 공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형제는 스물이 훌쩍 넘지요.
정실로 인정을 받는 대공부인들이 낳은 아들들은 모두 기혼입니다.
그밖에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형제도 있지만, 나이도 좀 있고 무엇보다 신분 때문에 어려울 듯합니다.”
카스텔라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렇군.
저번 일을 겪으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황녀라는 신분이 실제로 보잘 것 없다는 거야.
이제 아버지께서 황태자가 되셨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선 건 아니지.
오늘 점심상을 보고 세틴이 실망했다는 걸 알아.
지금 황실도 조정도 턱없이 부족한 재정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
실은 나도 먹고 입는 걸 비롯해서 최대한 절제하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내가 세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 최대한 성의를 표하고 싶었을 뿐이야.
혹시 형제 중에 신분이 낮더라도 추천할 만한 사람도 없어 ?”
세틴이 잠시 고심하더니 말했다.
“글쎄요.
두 분이 잘 어울리실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나중에 한 번 만나 보시고 뜻이 통한다면 신분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할 길이 있습니다.
능력과 인성은 내가 보증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두 분의 뜻이 가장 중요하니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카스텔라가 반색하며 말했다.
“오, 그런 분이 있어 ?
엄청 기대가 되는데 ?
그런데 신분 문제라면 ?”
세틴이 말했다.
“저스틴 형은 내 검술 스승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낮은 신분이라 부인으로 대접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분이랄 게 없지요.
그러나 그분 자신이 검술 마스터라 스스로의 능력으로 작위를 얻기에 충분합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요.
만약에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백작위를 양도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획득한 작위가 더 명분이 있겠지요.”
카스텔라가 말했다.
“제국 전체에 마스터가 열 명도 되지 않을 거라 들었어.
그런데 젊은 나이에 마스터라니 대단한데 ?
무엇보다 세틴이 보증하는 분이라면 꼭 만나 보고 싶어.”
세틴은 짧은 사이에 꽤 많은 고심을 해야 했다.
저스틴의 뜻을 모르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황태자와 브라스트 가문이 다시 엮이는 일이었다.
세틴이 이 만남을 주선하기로 작심한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 좋기만 하다면 나쁜 일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어차피 세틴 자신이 황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황제의 외손자이고, 멀린은 황제의 사위였다.
세틴 자신이 아니라 다른 형제가 카스텔라와 맺어지는 것이 그렇게까지 큰 정치적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다는 판단이었다.
카스텔라가 브라스트 가문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면 저스틴을 연결해주는 것이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저스틴을 생각해도 늘 낮은 신분의 굴레에 짓눌려 살아온 인생에서 탈출할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선에 나가 있는 저스틴과 카스텔라의 만남이 단시간 내에 성사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세틴은 우살리드 토벌전이 끝나고 난 후, 가능하면 저스틴이 전공으로 작위를 얻고 나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드는 편이 낫겠다고 작심했다.
카스텔라를 만나고 나오는 세틴을 황태자의 시종장이 붙잡았다.
황궁에 들어와서 황태자를 만나지도 않고 가는 법이 어디 있으냐며 굳이 끌어다 오디어스의 앞에 앉혔다.
세틴은 오디어스가 모그란데를 비난하는 온갖 소리와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앓는 소리를 저녁이 될 때까지 들어주어야 했다.
생각보다 오디어스가 모그란데에게 가진 원한의 깊이가 매우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디어스는 모그란데를 자신이 황제로 등극하는데 큰 조력자로 생각했을 뿐인데, 사실상 모그란데에게는 애초에 오디어스를 황제로 밀어 올린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고, 자신를 이용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디어스는 무슨 수를 써서든 모그란데를 반드시 꺾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거듭 거듭 강조했다.
한편으로 모그란데를 확실하게 주저앉히고 자신을 황제로 등극시켜 주기만 한다면 세틴에게 어떤 대가라도 치를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우선 카스텔라와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달라는 소리도 몇 번이나 말을 바꿔 가며 거듭하면서 세틴을 설득하고자 했다.
세틴은 당장 힘으로 모그란데를 꺾으려 하면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을 초래할 뿐이라고 오디어스를 달랬고, 급하게 서둘 일은 아니니 대의를 좇아 가면 될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세틴이 보기에 오디어스는 상당히 조급해 보였다.
모그란데에게 배신당해 구금당한 경험으로 인해 하루라도 빨리 모그란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세틴은 그럴수록 자신이 오디어스에게 조금은 냉정하게 굴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세틴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는 순간, 오디어스는 세틴을 이용해 모그란데를 축출하려는 과격한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디어스에게 질리도록 시달림을 당한 세틴은 밤이 깊어져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세틴은 다만 오디어스에게 자신이 핏줄로서 어떤 경우에도 그에게 적대적으로 맞서지는 않을 거라는 점만을 확실하게 믿도록 하는데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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