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죽을 때까지 모를 거야
시오미가 벌떡 일어서더니 무너지듯 바네사의 품에 안겼다.
바네사는 어쩔 수 없이 상자를 떨어뜨리고 시오미를 받아들여야 했다.
시오미는 바네사의 가슴이 흥건해질 정도로 눈물을 쏟고서야 고개를 들고 밝게 웃었다.
“바네사, 저는 떠나고 나서야 바네사가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답니다.”
바네사도 마주 보며 웃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나는 주인의 마음을 대신해서 널 대했을 뿐이야.
아차, 이제는 내가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고귀한 신분이 되었는데 말을 이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시오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바네사는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혈육처럼 가깝게 느낀 사람이에요.
신분 때문에 거리를 둔다면 너무 서러울 거에요.
제발 예전처럼 대해줘요.”
바네사가 떨어뜨린 상자를 들어 올려 탁자 위에 놓고 열었다.
까만 갑옷이 들어 있었다.
“이건 장군께서 직접 처단한 할라크라는 오우거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야.
제국 최고의 장인들이 오랫동안 정성들여 만들었지.
아마 황궁의 보고를 털어도 이보다 좋은 갑옷은 많지 않을 거야.
가볍고 신축성이 좋아서 로브 안에 껴입어도 좋을 거야.
마법 처리까지 되어 있어서 요즘같은 더위에도 시원하고 겨울엔 보온도 잘 될 거야.”
바네사는 직접 시오미의 로브를 벗기고 갑옷을 입혀주었다.
신기할 정도로 잘 맞고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을 주었다.
시오미가 세틴에게 말했다.
“전장에서 늘 제일 위험한 곳에 앞장 선다고 들었는데, 자기 갑옷이나 만들지 나 같은 마법사가 이런 갑옷이 필요할 일이 얼마나 있다구요.”
세틴이 말했다.
“잘 어울려서 보기 좋네.
광택이 전혀 없게 만들어서 쉽게 눈에 띄지 않지.
내가 예언하건데 시오미는 조만간 현재 가장 위험한 전쟁터에 서게 될 거야.
정말 힘든 상황에 처할 수도 있어.
그 갑옷이 한 번 정도를 목숨을 구해줄 수도 있어.
지금부터 웬만하면 갑옷을 벗어놓지 말길 바래.”
때마침 난다와 완다가 들어왔다.
그녀들은 모두 시오미가 받은 갑옷과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세틴에게서 오우거 갑옷을 선물 받은 네 명이 모두 모인 셈이었다.
난다, 완다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중에도 시오미의 눈길이 갑옷에 자주 머물 수밖에 없었다.
난다가 말했다.
“시오미 공녀님, 믿기 힘들겠지만 완다와 저는 세틴 장군 휘하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시녀의 신분이 아니에요.
이번에 공식적으로 제국군의 5급 장군이 되었지요.
이 갑옷은 죽도록 우릴 부려먹으려는 장군의 뜻이 담긴 갑옷이에요.
오해는 하지 마시길...... 하하하.
지금까지 우리가 세틴 장군을 침실로 끌어들이려고 열 두 가지 계책을 써봤는데 모두 실패했어요.
우린 신랑감을 찾아볼 시간조차 없이 바쁜데 이러다 처녀로 늙어 죽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세틴이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두 사람한테 할 말이 있어.
이제 둘이 더 이상 붙어 다니지 못하게 되었어.
호아니 군사에게 말해두었으니 조만간 자리가 마련될 거야.
둘 중에 한 명은 군상 무역체계를 만드는 일을 해줘야 해.
시건부터 브라스트, 노스롭까지 다리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녀야 할 거야.
일단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오미는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모그란데를 생각해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황궁의 경비가 몇 배로 강화되고, 황도 경비대가 성문 및 대로 주변에서 수시로 검문, 검색을 해대는 통에 황도 전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황실 근위대와 황도 경비대가 모두 모그란데에게 완벽하게 장악되어 있는 상황에서 금방이라도 피바람이 불어닥칠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 중에도 황자들의 연금을 풀어달라는 상소는 끊임 없이 이어졌다.
귀족들의 밀실에서는 이와 관련한 대화들이 오갔고, 밤이 되면 술집마다 황자들을 가엽게 여기고 황실이 처한 상황을 개탄하는 말들이 시끌벅적하게 터져나오고 있었다.
어전회의 전날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모그란데가 직접 사령관 관저로 찾아왔다.
비밀스러운 방문이었다.
그는 세틴이 황궁에 가게 되면 만남이 알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저는 아직까지 묘안을 마련하지 못했는데 너무 일찍 오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모그란데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여유가 넘치는 걸 보니 내가 군대를 동원해서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군.
어쨌든 나는 자네를 믿고 지금까지 참고 있었네.
피차 피를 보지 않고 넘길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오늘 밤 황도가 피에 잠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지.”
세틴이 물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2황자님과 약간의 인연이 있을 뿐, 황도에 인맥이라 할 게 딱히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갈 줄은 몰랐습니다.
조정 관료들과 귀족들이 공작에게 이렇게 큰 반감을 갖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공작께서는 제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모그란데가 화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나를 비웃는 건가 ?
시중에 제일 많이 떠도는 얘기가 내가 보낸 접객단에게 자네가 무엇보다 우선해서 황자들의 연금 문제를 거론했다는 거야.
설마 이번 사태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
셔플린이나 시오미가 그런 얘기를 퍼트렸을 리가 없으니 자네가 이번 소동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봐야지.
원인을 제공한 쪽이 해결책을 내놓는 건 당연한 거야.”
세틴이 말했다.
“공작님의 말씀이 모두 맞다고 해 두죠.
하지만 황실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엄연한 현실입니다.
공작께서 내린 소집령에 응한 귀족이 몇이나 있었습니까 ?
제국 모든 귀족들의 뿌리가 바로 황실입니다.
황자들이 모두 연금을 당한 상황에서 소집령에 흔쾌히 응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황실에 대해 공작께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든 당장은 황실을 복원하지 않고서 수습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공작께서 동의하지 않는다면 저는 앞장서서 연금을 풀라고 나서지 않겠다는 말 외에 할 말이 없습니다.”
모그란데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자네가 연금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겠다고 약속한 걸로 알겠네.
내가 상소를 올린 주동자들을 잡아들이고 벌을 내려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나 ?”
세틴이 미소를 띄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이제 막 제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제가 정치적인 사안에 나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루 빨리 제국군을 재건해서 각지의 불온한 세력들을 정리하는 데 집중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공작께서 애초에 그들을 가둔 명분에도 부분적으로 공감합니다.
오늘날 제국과 황실, 조정을 이 모양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들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황자들의 연금을 풀어주시는 편이 여러 모로 좋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분들은 저의 외숙부님들 아닙니까 ?
공작과 제가 서로 맞서는 모양새는 누구를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어떤 명분이나 사심 없이 공작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황자들을 이만 풀어 주시지요.”
모그란데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세틴의 속마음을 가늠하고 유불리를 따져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연금을 푸는 건 어렵지 않네.
황자들을 자유롭게 놓아 둔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연금을 풀고 나면 황태자를 세워라, 섭정에서 내려오라는 얘기가 나올 건 불을 보듯 뻔하지.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밀리게 되어 있어.
연금을 풀고 싶어도 나로서는 그 다음을 생각해야만 해.
자네가 두 가지만 약속해 주면 우리는 피를 보지 않고서도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네.
황태자 선임에 끼어들지 말 것, 그리고 내가 왕작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것.”
세틴의 대답은 빨랐다.
“왕작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황태자 선임은 끼어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누구를 황태자로 옹립하시든 관계없이 돕겠습니다.
저는 황실의 정통성과 안정을 바랄 뿐 황실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생각이 없습니다.”
모그란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틴을 노려봤다.
“그 말을 믿어도 되겠는가 ?”
세틴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는 뒤에서 일을 꾸미고 사람들을 조종하는 일을 해본 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도 대부분이 브라스트 대공가의 배경 때문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믿지 않으셔도 제 마음을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저는 2 황자를 가장 믿고 좋아 합니다.
하지만 그 분은 나이도 많고 자식도 없습니다.
황태자가 되신다 한들 황실의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순위는 낮지만 저에게도 제위 계승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서 순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죠.
굳이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를 잘 아실 겁니다.
제가 마음 먹으면 여러 가지 그럴싸한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누구나 할 겁니다.
저는 제위에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공공연하게 그런 생각을 밝힐 수도 있습니다.”
모그란데가 비웃듯 말했다.
“쓸데 없는 소리.
그런 짓을 한다면 자네에게 계승권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공론화하려는 의도겠지.
꿈도 꾸지 말게.”
세틴이 농담조로 말했다.
“왜요 ?
시오미가 황후가 되고 공작께서 실권을 행사하는 것도 쓸만한 그림 아닌가요 ?
하하하, 그저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저는 제위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저는 썩어빠진 귀족들의 특권을 일소하고 제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는 목표가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도 공작님과 얘기를 나눠보고 싶군요.”
모그란데가 말했다.
“자네가 노스롭을 비롯해서 남서부와 6백작령에 내린 여러 가지 조치들에 대해 들었네.
제국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와 일맥상통할 만한 부분이 꽤 있다고 느꼈네.
자네가 상신한 안들을 두 말 없이 수용한 이유도 그 때문일세.
자네 말대로 나중에 시간을 내서 깊숙한 얘기를 해보세.
내일은 다른 자들이 잡스럽게 떠들기 전에 자네가 앞장 서서 황자들을 풀어달라고 주장해주게.
내가 그것을 즉석에서 수용하는 모습이 제일 깔끔할 것 같아.”
이것으로 세틴의 일차 목표는 거의 차질 없이 달성한 셈이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모그란데가 세틴에 도움을 요청하고 세틴이 깔끔하게 수용하는 그림이 나왔고, 세틴이 황자들의 연금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그림을 모그란데가 스스로 요청하는 상황이 되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