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틴의 선물
세틴이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으니, 선물을 주고 받는 일이 축하연의 메인 이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리 정한 순서에 따라 한 명 씩 나와서 세틴에게 선물을 증정하고, 세틴이 준비한 선물을 받아가는 방식이었다.
오디어스는 축하연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가장 먼저 황태자가 보낸 선물이 공개되었다.
오디어스는 무슨 생각인지 열 명이나 되는 꽃다운 처녀들을 선물이라고 보내왔다.
시녀로 쓰든 하녀로 부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전언이었다.
세틴은 무덤덤한 어조로 황태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중 일이지만 세틴은 그녀들을 모두 프라움으로 보내버렸다.
이후에 신분과 직위에 따른 순서대로 선물을 주고 받는 행사가 한 나절 넘게 계속되었다.
그냥 주고 받고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 선물에 대해 설명하고, 왜 그런 선물을 준비했는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일일이 공개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무슨 선물을 준비했는지는 애초에 세틴의 관심 밖의 일인지라 세틴은 주는대로 그저 감사하다는 간단한 인사로 넘어갈 뿐이었다.
문제는 세틴이 준비한 선물이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온통 그 쪽에 쏠려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놀랐던 대목은 세틴이 선물하는 사람마다 주요 관심사와 취미, 성격까지 거론하며 그에 걸맞는 선물을 준비했다는 점이었고, 더욱 놀란 것은 거의 예외없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만 마련할 수 있는 선물이라는 점이었다.
대개 축하연은 주최측에서 비교적 간단한 선물을 일괄적으로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각 사람 마다 치밀하고 세심하게 준비했다는 사실도 그렇고, 들어간 비용이 천문학적일 거라는 추정이었다.
모든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첫 번 째 경우는 바로 법무대신 수기란에 대한 선물이었다.
수기란이 준비한 선물은 때묻은 고서 한 권이었는데, 세틴이 그에게 준 선물은 황도에 있는 저택 한 채와 1 만 골드라는 현금이었다.
사람들이 더욱 놀란 것은 세틴의 설명이었다.
“저는 평소에 법무대신과 교류가 전혀 없었고, 오다 가다 얼굴을 마주친 적은 몇 번 있었겠지만 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습니다.
천년 제국의 대신이라는 분이 가족과 함께 살지도 못하고, 황도에 방 한 칸을 빌려 살고 있다 들었습니다.
저는 이 한 가지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로 조정의 재정이 엉망이 되고, 대신을 비롯한 관료들의 급료마저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제국을 대신해 사과드리는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른 걱정 없이 제국을 위해 진력하실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제국과 조정의 현실에 대해 많은 점들을 시사하는 내용이었다.
진정으로 제국을 위해 헌신봉사하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세틴이 직접 나서서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함은 물론, 당장 사비를 들여서라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건 바로 잡겠다는 뜻이었다.
이후에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큰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줄잡아 20 여 명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대부분 형편이 풍족하지 못하고, 평소에 조정에서 그리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딱히 흠을 잡지 못할 정도로 자기 일에는 철저하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세틴에게서 선물 받은 집들이 모두 한 지역에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세틴이 오골보르를 통해 황궁에 그리 가깝지는 않으나, 황도의 외곽이라고는 볼 수 없는 한 구역을 거의 통째로 사들여서 그들이 모여 살도록 준비한 것이었다.
그 구역은 애초에 오골보르 상단의 소유이거나, 상단에서 일하는 자들이 기거하던 집들이 많고, 상단 본부와도 가까운 구역이었다.
황도에서는 드물게 대나무가 우거진 집들이 많아 죽림촌이라 불리던 이 동네는 훗날 제국의 청백리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날 세틴이 사실상 황도의 유력자들과 고위 관료들이 대부분 포함된 축하연 참석자들에게 제공한 선물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모두에게 나름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준 것은 맞지만, 누가 보더라도 세틴의 선물에는 차등이 분명히 있었다.
선물의 차등이란 곧바로 세틴이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을 조정의 중추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가 자연스럽게 회자되었다.
또한, 세틴이 조정에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으니, 어떻게든 세틴에게 선을 대보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세틴은 일명 죽림촌에 집을 받은 사람들을 은밀하게 따로 모아 조촐한 연회를 베풀었다.
죽림촌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 가장 크고 화려한 집이 바로 오골보르 상단주의 집이었는데, 이제부터는 세틴이 사용할 예정인 장소에서였다.
세틴은 그들 모두에게 각자 사람을 보내서 모임이 있다는 얘기는 하지도 않고 세틴이 잠깐 만나고 싶어 한다며 연회장으로 데려 왔다.
21 명이 모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법 깊은 밤이었다.
간단하지만 정갈한 다과상을 받고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 하고 있는 이들에게 뒤늦게 입장한 세틴이 인사말을 건넸다.
“이런 시간에 충분한 설명도 없이 이렇게 모이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좋을 일이 없는지라 저로서는 조심스럽게 여러분을 모셨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오늘 모인 분들은 모두 제가 죽림촌에 집을 마련해드린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파당을 형성하거나 세를 과시하는 걸 싫어하고, 조정에서 맡은 바 일에 충실함을 신조로 삼고 계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큰 선심을 베푼 이유가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고 보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저 또한 파당을 만들어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모든 사안에 입을 맞추어 내 편에 유리한 방향으로 가져가려는 행태를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를 도와달라거나 지지해 달라거나, 충성을 바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반대로 앞으로 제가 여러분을 지켜드리겠다는 말씀을 하고 싶어서 모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잘 해오셨지만,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소신에 맞게 모든 일을 처리해나가시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황자 전하께서는 저에게 외삼촌이시지만, 볼모에 가까운 신세로 황도에 들어온 16 세의 저를 오늘날까지 이끌어 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이제 인사불성이 되고 가실 날만 기다리고 있는 이 황자 전하를 찾아 뵈었을 때, 그분이 남긴 유서를 넘겨 받았습니다.
유서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글은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대다수가 포함된 명단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고,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이들 대다수가 이 황자 골트릿과 깊은 인연이 있거나,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골트릿이 세틴에게 자신들을 부탁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고, 골트릿이 이미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에 새삼 슬픔이 복받쳤던 것이었다.
이들이 감정을 추스릴 시간을 주고 나서 세틴이 말을 이어갔다.
“권력자에게 아부나 할 줄 알고, 목소리나 높이는 자들이 설치는 조정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방패막이가 되어드릴 것이니 마음껏 소신을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조정 대사가 권력자의 의지나 세력들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이 대의에 입각해서 모든 일이 처리될 수 있도록 제 목소리를 내야 조정이 똑바로 섭니다.
당장 어려운 점이 있거나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다 할 수 있는 수기란 법무대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 저희들에게 번듯한 집을 마련해주시고,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심을 쓰신 일에 대해서 솔직히 저희 모두가 적지 않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는 분’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전하께서 이 황자 전하의 유언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런 의혹이 열에 아홉은 사라졌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사실이 훨씬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경우입니다.
아시다시피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이 황자 전하의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분의 아낌과 보살핌을 많이도 받았지요.
그리고 그분이 ‘세틴이야말로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여러 차례 듣기도 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조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일말의 반대나 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저희들은 지금까지도 나름대로 대의에 입각해서 소신껏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저의 짐작으로는 조정의 대사에 보다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장 조정의 대사라 하면 황궁을 증축하는 문제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황태자를 따르는 무리들과 다른 황자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사사건건 목소리를 높이고 한치도 양보 없는 대립이 계속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황궁 증축 문제에 대해 저희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수기란은 제국의 대신답게 한 번 일을 열기 시작하니 말이 청산유수였다.
얘기의 맥락과 핵심을 짚어내는 능력이 감탄스러울 만큼 대단했다.
마지막의 질문은 어느 정도 세틴을 시험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뜬구름 잡는 얘기 말고, 당장 구체적으로 뭘 어쩌자는 거냐고 돌직구를 날린 셈이기도 했다.
세틴은 엄지척이나 박수라도 치고 싶을 만큼 가슴 속에 환희가 들끓어 올랐다.
그렇게 길지 않은 말이지만 수기란이라는 사람의 경륜과 사람됨과 능력을 가늠할 수 있었고, 이런 대단한 사람을 왜 이제야 마주하게 되었는지 한스러울 정도로 기꺼운 마음이었다.
“제가 황도에 들어서자마자 월칸 전하의 빈소에서부터 마주친 문제가 바로 황궁 증축 문제였습니다.
여러분께서 수도 없이 목도하셨을 바로 그 장면이었죠.
그날도 황태자와 다른 황자들이 한치의 양보 없이 다투시더군요.
지금 상황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황국을 증축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 심정은 한 마디로 ‘황당하다’였습니다.
먼저 여러분께 밝히는데, 저는 제국군 사령관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생각임을 전제로 황태자에게 황궁 증축에 대한 확고한 반대의 입장을 전한 바 있습니다.
요즘 황태자께서 그 문제를 다그치지 못하는 데는 아마도 그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단적으로 황태자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못합니다.
사실 지금 황궁 증축을 논할 수 없는 이유를 대자면 수도 없이 많지 않겠습니까 ?
역사적인 전거를 들든, 제국의 재정 상황을 들든, 황도와 백성들의 민심을 들든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유는 자칫 황자들의 세력 다툼에 말려드는 모양새가 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황태자 뿐 아니라 다른 황자들도 역시 제 눈치는 봅니다.
만약 조정에서 황궁 증축이 재론된다면 대전회의가 황자들의 아귀다툼이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황태자께서는 체면을 중시하는 분이라 그의 체면을 너무 깎아 내리지만 않는다면 조정에서 정상적인 논의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제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겁니다.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각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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