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 즉위 축하연
서로 귓속말을 주고 받거나 혼잣말을 하는 자도 있었고, 말이 고파 엉덩이가 들썩이는 자들도 있었으나, 먼저 나서서 공식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디어스도 호아니의 폭탄 발언에 심히 당황했는지 어찌 대처할 바를 모르고 좌불안석이었다.
세틴과 호아니는 그런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오디어스의 신호를 받은 내무대신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말했다.
“아니, 호아니 군사는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우리 감찰부와 의논을 해야지 대전회의에서 그런 식으로 불쑥 들이미는 법이 어디 있소 ?
반란군과의 내통이라는 엄청난 사안이라지만, 사실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소 ?
당장은 제국군 군사부가 황궁 감찰에 끼어드는 일을 허락할 수 없소.
나중에 우리 감찰부와 의견을 조율하고 나서 다시 정식으로 제기하도록 하시오.”
호아니가 태연하게 응수했다.
“감찰의 최종 책임자인 내무대신께서 그런 생각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사실 내통의 증거라는 게 누가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는 그런 내용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
우리도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 교차 검증을 해 봐야 명확히 드러날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국군 자체에서 시간을 두고 좀 더 치밀하게 조사를 진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내무대신께서 불허한다는데 극구 밀어붙일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저는 다만, 이번에 황궁 감찰이 결정된 김에 감찰부와 함께 조사를 나가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을 뿐입니다.”
오디어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내무대신은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불허한다고만 하면 어쩌나 ?
모그란데와 내통한 건이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냐고.
이 자리에서 내통 건에 대해 상세한 얘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는 호아니 군사의 말대로 이번 황궁 감찰에 그 사안도 포함하는 쪽으로 기울었소.
다만, 이번 감찰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내무부 주관이니 제국군에서는 내무부의 통제에 따라 감찰에 참여해야 하오.
아시겠소 ?”
호아니가 싹싹하게 대답했다.
“역시 황태자 전하께서 현명하십니다.
감찰을 주관하는 감찰부의 통제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에 조금의 이견도 없습니다.”
사실 세틴과 호아니는 호아니가 감찰 과정에 끼어들어 구경만 할 수 있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반란군과의 내통’이라는 떡밥을 던져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거둔 셈이었다.
내통의 근거라는 게 전혀 없는 사실은 아니었지만, 황궁의 내관들이 모그란데와 주고 받은 서신들에서 거창한 사실들이 드러난 것은 없었다.
모략에 능한 모그란데가 황도로 진격하기 전, 그러니까 황자들과 이런 저런 일들을 꾸밀 때, 또는 그 훨씬 이전부터 황궁 내에서 모그란데의 눈과 귀 노릇을 한 내관들은 많았다.
하지만 모그란데가 승상 자리를 벗어던지고 반역의 길에 접어든 이후로 실질적으로 황궁의 내관들이 모그란데와 함께 꾸밀 만한 거창한 일 자체가 없었다.
세틴은 제국군이 모그란데와 내통한 내관들의 명단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거론하는 것으로 일단은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감찰에 참여해서도 반역이나 내통에 대해 속속들이 조사하고 뿌리를 뽑겠다는 정도로 덤빌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지도 않았고, 일단은 황궁 내의 세력들에게 세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도발을 보내는 것이 세틴의 주 목적이었다.
세틴은 그들을 한꺼번에 들어낼 충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큰 무리수를 두지 않을 수 없도록 유도하자는 전략이었다.
세틴이 황도로 돌아온 이상, 황궁 밖에서 오디어스나 황궁 내 세력들이 세를 불리기는 훨씬 어려울 터였다.
그리고 황태자가 가진 어쩌면 거의 유일한 무기는 황제 유고 시 즉각 차기 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권리였다.
그렇다면 황궁 내의 황비들과 내관들이 낼 수 있는 수라고 해 봐야 뻔했다.
하루라도 빨리 오디어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자신들의 승리라고 보고, ‘황제의 유고’ 상황을 앞당기는 일이었다.
지금 세틴은 그들을 그 길로 몰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오클린이 초기부터 세틴의 언질을 받아 워낙 강력하게 틈을 주지 않고 있어서 황제가 먹는 음식이나 약물에 손을 쓰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유일했다.
어떻게 해서든 몇 사람의 희생을 발판 삼아 황제를 무력으로 시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세틴은 짐작하고 있었다.
대전회의 이후, 곧바로 황궁에 대한 감찰이 진행되다 보니, 오디어스는 스스로 발을 묶고 조정에서 어떤 일도 진행시키지 않았다.
감찰이라는 폭풍이 한 번 지나간 후에야 본격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다시 추진할 생각일 터였다.
그렇게 황궁 감찰과 총독회의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황궁과 황도에는 폭풍 전야처럼 무겁고 불안한 긴장감이 지배하고 있었다.
세틴은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히 제한하고 시오미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황자에게 병 문안을 갔으나, 골트릿은 이미 거의 의식불명이었다.
워낙 약골이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골트릿은 월칸처럼 간간히 정신을 차리는 일도 없었다.
세틴이 보기에 골트릿은 안타깝게도 이미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꽤 오랫동안 골트릿의 머리맡에 앉아 그를 지켜보던 세틴이 골트릿의 부인에게 말했다.
그녀는 세틴이 출정하기 전에 만났을 때의 혈색 좋고 명랑한 노부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숙모님, 만약에 삼촌께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신다면, 제가 상주가 되어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세틴의 말은 간단했으나 그 의미가 작지는 않았다.
제국군 사령관이자 현재 가장 잘 나가고 있는 세틴이 아들 노릇을 하겠다고 자청한 셈이었다.
퀭한 눈에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던 골트릿 부인의 얼굴에 잠시 화색이 감돌았다.
“그래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황자께서도 세틴을 친자식 못지 않게 아끼는 마음 뿐이었으니......”
골트릿 부인이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하마터면 깜빡 할 뻔 했네요.
황자께서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떨리는 손으로 쓴 글인데,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한 걸로 보였어요.
말은 없으셨지만 내 짐작에 아마도 세틴에게 남기는 글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세틴이 받아 보니 과연 열 세 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었다.
마지막에는 글씨가 너무 흩어져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어렵게 쓴 글이었다.
세틴은 종이를 소중하게 품속에 간직했다.
짐작하기로 믿어도 좋을 사람들이거나, 세틴이 지켜주었으면 하는 사람들, 혹은 둘 다인 명단이었다.
골트릿의 성정상 경계하거나 멀리 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그토록 어렵게 작성해서 남기지는 않았을 터였다.
일 황자가 세상을 떠나고 이 황자도 오늘 내일 하는 마당에 대공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기에는 꺼림칙한 세틴이었으나, 작위를 내려준 황태자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일, 이 황자를 이유로 연회를 열지 않겠다고 하면, 보나마나 오디어스는 ‘형님들은 중하고 나는 무시해도 되는 거냐’고 시비를 걸어올 게 뻔했다.
세틴이 측근들과 상의한 결과, 기왕에 연회를 열어야 한다면 정국을 전환할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세틴은 축하연을 시끄럽게 놀고 먹고 마시는 방식으로 할 수는 없으니, 대신에 오는 사람들에게 큰 선물 보따리를 풀 거라는 소문을 내도록 했다.
명분은 세틴이 반란군을 평정하는 동안 황도를 별 탈 없이 지키고 제국군을 지원해준 사람들에게 그간의 노고에 걸맞는 선물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틴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가기 위해 대공 즉위를 축하하는 선물을 잔뜩 준비하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았는데, 세틴의 답례가 만만치 않을 거라 하니 선물을 준비하는 그들의 발걸음이 더욱 분주해졌다.
세틴은 내친 김에 오디어스에게 절대로 독주하는 것을 두고 보지 만은 않을 거라는 확실한 신호를 주고자 했다.
보기에 따라 선물을 주고 받는 요식 행위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누가 세틴에게 무엇을 주고 답례로 무엇을 받았더라 하는 얘기는 해석의 소지가 무궁무진 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세틴은 그런 얘기들이 나오고도 남을 만큼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제공할 생각이었다.
이는 단지, ‘제국의 대공이라면 이런 정도의 배포는 있어야 하는구나’하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 동안에는 의식적으로 곁을 잘 주지 않았던 세틴이 본격적으로 황도의 제 세력들과 교류하겠다는, 다시 말하자면 세를 형성하겠다는 신호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 될 터였다.
연회를 준비하면서 세틴은 호아니와 함께 골트릿이 남긴 명단을 깊이 있게 검토하였다.
그 중 상당수가 호아니가 이미 잘 알고 있거나,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경우도 있어서, 세틴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은 곧바로 확인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세틴과 호아니는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향후 조정의 중추로 키워 나간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확인해 보니 하나같이 청렴결백한 사람들로 가진 재산도 없고, 황도에 변변한 집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현재 법무부를 맡고 있는 수기란이라는 대신은 명색이 제국의 대신이면서도 처자식은 황도 주변의 시골에 살고 있고, 자신은 황도에 방 한 칸을 빌려서 지내고 있었다.
마침내 세틴의 대공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는 날이 왔다.
제국군 사령관의 관저에 마련된 연회장에는 미리 초대받은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고, 초대장을 받기 위해서 사전에 엄청난 뒷거래가 있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과연 누가 초대를 받고 받지 못했는지 자체가 황도의 큰 관심사가 되었다.
연회장에는 간단한 음식과 차가 준비되어 있을 뿐, 술도 없었고 화려한 음식상도 없었다.
말은 거창하게 해놓고 너무 무성의하게 준비한 게 아니냐는 말들이 오가면서 웅성웅성 하는 가운데 세틴이 입장했다.
“저의 대공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이렇게 와주신 모든 분들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연회가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는데, 일 황자 전하께서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 황자께서도 오늘 내일 하는 마당에 너무 소란스럽게 연회를 열 수 없는 저의 입장도 고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제가 언젠가 대공이 될 후계자라 해서 대공 작위를 받는 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배려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며, 또한 제국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봉사라는 뜻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뜻을 받들어 제가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께 분명하게 천명하고 자 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제국군의 사령관이자 제국의 대공으로서 조정의 대사에 나몰라라 하는 태도를 완전히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제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황도에 왔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 반란군을 완전히 제압하고 개선한 이후에도, 제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극력 자제해왔음을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러분 각자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답례라고는 하지만 제게 어떤 축하 선물을 준비하셨는지와는 전혀 무관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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