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6백작령
세틴은 나바니아에게 특별히 강철검과 철광석 공급에 신경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일 년에 수십 자루만 생산되는 강철검은 제국의 모든 장수들과 무인들이 갖고 싶어하는 무기였다. 또한 나바니아산 철광석은 순도가 높아 가공이 수월하고 산출하는 무구의 질이 높기로 유명했다.
연회가 파한 후 세틴은 놀란, 오클린과 저스틴, 울브린, 토마스와 별도의 자리를 가졌다. 말하자면 ‘식구끼리’의 모임인 셈이었다. 저스틴이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세틴, 눈이 부실만큼 멋지게 성장한 네 모습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대공께서도 너를 하루빨리 보고 싶어 눈이 빠져라 기다리실 거야. 어디 아픈 데는 없지 ?”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형, 정말 반가워요. 브라스틴을 제압할 때 활약한 얘기는 놀란을 통해 들었어요.
첫 마디가 한 판 뜨자는 얘기일 줄 알았는데 아닌 걸 보니 벽을 넘으신 모양이군요.
축하드려요. 세틴군 본대에도 ‘브라스트의 검귀’와 붙어보고 싶다는 장수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형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저스틴이 쑥스럽게 웃었다.
“마스터에게 대련은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았어. 오늘 너와 놀란 백작의 말을 들으면서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틴 사령관의 형이 검밖에 아는 게 없는 무식쟁이라는 소릴 들을 수는 없지.”
세틴이 말했다.
“나중에 호아니 군사를 소개해 드릴 게요.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며칠을 떠들어도 지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 좋은 스승이 되어주실 겁니다. 울브린과 토마스도 마찬가지구요.”
토마스가 말했다.
“오랫만에 만났는데 다짜고짜 공부 좀 하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
울브린도 만만찮게 고생을 했지만 제가 정보부대 만들고 키운다고 얼마나 죽을 똥을 쌌는지 모르실 겁니다.
고리타분한 기사들 때문에 사실 울브린이 배는 더 힘들기는 했지요.
그나저나 프라움에 들렀다가 바로 황도로 향하시면 이번에는 저희들도 데리고 가실 겁니까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다들 브라스트를 지키느라 고생 많았어. 노스롭은 서막에 불과하지.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야. 브라스트의 밑천까지 총동원 해도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되겠지. 병력은 2, 3천 정도만 데리고 갈 생각이야.
토마스는 해줘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지금 세틴군은 최상의 정찰부대를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군에 국한된 역할이지.
민정과 감찰을 전담할 인력이 없었어. 토마스가 제국 전역을 아우를 수 있는 정보부대를 만들어 줘야 해.”
토마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각오하고 준비해왔습니다. 소가주님의 눈과 귀가 되어 줄 정예 요원들을 정선하여 갈고 닦았습니다.
무엇이든 맡겨만 주세요. 그런데 울브린은 새 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차마 발이 떨어질까 걱정입니다. 하하하.”
울브린이 토마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 무슨 쓸 데 없는 소린가. 만약에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면 마누라고 뭐고 단칼에 베어버리고 소가주님을 따라 나설 거네.”
목을 움츠리는 시늉을 하는 토마스를 보며 웃던 세틴이 말했다.
“울브린,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말게. 대체 처자가 어떤 사람이길래 그리도 함부로 말을 한단 말인가 ?”
대답은 토마스에게서 나왔다.
“말은 저렇게 해도 울브린이 부인에게 꽉 잡혀서 살고 있다는 걸 프라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부인이 자그만치 율리 올란드 후작의 막내 따님입니다.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는 켜녕 죽는 한이 있어도 소가주님에게 상처 하나 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다짐을 두실 분이지요.
괜히 큰소리 치는 겁니다. 흐흐흐.”
울브린이 다시 토마스를 노려봤으나 딱히 반박하지도 않았다.
세틴도 실소하며 말했다.
“형과 울브린은 병력을 선발할 때, 두 가지를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나는 병력의 수보다 질이 우선입니다.
젊고 패기 넘치는 자들을 엄선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병에 집중하기보다 다양한 병과에서 확실한 특기를 가진 병사들을 뽑아야 합니다.
일 년 이상 실전으로 다져진 현재의 세틴군 정예는 두 분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강력합니다.
체력과 기량은 물론 엄정한 군기까지 빠지는 데 없는 군대입니다. 그런 군대에서 일 인 분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병사가 아니라면 굳이 데려갈 필요 없습니다.
울브린과 저스틴 형, 두 분은 내일 아침 일찍 먼저 프라움으로 출발하세요. 가서 저와 함께 갈 병사들을 선발해두세요. 세틴군 정예의 수준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오클린 대장이 최종 확인을 할 겁니다.”
세틴은 놀란의 영주성에서 하루를 더 머물면서 나바니아를 비롯한 영주들, 관리자들과 향후 대책을 마련했다.
거윈은 일단 세틴과 나바니아 사이의 연락과 물자 운송을 담당하도록 했고, 나바니아에서는 최정예 기사단 하나가 직접 참전하기로 했다.
오스틴과 놀란을 묶어서 서스텐이 관리하도록 하여 사우셔를 통한 해상 운송과 전함 개발 및 수군 양성에 착수하도록 했다.
당장 해전에 대비할 필요가 긴급하지 않지만, 향후 원활한 해상 무역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해전 역량을 키울 기초라도 닦으려는 배려였다.
놀란 영지는 예전에 구호 사절단으로 왔을 때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으로 꿈처럼 아름다운 정경을 자랑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구릉들이 그리는 완만한 곡선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고, 그 위에 펼쳐진 푸르른 초원은 물론 점점이 박혀 있는 소 떼, 양 떼, 말 떼들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세틴이 테오의 등에 올라 길을 가다 서서 한참 동안 방목하는 가축들을 바라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놀란이 말을 걸었다.
“장군, 참 평화롭지요 ? 언제 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경입니다.”
세틴이 말했다.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벌판도 좋지만 초원을 수놓고 있는 가축이 이렇게 정겹고 사랑스러울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지키고 이어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기는 순간들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예전에 구호 사절단으로 왔을 때 보았던 모습과 대비가 되어 한결 감회가 깊네요.”
놀란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저것들이 모두 저의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 속이 좀 쓰리네요.
하하하. 농담입니다. 사실은 장군께서 왜 저리 유심히 별 것 아닌 광경을 바라보실까 생각했습니다.
내 것일 때는 그저 그런 광경일 뿐이었는데,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아름답고 소중하게 보이더군요.
돌이켜보면 영지를 돌아다닐 때마다 소출을 생각하고 세금을 계산하고 도둑맞을 걸 걱정했습니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장군께서는 백성들의 삶을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땅과 백성을 내 것으로 삼는 삶과 사고방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틴이 놀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게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말하는 거군요. 난 그저 좋아서 바라봤을 뿐인데 백작의 머리와 입을 거치니 그런 멋진 해석이 나오네요.
하하.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제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처음 백작을 만나고 나서 든 생각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
‘내게 저만한 형이 있었다면 대공가의 후계자가 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새삼 친구가 되고 싶고,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고, 같은 꿈을 꾸고 싶었던 마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시네요. 고마운 일입니다.”
놀란이 말했다.
“고맙기 그지없으나 과분한 말씀입니다. 생각난 김에 한 마디 드리고자 합니다.
간혹 백작으로 불리는 것이 어색합니다. 저 뿐 아니라 작위를 박탈당하거나 반납한 귀족들이 앞으로 많아질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호칭을 통일했으면 합니다.
그냥 이름을 부르기가 힘드시면 경이라는 호칭을 쓰시는 건 어떻습니다. 일반적으로 높은 사람이 신하에게 붙이는 호칭이니 그리 어색하지 않을 듯합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차츰 정착시키도록 해보지요.”
오스틴 영지를 지나면서 세틴은 아마도 오스틴이 대공령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들은 넓었으며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든든하게 지켜주는 듯했고, 그린 드래곤 호수에서 내려온 그린 테일 강은 들을 적셔주기에 충분했다.
세틴이 6백작령의 구휼을 위해 순방에 나섰을 때, 맨 처음 만났던 강가의 유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틴을 환영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연도에 늘어선 주민들의 행색에서는 궁핍한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진심으로 세틴을 반갑게 맞아준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왔다.
말을 타고 안내를 위해 나란히 가고 있던 서스텐이 세틴에게 말했다.
“오스틴의 백성들은 모두 장군님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때 강가로 장군께서 직접 찾아주셨던 일도 모두 기억하고 있고, 나중에 장군님 덕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다들 철석같이 믿고 있지요.
영주님을 닮아 천성이 유순하고 착하기만 한 백성들입니다. 반갑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시지요.”
쑥스러운 마음에 연도에 늘어선 백성들을 웃음지으며 둘러보기만 하던 세틴이 서스텐의 말을 듣자 깨닫기라도 한 듯 양손을 들어서 흔들어 주었다.
세틴의 모습에 백성들에게서는 온갖 탄성과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세틴이 서스텐에게 말했다.
“오스틴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진심으로 대공령에서 내가 가장 살고 싶은 곳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브란스틴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 오스틴이 전화에 휩싸이지 않아서 무척이나 다행입니다.
모두가 오스틴 백작과 서스텐 경이 밤낮없이 애쓰고 보살핀 덕분입니다.
서스텐 경의 어깨가 한결 무거워졌습니다.
이제 오스틴 뿐 아니라 놀란의 백성들까지도 서스텐 경이 맡아서 살펴주셔야 합니다.
내가 몇 차례 말했지만, 이제는 작위는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진심으로 백성들을 위하고 그들을 위해 피땀흘려 노력하느냐가 중요하지요.
백성들을 위해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스텐이 황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같은 사람에게 너무 과중한 일을 맡겨주셔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오스틴만 해도 저에게는 버거운데 놀란은 물론이고, 해상 무역이나 해군 양성까지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틴이 웃으며 서스텐을 격려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대가 오스틴 백성들을 위해 연기도 마다 하지 않고, 그나마 맡고 있던 직위에서 쫓겨날 것까지 감수한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덕망 높으신 오스틴 백작과 오스틴의 백성들을 위하는 진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저는 서스텐 경이 그런 마음으로, 그리고 타고난 성실성과 평생 닦아온 실무 능력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12 폭포 가도는 다시 보아도 절경이었다.
전에 왔을 때처럼 긴박한 느낌은 없었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낭떠러지 길을 지날 때는 오금이 저려왔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놀란에서 하늘 요새까지 6백작령을 다시 돌아본 세틴의 감상은 남달랐다.
새삼 브라스트 대공령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하는 것이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