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살리드의 운명
호아니는 모그란데 저택의 넓은 정원에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봄꽃을 감상하며 베그던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총독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저스틴 대장과 상카 경은 둘 다 소드 마스터입니다.
총독께서도 평생 전장을 누빈 장군이시니 소드 마스터 한 명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하는지 아시겠지요.
그리고 두 분 다 말이 많지 않고 과묵한 편이지만, 매우 세심하고 신중한 분들입니다.
제가 저스틴 대장은 직접 겪어본 적이 많지 않지만, 상카 경은 노스롭 토벌 과정에서 똑똑히 지켜봤는데, 전장의 흐름을 읽고 꼭 필요한 곳에는 항상 상카 경과 그의 동료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평생 용병으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일을 겪은 분이라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베그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세틴 사령관에게 가장 놀라는 점도 바로 그것이라오.
어린 나이에도 어찌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군소리 없이 그를 따르는지, 크게 잡음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는지 신기할 정도였소.
내가 보기에 이번에 대장으로 온 저스틴 경도 대단한 사람이었소.
세틴 사령관의 친형이라는데 거들먹거리거나 무언가를 과시하는 듯한 태도를 전혀 볼 수 없더군요.
어려서부터 검술 연마에만 매진했다더니 조용히 앉아만 있어도 존재감이 엄청나더군요.
그런 사람이 큰 실수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요.”
호아니가 말했다.
“우리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는 해야 하겠습니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번에 중앙에서 쥐어 짤대로 짜서 내려온 막대한 지원을 북부를 재건하는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령관님께서도 그 점을 고려해서 별동대에 대한 군수 지원 뿐만 아니라 북부 재건에 필요한 물자들을 최대한 지원하도록 저에게 특별히 당부까지 하셨습니다.
지금 동부에서도 제국 중앙군과 모그란데군이 결전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거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북부군이 와해되었다고 하니, 조만간 그쪽에서 많은 북부군 병사와 영주들이 복귀할 것입니다.
물자도 물자지만 지금 북부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인력이라고 들었습니다.
총독께서 미리 돌아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미리 충분한 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베그던이 반색을 했다.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오.
내가 사령관께 놀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새삼 그의 넓은 안목과 배려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랑가를 넘어오는 우살리드를 막을 대책을 세우는 것만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북부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그런 지침까지 주셨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생각해 보면 북부는 모그란데의 야심으로 인해 반역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북부의 백성들을 다른 제국의 백성들과 똑같이, 어쩌면 훨씬 자상하게 생각해주시는 것만 보더라도 세틴 사령관의 그릇은 이미 제국 전체를 아우르고 남음이 있다 하겠소.
지금 제국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그런 분 아니겠소 ?”
베그던의 말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했다.
어쩌면 호아니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세틴을 제국의 황제로 옹립하자는 바로 그 말이었다.
하지만 호아니가 세틴으로부터 그에 관해 분명히 전달받은 지침도 있고 해서 노골적으로 얘기를 진전시키지는 않았다.
호아니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령관님을 조금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할 것입니다.
우선 저부터도 옴비두스를 만나는 특사 일행으로 함께 할 때, 그분을 처음 뵙자마자 암울한 제국을 비추는 한 줄기 빛으로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사령관께서는 제국에 또 다른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황실과 조정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자 하실 뿐입니다.”
베그던이 호아니의 말뜻을 알아 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살리드군이 하랑가 고원의 서쪽 끝자락에 거의 도달했을 때에는 따가운 봄 햇살이 한 여름 못지 않게 덥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예상보다 며칠을 더 소모하여 11일 째에 마침내 하랑가의 사막 지형을 통과하여 멀리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모습이 보이자, 우살리드군 전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북동부에서 떠나올 때 준비한 물과 식량, 특히 물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물이 남아 있다 해도 가죽 주머니에 담아온 물에서는 썩은내가 진동을 했으니,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목을 축이면서도 잔뜩 인상을 찌뿌리곤 했다.
비록 인적이 완전히 끊긴 하랑가 고원이지만, 우살리드는 오는 내내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세운 일생일대의 작전이 성공하는 데에는 기밀이 최우선이었다.
그의 레인저부대가 아무리 막강하다 한들 북부에서 미리 알고 대비를 한다면 꽤나 힘든 접전을 치루어야 할 터였다.
우살리드는 일거에 북부를 들어쳐서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몰아치고, 그 여세를 몰아 황도까지 진격할 생각이었다.
모그란데로부터 하랑가과 북부의 지도 뿐 아니라 많은 정보들을 넘겨 받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원래 레인저 부대가 정찰과 기습을 특기로 하는 부대인 만큼, 오는 도정 내내 빈틈없는 정찰을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살리드군이 하랑가 고원을 통과하는 동안 사람은커녕 야생 동물 한 마리 마주친 적이 없었다.
원래 하랑가가 그토록 척박하고 황량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정찰이 갈수록 소홀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푸른 산맥을 눈앞에 두고 우살리드는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행군 중지를 명했다.
그 자신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녹음이 우거진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으나, 마지막에 정찰을 소홀히 하는 우를 범할 우살리드가 아니었다.
해가 저물려면 아직 해가 서너 뼘이나 남았지만, 야영을 명한 우살리드가 정찰 부대의 지휘관들을 모두 소집했다.
세틴과 정면 대결을 펼치기로 마음먹은 우살리드는 실로 비장한 각오였다.
샬롬의 강요에 가까운 우격다짐에 세틴과의 결전을 결심한 우살리드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감과 죄책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살리드가 보기에도 세틴은 암울한 제국의 현실에서 없어서는 안될 지도자였다.
우살리드는 살아오면서 세틴을 제외하고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대상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친 걸음이었고, 이미 주사위가 던져진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마음은 굳건했다.
모여있는 정찰 조장들을 향해 우살리드가 말했다.
“하랑가 고원을 무사히 통과했고, 아직까지는 우리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증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번 작전은 절반 이상 성공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지.
이제 우리 눈앞에 보이는 저 산맥이 마지막 관문이다.
저 산만 무사히 넘을 수 있다면 북부에 우리 군을 막을 만한 군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야 하는 작전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부터도 저 푸른 산으로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물샐 틈 없는 정찰을 통해 투너미 계곡 입구 주변과 그 안쪽 절반 이상까지 모든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나 진군을 계속할 생각이다.
아직 해가 조금 남았으니, 선발대 3 천이 급속 진군하여 투너미 계곡 입구에 전초 기지를 우선 마련할 것이야.
내가 직접 선발대를 이끌 것이니 정찰대가 모두 동행하여 전초기지에서 세부적인 지시에 따르도록 하라.
질문 있나 ?”
정찰 조장들의 얼굴에도 벌써부터 들뜬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만큼 열흘이 넘는 하랑가 고원에서의 여정이 힘들었고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우살리드는 투너미 계곡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냥 투너미 계곡이라 하지만, 입구에서 바라본 투너미 계곡은 수십 겹은 되어 보이는 첩첩산중이었다.
길이 나 있기는 했으나, 최근에 사람이 다닌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살리드는 계곡 안쪽으로 12 인으로 구성된 정찰대 셋을 파견하고, 투너미 계곡과 이웃하고 있는 양쪽의 계곡들로 각각 하나의 정찰대를 파견했다.
곧 어두워질 시간이었으나, 중간에 야영을 하고 다음날 오전까지 정찰을 마친 후에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우살리드가 생각하기에 이렇듯 인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계곡에 자신들을 막기 위해 대군이 도사리고 있을 것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왠지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우살리는 일생일대의 도박과도 같은 작전을 앞두고 너무 긴장해서 그렇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날이 어둑해져서 더 이상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없어질 때에야 우살리드는 물에 발을 담갔다.
사실 우살리드가 자신들을 대비하고 있는 적군이 없다고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모두 저스틴 별동부대의 세심한 배려 때문이었다.
실제 우살리드가 아무리 꼼꼼하게 정찰을 한다 해도 투너미 계곡의 삼분의 이 지점 즉, 란시오가 말한 폭포 주변을 기어오르기 전에는 사람이 지나간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것이었다.
이렇게 훗날 ‘투너미 계곡의 참사’라고 불린 학살극이 소리없이 준비되고 있었다.
모그란데와의 결전 전날 밤, 세틴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시오미와 몇 차례 잠자리를 같이 한 이후, 세틴은 시오미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때로는 가기 싫다는 시오미를 등떠밀어 황도로 보낸 일을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못 이루는 밤에는 시오미와 긴 통신을 하곤 했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질 거라는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아.
다만, 두려운 것은 나 자신이야.
나는 거침없이,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여.
늘 명분이야 있지.
내가 그렇게 초장에 적군의 기를 팍 꺾어 놔야, 결과적으로는 적과 아를 통틀어서 보다 적은 희생으로 싸움을 끝낼 수 있는 건 분명해.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 해도, 원래 나는 그런 일을 거침없이 해낼 만한 사람이 아니었어.
잔인한 살육을 벌일 때면 늘 재커드의 혼을 불러.
그래서 그것이 내가 한 일인지 재커드의 혼이 한 일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런 싸움을 벌인 날이면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어.
가슴이 너무 떨리고, 눈물이 폭포수처럼 흐르다가 때론 있는 힘을 다해서 고함을 지르고 싶어져.
나는 언제까지 이런 싸움을 해야만 하는 걸까 ?’
마법 통신기를 통해 시오미가 참으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통곡하듯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오미는 세틴의 물음에 답을 하지도 무슨 위로의 말을 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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