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롭의 운명
세틴이 호아니의 말을 이었다.
“노스롭이 건재한 상황에서 성급한 결정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군세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결정을 내린 이유는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서 전쟁의 냄새를 지우기 위함입니다.
백성들이 일상으로 돌아가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환경을 시급하게 조성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스롭 반도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태평의 기운을 불어넣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이 있을지 기탄없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보로킨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언권을 신청했다.
“장군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반도의 남서부에는 돌로만 고원이 있습니다. 북서부가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인 반면, 돌로만 고원은 반도 남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고원지대입니다. 비록 척박한 환경이지만 사람이 살 만한 지역이 제법 넓습니다.
돌로만 고원에 살고 있는 돌로만 부족은 역사상 한 번도 제국에 귀순한 적 없이 살아오면서 반도 남부에 대한 약탈을 일삼아 왔습니다.
워낙 사납고 호전적인 데다 고원의 지형을 이용해서 완강히 저항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토벌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이들의 무서운 점은 주술을 이용해서 몬스터를 부린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감히 돌로만을 토벌해달라고 청할 염치는 없습니다만, 성공만 한다면 반도의 백성들에게는 그보다 큰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게스트린이 말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식적인 명분은 없지만 세틴 장군은 이미 우리들의 주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돌로만 토벌은 자칫 장군의 앞날에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요.
돌로만은 부족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간혹 전부를 통일한 왕이 나오기도 한답니다. 심지어 우리는 지금 그들의 현 상황이 어떤지에 대한 정보도 매우 부족합니다.
돌로만에 사는 원주민들이 족히 수십만은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을 토벌하고 복속시키는 일은 성공한다고 해도 수 년이 걸릴지 수십 년이 걸릴지 몰라요.
장군께서 영명하시고 휘하의 장병들이 용맹하다 해도 단시간에 마무리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감히 권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보로킨은 게스트린에 대해 면박을 당한 셈인데다 평소에 라이벌 의식도 있어 보였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내가 되지도 않을 일을 권한다고 비꼬는 것이요 ? 게스트린 백작이야말로 세틴 장군과 군대를 너무 우습게 보는 듯하오. 내가 보기에 세틴 장군의 군대는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군대와는 차원이 달라요.
장수들의 능력이나 일반 병사들의 무장이나 엄정한 군기를 보나, 반도에서 출정한 토벌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요. 돌로만 부족이 사납다고 해도 세틴 장군 앞에서는 한 마리 짐승이나 다를 바 없을 거요.”
노스롭 직할령의 바로 남쪽에 작은 영지를 가진 트로운 남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노스롭 산성의 서쪽으로는 거친 산악지대 뿐이라 드문 드문 화전민들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노스롭이 돌로만 부족과 손을 잡게 되면 상황이 많이 달라집니다.
노스롭이 성에서 그동안 축적한 막대한 재산을 모조리 가져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돌로만 부족을 포섭하는데 성공하게 되면 노스롭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를 잡아들이기는 무척이나 어렵게 됩니다.
노스롭 산성과 돌로만 고원이 지척도 아니고 이동하려고 한다면 자연적인 장애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노스롭이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다면 반드시 돌로만 부족을 끌어들일 거라고 봅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제 영지는 돌로만 부족에게 가장 자주 피해를 당해 왔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들이 늘 무지막지하게 약탈만 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식량을 구걸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당한 보상을 지불하기도 합니다. 힘으로 제압하고자 하면 아마도 고원을 피로 물들인다 해도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약탈을 못하게 하는 타협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우선은 노스롭과의 연계를 차단하는데 중점을 두고 대처하심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세틴이 비로소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영주님들의 말씀을 모두 잘 들었습니다. 회의가 끝난 이후에도 노스롭과 돌로만에 대해서 많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트로운 남작의 말대로 나는 돌로만 고원을 피로 물들이는 일은 결코 벌이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제국의 백성은 아니라 하나, 이 땅과 하늘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같이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굳이 제국의 백성이 되라고 강요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당장 여기에서 결론을 내야 할 사안은 아닙니다. 영주님들의 조언을 참고해서 잘 대처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트로운이 말한 노스롭과 돌로만의 연계 가능성은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노스롭이 돌로만 고원으로 스며들게 되면 토벌이 한없이 미뤄질 수도 있었다.
세틴은 즉시 호아니와 고진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의 긴급 회의를 별도로 소집했다.
군사참모부는 돌로만 고원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정찰대는 노스롭 산성 주변에서 정찰 범위를 넓혀 돌로만 고원과의 연계 가능성에 대비했다.
거의 한 달에 걸쳐 추진한 군 축소 계획이 거의 마무리되고 병력이 3만 3천 정도 남았을 때, 세틴 군영에 뜻밖의 방문자들이 도착했다.
놀란이 5백여 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있었고, 세틴이 나바니아에서 만났던 푸시니아, 하쿰, 모우징이 각각 수십 명의 동족들과 함께 동행했다.
이들이 모두 세틴군에 가담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었다. 세틴은 갑자기 나타난 놀란 등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브라스트의 내란이 순조롭게 해결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놀란이 전한 소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란이 시작되기는 했으나 리스톤은 세 이종족의 연합군에 의해 간단히 격퇴되었고, 브라스틴은 나바니아와 놀란, 오스틴, 그리고 저스틴이 이끄는 브라스트 본대에 의해 참패를 당했다.
놀란이 결심을 굳히게 된 배경은 바로 그의 장인인 호르바트 백작이었다. 원래 제국 북부의 모그란데와 교역을 통해 많은 부를 쌓고 세력을 키운 호르바트는 모그란데의 충실한 하수인 노릇을 해왔다.
호르바트에게 많은 것들을 의존하고 있던 놀란 또한 호르바트의 입장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최근 들어 갈리온 후작이 남부의 영지에 내려와 주변 영주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자 호르바트는 선택을 해야 했는데 마침내 모그란데와 결별하고 갈리온에게 가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놀란이 브라스트에서 반란에 가담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셈이었다.
놀란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해도 성공하기 힘든 반란이었으니 놀란마저 반대로 돌아선 마당에 리스톤과 브라스틴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스스로 몰락을 재촉한 결과를 맞이했다.
브라스트에서 반란이 수습되고 나서 놀란과 세 이종족이 의기투합하여 세틴을 돕고자 찾아온 것이었다. 이들은 사우셔 항구를 출발해서 불과 나흘 만에 노스롭 부근에 도착했다. 육로를 통하면 족히 두 달이 걸릴 거리였다.
세틴은 호아니를 비롯한 측근들과 놀란 등이 참여하는 작은 연회를 열었다. 놀란 등의 위상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휘부 전체와 만나는 자리는 서로에게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노스롭과 브라스트에서 그간 벌어진 일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놀란이 말했다.
“노스롭의 반란은 이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드리고자 브라스틴을 제압하자마자 서둘러 넘어왔는데 너무나 아쉽습니다.”
세틴이 화답했다.
“이렇게 와주신 것만 해도 큰 힘이 됩니다. 우리 군은 유능한 장수들이 넘쳐나고 그간 모두 합심해준 덕분에 비할 바 없는 강군으로 거듭났습니다.
노스롭을 완전히 진압하기도 전에 십만에 가깝던 군세를 3만 남짓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남은 군대만으로도 누구와 싸워 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 군이 명실상부한 무적의 군대가 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내가 가장 중시하는 바는 병사의 정예화와 우월한 무장입니다.
병사들은 전투 경험이 쌓이고 훈련을 거듭할수록 정예화될 것입니다. 지금 남은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를 주었음에도 스스로 우리 군에 남는 결정을 해준 자들입니다.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력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기마부대의 방어력을 높이는 일이고, 둘은 원거리 공격무기의 개량입니다. 마지막은 마법 전력입니다.
현재 마법사들이 여럿 있지만 모두 비전 마법사로 아직까지는 통신 체계를 만드는 일에 진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놀란 백작께 부탁드리고 싶은 분야가 바로 마법 전력입니다. 당장은 위력적인 부대를 갖출 수 없더라도 개념 만이라도 정립하고 싶습니다. 푸시니아 님께는 원거리 무기의 개량을, 그리고 모우징 님께는 마갑의 개발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오크 대전사 하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나만 쏙 빼놓는 거요 ? 오크를 무시하는 거요 ?”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 오크가 인간들의 전쟁에 참여하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전사께는 조만간 엄청 중요한 부탁을 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직 분명치 않은 정황이 있어 당장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 조금 기다려 주시지요.”
사실 세틴은 돌로만 고원에 사는 사람들이 오크와 인간의 구별 없이 살고 있으며, 현재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족장도 하프 오크라는 정보가 있어 돌로만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쿰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오크들을 세틴군에 완전히 통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서로 융합시키기도 어렵고 명령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었다.
설사 하쿰과 오크들이 계속 같이 한다 하더라도 역할이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하쿰이 말했다.
“어디 두고 봅시다. 오크는 싸움터에서 몸을 사리지 않아요. 어떻게든 밥값은 하게 해주시오.”
호아니가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모그란데가 황실 마법 전단이라는 거창한 명목으로 마법군을 육성하고 있습니다. 그 실체를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황도에는 8서클 마법사까지 있음을 감안하면 향후 전쟁에 큰 변수로 떠오를 게 명약관화합니다.
노스롭을 평정하고 나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모그란데와 직면하게 됩니다. 그쪽도 당장은 우리와 전면전을 벌일 여력은 없어 보이지만, 우리의 선택에 따라 곧바로 전쟁에 돌입할 수도 있습니다.
장군께서 백작님께 마법 전력에 대해 말씀하신 배경이 그렇습니다. 어쨌든 대비를 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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