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랑가 고원
호아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적구를 밀어내고 오른쪽으로 꺾여 날아간 지점에 대기하고 있던 가우디의 결정적인 타구에 드디어 골이 터졌다.
당구 경기의 승패가 갈리면서 그날 훈련은 막을 내렸다.
당구는 제국군의 훈련에서 결정판과 같았다.
활약과 전적에 따라 모든 지휘관과 병사들 개개인에 대한 평점까지 매겨지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병사들의 함성이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연병장을 빠져나오며 세틴이 호아니에게 물었다.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지나서 북부나 황도로 직행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
호아니가 신중하게 답했다.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수백 단위의 특수부대라면 모를까 대군을 이끌고 넘기에는 하랑가가 너무 험할 겁니다.
하랑가는 제국의 북쪽 전체를 막고 있는 대산맥에서 남쪽으로 가장 길게 빠져나온 지맥인데, 높고 험하기도 하지만 사막이나 다름없이 황폐한 고원지대입니다.
광활한 지역에 비해 거주하고 있는 주민도 거의 없고, 하랑가를 통해 왕래하는 상인들도 없습니다.
북부과 북동부가 직선으로 그렇게 멀지 않으면서도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원인이기도 하지요.”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기는 하나, 이번에는 그곳까지 다녀올 시간을 내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어 북부를 공략한다면 적어도 모그란데에게는 상당한 타격이 되지 않을까요 ?”
호아니가 세틴의 집무실에 자리를 잡아 앉으며 말했다.
“모그란데가 전력을 끌어왔으니 북부를 공략 당하면 속수무책일 겁니다.
하지만 우살리드도 자신의 전력을 그쪽으로 돌리지 않는 한 북부를 장악하기는 쉽지 않을 테죠.
어쨌든 전황에 따라 고려할 만한 전략이기는 하겠습니다.
우살리드 토벌의 주력군이 제국군이냐 모그란데 군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모그란데가 이쪽에 주력한다면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겠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제가 걱정하는 지점이 바로 그거에요.
이제 슬슬 북부군이 우살리드 토벌에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을 텐데, 모그란데가 직접 나서지는 않더라도 최대한 병력을 동원하겠지요.
그러자면 나를 황도에 붙잡아 두려 할 테고, 제국군은 적당히 써먹으려 할 거에요.
변수가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제 목표가 북부군이 토벌에 앞장 서도록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우살리드에게 완전히 망하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참전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북부군이 주력으로 나서주기만 한다면 나는 모그란데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줄 생각입니다.
변수가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사령관님만큼 장수와 병사를 아끼고 신중하게 전술을 구상할 수 있는 장군은 거의 없습니다.
사령관님이 참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최고지휘관을 누구로 할지도 생각해 봐야겠군요.
믿을 만한 최고참 장군들이 전부 총독이나 시건 요새에 빠져 있습니다.
고진 장군, 푸스킨 궁병대장, 커티스 장군, 코머스 장군이 그 다음 서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솔직히 전권을 맡기기에는 모두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모그란데가 어떤 요구를 해오든 나는 이번 전쟁에 궁병대를 주력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우살리드의 주력이 레인저 부대이니 기본적으로 궁병을 주력으로 내세우는 게 맞습니다.
푸스킨 장군이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은 아니지만, 부하들을 아끼고 신중하며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고진과 푸스킨이 같은 2등 장군이지만 이번에는 고진을 보조로 돌리는 게 어떨까 싶어요.
고진 장군은 여전히 전투의 주력이라기보다 정찰에 주력하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궁병대를 2 만 이상으로 증원하고 푸스킨 장군에게 최고 책임을 맡겨볼까 합니다.”
호아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푸스킨 장군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군사참모부에서 몇 명을 파견하여 보좌하게 하면 큰 실수는 하지 않을 겁니다.
당장 궁병대를 2 만 이상으로 증원하는 게 큰 일입니다.
병사야 편입 기준만 낮추면 머리수 채우기는 어렵지 않겠으나, 새롭게 개발하고 있는 활을 비롯한 장비들을 제대로 갖출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세틴이 말했다.
“하하, 제가 요즘 여기저기서 확보한 자금이 조금 있습니다. 지금쯤 시건 요새에서 장비 개발은 얼추 끝났을 거에요.
시건에서 병사 충원과 장비 제작을 서둘도록 조치하세요.
자금은 모자라지 않게 지원을 약속하셔도 좋을 겁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사령관님은 사람도 많이 만나지도 않으시는데 어디서 그렇게 많은 자금이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든든하긴 합니다.”
세틴이 다시 웃었다.
“하하, 요즘 모그란데까지도 내게 돈을 보내옵니다.
‘중립’이라는 한 마디가 모든 세력에게 기대를 하게 만든 마법의 단어지요.
군사도 황도에서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 않나요 ?
이게 다 군사께서 사람들에게 밑밥을 잘 깔아주신 덕입니다.”
세틴이 하링가 고원에 대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었다.
제이 병참 기지가 예정된 하라무스 자작령이 하링가 고원의 끝자락에 인접한 지역이었다.
또한 만약 토벌군이 우살리드에게 패배하여 밀리게 될 경우 일차 저지선이 될 곳이었다.
세틴의 논의의 끝맺음으로 지시를 내렸다.
“우리가 하링가 고원에 정찰대를 상주시키거나 할 여유는 없습니다.
우살리드가 소수의 특작대를 파견하는 것까지 신경쓸 이유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주력의 절반 이상을 그쪽으로 돌린다면 포착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향후 우살리드 토벌이 끝날 때까지 이 부분에 대한 주의를 놓지 않도록 참모부에서 대책을 세워 주세요.”
하라무스까지는 다빌라에서 3 일 거리였다. 역참 두 개가 둘 사이에 있는 셈이었다.
다빌라 동쪽에는 목재 다리를 통해 건널 수 있는 강이라기보다 개천에 가까운 물길이 큰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둘쨋날 도착한 역참에서 세틴은 또 다른 주변 영주들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동부 가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영지의 귀족들도 여럿 모습을 드러냈다.
하라무스에 가까워지면서 확실히 전쟁에 대한 긴장감이 높아진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영주들의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우살리드의 정탐꾼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주들은 제국군의 빠른 출병을 하소연했고, 자신들도 우살리드에 맞서 결연히 싸울 것을 다짐하는 분위기였다.
다빌라에서 영주들과 오간 얘기가 빠르게도 전해졌는지 영주들의 태도가 한결 적극적이기는 했다.
세틴은 병참 기지 건설과 지원에 대해서만 일반적인 얘기를 늘어놓았을 뿐, 구체적인 요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살리드 토벌은 모그란데의 북부군이 주도할 예정이었기에 주변 영주들은 북부군에 적지 않게 시달릴 터였다.
세틴이 미리 앞질러서 영주들을 자극할 이유는 없었다.
하라무스는 아직 병참 건설이 본격화하지 않아 당분간은 베른의 경비대가 주력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방어 기지로서는 다빌라보다 하라무스의 비중이 훨씬 컸다.
가도에 거대한 관문을 설치하고 가도를 중심으로 하랑가 고원 부근까지 목책을 설치하는 작업이 하라무스 기지의 주요 목표였다.
베른은 난다가 없는 곳에서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달라 보였다.
경비와 정찰 계획은 물론이고 기지 건설에 대해서도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었다.
하라무스에 도착한 세틴이 잘낫에게 물었다.
“우리 쪽 작업에 대해 우살리드의 대응은 어느 수준입니까 ?”
잘낫이 말했다.
“정탐꾼이 자주 출몰하기는 하나 작업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노골적으로 도발하지는 않습니다.
본대가 출병하기 전까지 저들의 움직임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습니다.
조만간 치고 받으면서 정비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보입니다.”
세틴이 말했다.
“하라무스가 사실상 우리의 중심 거점이 되어야 합니다.
더 전진해서 병참을 하나 더 건설 하더라도 그것은 토벌군이 출병하기 직전이나 출병 이후에 새워질 것이에요.
베른 경은 우살리드의 정탐을 완전히 봉쇄하느라 애쓸 것까지는 없습니다. 잘낫 경이 말한대로 우살리드가 찔러보기 식으로 도발해올 가능성에 대비하는데 주력하세요.
너무 깊숙이 들어가 우살리드를 자극할 필요도 없어요.
정비단은 임무는 어디까지나 가도 정비와 병참 기지 건설임을 명심하세요.
이곳을 잘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베른이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단장님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이것을 한 번 보시지요.”
베른이 석궁 하나를 세틴에게 내밀었다.
“어제 하랑가 고원 경계 지점에서 3 인으로 구성된 레인저들과 우리 경비대가 조우했습니다.
기병 하나와 말 두 마리가 크게 다쳤고 레인저들을 생포하거나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떨어뜨린 석궁 하나를 획득했을 뿐입니다.
사실상 첫 번째 교전이나 다름없는데 성과를 내지 못해 송구합니다.”
세틴이 석궁을 받아 유심히 살펴보며 말했다.
“피차 간에 미처 예상치 못한 조우였으니 성과를 운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쪽 피해가 생각보다 크네요.
일단 솜을 두둑히 넣은 갬비슨을 긴급 요청해서 지급받도록 하세요.
무엇보다 병사들의 인명이 소중합니다.
레인저를 발견하면 서둘러 교전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추적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가능하면 마상 궁술을 익히는 게 좋겠습니다.
‘기병은 돌격이다’는 고정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면 레인저들에게 크게 당할 수도 있어요.
석궁을 노획한 건 좋은데 장전 도구가 없는 건 조금 아쉽네요.
우살리드의 레인저 부대가 사용하는 장전법을 연구해보면 도움이 많이 될 텐데요.”
베른이 말했다.
“마상 궁술을 익히는 건 쉽지가 않습니다.
평생 말 위에서 사는 기사들도 숙달한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차라리 석궁을 쓰도록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장전술까지 익히기는 무리가 있겠지만 단발이라도 원거리 대응 능력이 전혀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세틴의 귀가 번쩍 뜨였다. 베른이 제안한 단발용 석궁은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였다.
“오, 그런 방법도 있겠군요.
재장전을 배제하면 석궁을 숙달하기에도 큰 어려움이 없겠어요.
일회용이라며 굳이 석궁의 형태를 고집할 필요도 없고, 복잡한 장치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해요.”
베른이 신이 나서 말이 빨라졌다.
“석궁만큼 살상력이 높지는 않지만, 단거리에서 견제용으로 쓸 수 있는 발사장치는 제가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팔꿈치에서 손끝까지 정도 길이의 대롱형이라 휴대도 간편하고, 재장전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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