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세의 신년회
세틴이 18 세가 되는 새해가 밝았다.
세틴의 사저에는 황궁에서 몸을 빼기 힘든 오클린과 군상을 위해 파견 나간 상카를 제외하고 브라스트의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호아니는 모처럼 휴가를 내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네사는 한 자리에 모인 난다, 완다, 저스틴, 울브린, 토마스를 보며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야말로 핏줄이나 다름 없을 만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었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바네사와 울브린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짝이 없는 네 명의 혼사 문제가 화두였다.
세틴이 저스틴의 결혼 문제를 꺼내면서 시작된 얘기였다.
세틴이 일전에 카스텔라와 나눈 이야기를 전하며 저스틴의 의향을 물었다.
“우선 내가 이 혼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를 말할게.
카스텔라는 현재 미혼인 여자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다고 볼 수 있어.
전에 봤을 때는 허영기가 좀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진 거 같아.
그것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여자지.
본인이 브라스트 가문과 맺어지기를 원해.
물론 나하고는 전에 있었던 일도 있고 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지.
알다시피 브라스트 가문에서 미혼인 공자는 내가 유일해.
그래서 저스틴 형을 추천했어.
신분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는데,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결하겠다고 했어.
내 생각에는 서두를 것은 없고, 형이 당당하게 작위를 얻고 나서 본격적으로 추진하면 어떨까 싶어.”
저스틴은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얼떨떨 하네.
그런데 아무래도 신분이 걸린다.
난 황녀는커녕 귀족 가문의 여식과 맺어진다는 기대도 해본 적이 없어.”
토마스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스틴 도련님.
마스터가 그렇게 흔한 존재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제국 전체를 통틀어 채 열 명이 되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에요.
과거의 예를 보면 마스터라는 것 하나로 백작의 지위에 오른 장군들이 있었습니다.
당장 마스터니까 작위 내놔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적당한 전공만 세운다면 작위를 얻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더구나 세틴 사령관님이 팍팍 밀어주시잖아요. 하하.”
저스틴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세틴이 말했다.
“당장 결정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고민해도 되는 문제야.
나는 신분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 편이지만, 형이 자신감 있게 능력을 펼칠 수 있으려면 신분 조건을 갖출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혹시 따로 생각하고 있는 여자가 있는 건 아니지 ?”
저스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그런 거.
너도 알잖아.
난 애초에 검과 결혼했다 생각하고 평생 살 생각이었어.”
난다가 끼어들었다.
“저스틴 경처럼 멋진 분이 혼자 사는 건 낭비라구요.
당장 길거리에 나가 신부감을 구해도 줄을 서겠고만요. 하하.”
토마스가 난다에게 화살을 돌렸다.
“어째서 저는 난다님이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소리로 들리죠 ?
요즘 가도 정비단에서 어떤 남녀 간에 밀당이 장난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던데요 ?”
난다가 버럭 화를 냈다.
“어떤 정신 나간 자가 그딴 소리를 해요 ?
베른 그 망나니, 정신 상태를 개조하느라 혼내주는 걸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보이죠 ?”
토마스가 깐죽이며 말했다.
“나야 직접 보지 않았으니 모르죠.
베른 경비대장이 난다님 앞에만 서면 평소와 다르게 얌전한 고양이처럼 군다고 하더만요.
흑심이 있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다는 게 중론입니다. 하하.”
난다가 펄펄 끓는 젊은 청년인 베른의 그런 분위기를 모를 턱이 없었다.
애써 무시하곤 했는데 토마스에게까지 그런 소문이 전해졌다면, 정비단에서는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난다는 시오미가 나타난 이후로 세틴의 마음이 그녀에게 흠뻑 기운 것을 알고는 정실이든 첩이든 세틴과 맺어진다는 기대를 버린 지 오래였다.
완다와 함께 세틴군에서 정식으로 직위를 받은 뒤로는 결혼은 일단 머리 속에서 지우고 일에만 몰두한다는 마음을 다졌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베른이 자신을 좋아하는 게 보인다는 말을 토마스에게서 들은 난다는 미묘한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베른은 외모나 성격이나 어디 하나 빠질 게 없는 귀족 청년이었고, 새삼 난다의 마음 속에서 베른이 남자로 훅 다가오게 되었다.
세틴이 웃으며 난다의 난감한 입장을 풀어주었다.
“완다는 누구 없어 ?”
완다의 대답이 의외였다.
“비밀 !”
세틴이 말했다.
“오, 있다는 얘기네 ?”
“비밀이라니까요. 하하하.
나중에 확실해지며 말씀 드릴게요.”
“호, 자꾸 비밀이라고 하니 더 알고 싶어지는데 ?”
완다는 말없이 배시시 웃고만 있었다.
세틴은 내심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토마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안 물어 보세요 ?
저도 장가가고 싶은데......
내가 울브린보다 나이도 많은데......”
세틴이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마스는 아직 안돼.
지금은 죽어라 일할 때지.
토마스도 나중에 번듯한 자리에 오르고 나서 결혼을 생각하는 편이 나을 거야.”
토마스가 말했다.
“왜 나만......”
울브린이 간만에 입을 열었다.
“그야, 아직 철이 덜 들었으니 그렇지.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나 ?”
모처럼 토마스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울브린의 표정이 전에 없이 밝았다.
토마스는 여전히 울상이었다.
“나만, 나만 아직 철이 없다는 거지.
아, 이러다 진짜 장가도 못 가보고 홀아비로 늙는 거 아냐 ?”
울브린은 신이 났다.
“누가 들으면 한 사십 먹은 줄 알겠네.
이제 갓 스물 넘긴 애송이가 무슨 홀아비 타령이람.”
“나보다 나이도 적은 애송이가 자꾸 애송이라 그러면 듣는 애송이 기분이 좋을까 ?”
“그러니까 일찍 장가 들었다고 적당히 놀렸어야지. 하하하.”
난다가 바네사를 보며 말했다.
“바네사 언니도 이런 자리에 상카님이 없어서 쓸쓸하겠어요.”
바네사가 씩씩하게 말했다.
“나만 혼잔가 ?
여기 전부 혼자잖아.
이럴 때 상카가 있었으면 오히려 내가 불편하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여유 있게 나눠본 적이 언제였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푸근해지는 새해 아침이었다.
바네사는 여전히 엄마이자, 비서이자, 조언자로서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난다와 완다는 기대를 아득히 넘을 정도로 맹활약을 펼치며 제국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저스틴과 울브린, 토마스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제국군에 당장 가장 시급한 일들을 각각 맡아서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맹세를 하고 약속을 하지 않아도 날로 두터워지는 믿음과 유대를 바탕으로 성장해가는 이들을 보며 세틴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실감했다.
하루 종일 지난 이야기도 나누고 즐겁게 웃고 떠들며, 술과 음식을 마음껏 즐겼다.
세틴은 저녁 무렵이 되자 자리를 정돈하고 향후 전개될 정국과 전쟁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 세틴의 생각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꿰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세틴이 정리한 기본적인 방향과 제국군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조목조목 정리해 주었다.
우선 우살리드와의 전쟁에는 무슨 수를 쓰든 모그란데를 앞장세운다.
제국군은 참전을 하더라도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이며, 아마도 모그란데와 세틴은 황도를 떠나지 않는다.
호아니도 황도에 머물 예정이라 지금 모인 식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저스틴, 난다, 울브린, 토마스는 모두 참전해야 한다.
제국군은 궁병 단일 부대로 2 만 가량 참전 예정으로, 울브린과 베른이 기병 정예부대를 이끌고 정찰과 특수 작전을 감당하게 된다.
저스틴의 무인 정보 부대는 지속적으로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며 정보 공유에 힘쓴다.
어느 부대든 우살리드의 레인저 부대에 대한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특히 설산표범 부대와 기병 레인저에 대한 대책을 세밀하게 세우고, 매 작전마다 그들의 움직임에 맞춘 대응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이 모든 요소들을 총괄할 사람은 토마스이므로 이번 토벌전에서 토마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이번 전쟁을 통해서 무인 부대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
무인 부대는 소수지만 막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창의적인 전술을 개발하는 데 있어 저스틴의 책임이 막중하다.
울브린은 무엇보다 기병의 취약한 방어력을 어떻게 보안할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레인저 부대에게 무작정 돌격하는 기병은 말 그대로 밥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여기에 베른이 제안한 단발성, 혹은 간편한 원거리 무기의 활용, 그리고 그것을 활용한 전술 훈련을 충실하게 진행해야 한다.
난다는 노스롭 토벌전을 통해 정립한 행정 체계를 긴급하게 변화하는 전황에 따라 어떻게 적용하고 때로 변용할 지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다.
이런 내용들을 각자가 완전히 숙지했다고 판단될 때까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상정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틴은 특히 저스틴이 전국적인 정국을 보는 눈을 키우고, 적과 아를 막론하고 대규모 군대 운용의 여러 면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기를 바랬다.
세틴이 판단하기에 저스틴의 장군으로서의 재능은 누구 못지 않게 뛰어났다.
그는 자신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검만 아는 검귀’가 아니었다.
그가 검술에만 매진한 것은 오히려 신분상의 약점을 스스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인정한 가운데 갈 길을 뚜렷하게 잡는 곧은 정신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만큼 저스틴은 처세에 어리숙하지도 않았고, 여러 면에서 재능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무인 부대의 지휘를 맡겨 정보활동에 파고들도록 한 것은 그런 저스틴이 전세를 종합적으로 보는 눈을 키워주기 위함이었다.
저스틴은 서서히 저력을 발휘하면서 유능한 지휘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리라는 점을 세틴은 믿어 마지 않았다.
원래 무인들은 군인들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달랐다.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무언가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고, 틀에 박힌 군율을 꺼려 했다.
저스틴은 그런 무인들과 함께 제국군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무인들이 제국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이끌어 간다는 임무 또한 감당해야 했다.
저스틴 자신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천생 무인이었기에 무인들의 마음과 행동방식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그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세틴의 구상에 맞는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이루어질 일이었다.
사실 적진을 넘나들면서 스파이와 같은 일을 수행해야 하기에 무인들로서는 목숨을 걸고 나서야 했고, 또한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했다.
개성이 다양한 무인들을 이끌고 그런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하는가가 바로 저스틴의 역량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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