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으로
오스틴에서 그린테일 강을 따라 서쪽으로 직행하면 브라스틴에 이르고 그 중간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남하하면 놀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브라스틴이 그린테일 강 하류에 형성된 방대한 범람평야와 바다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놀란은 좋은 농토가 적고 바다도 해안 절벽이 끝없이 이어지는 궁벽한 지역이었다. 그런 가운데 사우셔는 해안 절벽으로 둘러싸인 만 안쪽에 자리잡은 천혜의 양항이었다. 천연 방파제로 둘러싸여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깊은 수심으로 대형 선박들이 접안하기도 좋기 때문이었다.
얼떨결에 오스틴 백작의 ‘가장 중차대한 임무’라는 특명을 받고 사절단을 따라 나선 가신 3인은 입이 세 발이나 튀어나와 있었다. 상당 기간 사절단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눈칫밥을 먹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서스텐도 없는 마당에 자신들이 빠지면 오스틴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며 서로 언성을 높여가며 푸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유만만한 사절단은 브라스틴과 놀란의 갈림길이 시작되는 부근에서 일찌감치 야영지를 차렸다. 아무래도 한 명이라도 오스틴으로 돌아가서 돌아가는 사정을 살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코리스가 대표로 도저히 백작이 걱정되어 안 되겠다며 다음날 돌아가보겠다고 말을 꺼냈다가 올란드 후작에게 호되게 꾸중만 들었다. 오스틴 백작에게 그들의 지휘권을 양도받은 이상, 임무 도중에 마음대로 이탈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서스텐이 복귀하여 구호 활동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스틴에서 놀란까지는 4 일이 걸리는 일정이었다. 바다에 인접한 놀란 영지도 대부분이 산지 지형인 것은 대공령과 큰 차이가 없었다. 분지가 협소한 반면 나지막한 구릉지가 많아 목축과 밭농사가 주된 생활기반이었다. 계속된 가뭄으로 밭농사는 거의 지을 수 없는 지경이었고, 소와 말, 양을 주축으로 영위하는 목축도 초지가 말라가는 바람에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놀란의 말이 체구가 크고 성질이 유순하여 비싸게 팔리고 있어서 근근히 버티고 있었다.
놀란의 젊은 영주 마빈 놀란 백작은 야심이 큰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아버지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백작위를 계승한 그가 제국 남부의 거대 항구도시 호르바트와 혼인동맹을 통해 모종의 밀약을 맺고 있다는 것이었다. 브라스트 대공은 휘하의 백작들이 독자적으로 제국의 다른 영주들과 야합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지만, 혼인문제까지 간섭할 수는 없는 데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바는 없는 상황이라 유심히 관망하는 중이었다.
흑룡기사들과 세틴의 식구들이 다시 한 번 칼춤 마당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후작이 수뇌부를 다시 소집했다.
“오스틴의 일이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무척 다행이오. 오스틴 백작이 후덕하다 하나 이제 늙고 강단이 없어 아랫 사람들에게 휘둘릴 것이 무엇보다 염려스러웠소. 첫날부터 서스텐이 날뛰는 걸 보고 눈앞이 캄캄했는데 이만하면 잘 마무리 된 것 같소. 무엇보다 13 공자께서 많이 애쓰셨소.”
발탄 남작은 수긍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서스텐이라는 자의 상식밖 언행도 너무 뜻밖이고, 백작이 곧바로 그를 경질한 것도 납득이 잘 안됩니다. 자식이 없는 백작에게 사위인 그가 유일한 계승 후보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이상합니다. 정사이신 후작님의 방침에 따르기는 하겠으나, 오스튼에 구호 식량을 2할이나 증액해주신 것도 저는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세틴과 후작 단 둘이었다. 그러니 발탄이 그러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고 오스틴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두 까발릴 수는 없었다. 백작과 서스텐의 향후 입지나 체면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후작이 말했다.
“결과적으로 오스틴에서 우리 방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따른 것은 사실이오. 각 영지마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정이 있을 것이오. 우리가 일일이 그것을 파고 들 수는 없소. 6 백작이 대공의 휘하라고는 하나, 폭넓은 자치권을 가진 소왕국이나 마찬가지요. 무엇보다 다행한 일은 오스틴 백작이 구호 활동에서 돌아가는 마차에서 대공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했다는 점이오. 그런 면에서 오스틴 백작은 믿을 만한 사람이오.”
세틴이 말을 덧붙였다.
“대공과 사절단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 그만한 보상을 제공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 중요하오. 오스틴은 우리 사절단의 첫 단추이고, 서스텐이 날뛴 것도 초장에 사절단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백작들의 입김이 작용한 것임은 누가 봐도 분명하오. 오스틴은 사절단에 적극 협조하고 사절단은 2할 증액이라는 보상을 준 모양새를 다른 백작들이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오. 누가 당근을 마다하고 채찍을 맞겠다고 나서는지 한 번 지켜 봅시다.”
세틴과 후작의 말로 오스틴에서의 활동 성과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셈이었다. 다른 세 사람은 마음 속의 의구심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수긍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일단 결과가 좋으니 꼬투리를 잡기는 어려웠다.
셔틀리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13 공자께서 새로운 하녀를 들였는데 밤마다 깨가 쏟아진다는 식의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스물 네 시간을 함께 지내는 사절단에서 그리 좋은 일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대공가의 공자가 내키는대로 여인들을 희롱하고 다니는 거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오. 나는 차라리 그런 식으로 말이 도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오.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까지 시녀든 하녀든 손목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는 숙맥이라오. 여기 있는 분들말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인데, 사실 시오미는 새날의 빛과도 연관이 있고, 티리아와도 깊은 관계인 마법사요. 그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사정이야 일일이 밝히기는 어렵소. 다만, 새날의 빛의 실체를 파악하고 티리아의 행보를 제어하기 위해서 그녀를 곁에 두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되겠소. 부탁하건데 당분간은 다들 모르는 척 해 주길 바라오. 대공께는 이미 관련 내용을 보고했소. 후작께서도 따로 보고를 하셨을 것으로 아오.”
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특히 마법사라는 존재가 민감한 것은 사실이고, 자칫 13 공자의 신변에 무슨 사고라도 날까 크게 우려했던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분도 익히 보셨다시피 13 공자께서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매일 한 번 나와 공자의 보고를 전하는 파발이 프라움으로 출발하고 대공의 지시와 비답을 전하는 파발이 오는 것을 아실 것이오. 오가는 시간이 있어 아직 그 문제에 대한 대공 전하의 비답이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13 공자의 행사를 대공께서도 나무라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하오. 여러분은 그저 ‘13 공자가 노리갯감 하나 들였다 보다’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처신해 주길 바라오.”
셔틀리 등은 이제 15 세인 13 공자가 마법사를 곁에 둔다는 대담한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공가의 귀염둥이 막내이자 ‘호호공자’의 진면목이 이런 것이었나 싶었다. 슈타인 남작이 화제를 돌렸다.
“놀란 백작은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놀란 영지가 식량 생산이 거의 끊기다시피 하고, 역병까지 돌고 있어서 상황이 제일 심각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말을 대량으로 팔아서 거액을 챙기고 식량도 꾸준히 들여오고 있습니다. 그는 놀란의 사정을 속속들이 까발리기보다는 차라리 지원을 덜 받는 쪽을 선택할 사람입니다. 미리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발탄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구호 물자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데도 놀란 백작의 힘이 컸습니다. 그의 처가인 호르바트가 제국의 최대 항구입니다. 놀란과 호르바트가 구호 물자 수입에서 한몫 단단히 챙겼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구호 물자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후작의 평은 조금 달랐다.
“마빈 놀란이 어디로 튈지 모를 사람인 건 맞네. 하지만 대공께 밉보일 짓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 그가 제국으로 진출하고자 한다면 대공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하거든. 어쨌든 놀란이라는 영지에 만족하고 머물 생각이 없다는 것 하나는 분명해요. 어디 한 번 지켜 봅시다.”
놀란으로 향하는 3 일간의 일정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구불구불한 협곡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사방에 보이는 둥글둥글한 구릉지에는 메마른 풀만 듬성듬성 나 있어 사막과 다름 없었다. 그나마 간혹 나타나는 인가나 영주성 부근에나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있고 초지도 보여서 생기가 도는 편이었다.
의외로 역병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중간에 만난 작은 영지의 주인 말로는 놀란의 역병은 브라스틴과 왕래가 많아서 약간 전파된 정도로, 놀란 백작이 조금이라도 증상이 보이는 사람은 철저히 분리시키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라 했다.
놀란 백작보다 먼저 사절단 일행을 맞이한 것은 오스틴과 놀란을 제외한 4 백작령의 총관이라는 자들이었다. 일찍이 사우셔에 모여서 사절단을 기다리다 놀란 도착을 하루 앞두고 펼친 야영지로 찾아온 것이었다. 올란드 후작과 슈타인 남작이 그들을 맞이했다.
“브라스틴 총관, 알톤 핀들이라 합니다.”
“나바니아 총관, 거스트 팔콧이라 합니다.”
“리스톤 총관, 라엘 리스톤이라 합니다.”
“거윈 총관, 샘 브로키라 합니다.”
“율리 올란드요. 그대들이 여기까지 찾아 올 줄은 생각도 못했소. 사절단의 일정은 이미 다 통보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순차적으로 방문하면 만나게 될 것을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이리 발걸음을 한 것이오 ?”
알톤 핀들이 나섰다.
“후작 각하, 아시다시피 백작령들의 사정이 매우 다급합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눈이 빠져라 구호 식량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사절단의 사정도 있겠지만, 한시가 급한 저희들의 사정을 좀 헤아려 주십사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동생과는 달리 그래도 말이 좀 통할 사람 같구려. 내가 무엇을 해주면 좋겠소 ?”
“루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는 저의 사촌 형님입니다. 제가 좀 겉늙어 보이는 편이라...... 사절단이 일일이 영지들을 방문하고 난 이후에 수량을 결정하고, 그 뒤에 물자 수송이 이루어지면 너무 늦습니다. 차라리 여기서 각 백작령에 배분할 물자를 일괄 타결하고 곧바로 수송에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게 저희 요청사항입니다. 이후에 사절단이 순차적으로 방문을 해서 확인작업 하셔도 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율리는 예상이라도 한 듯 바로 답변을 내놓았다.
“핀들 가의 형제에 대해 얼핏 들은 걸로 실례를 한 것 같소. 나도 누구 못지 않은 겉늙은이라 그대의 고충을 알 것도 같소. 요청에 대한 대답은 ‘불가’요. 급한 사정에 대한 배려는 이미 하고 있소. 오스틴에서도 우선적으로 1000 부르를 전달했고, 다른 영지들도 사우셔에 식량이 도착하는대로 일정 수량을 일률 배분할 것이오. 대공과 백작들이 적국도 아니고, 명분상 상하가 분명하고, 기왕 지원을 하면서 공정하게 하자는 것이고, 그러자면 근거가 명백해야 하는 법인데, 왜 영지의 상황을 감추지 못해 안달을 하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소.”
나바니아의 거스트 팔콧이 말했다.
“후작 각하, 우리가 영지의 사정을 감추려 한다는 것은 오해십니다. 워낙 낙후된 지역이라 자료도 누락되거나 부실한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희도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사절단이 힘들게 백작령을 순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친선 우호를 증진하고 대공에 대한 충성도를 제고하고자 함입니다. 구구절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백작님들의 체면도 고려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브라스틴과 나바니아의 총관들이 출중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었소. 알톤 핀들과 거스트 팔콧. 내 그대들의 이름을 꼭 기억하리다. 하지만 대공 전하의 방침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오. 내가 비록 계승 후작이라고는 하나 공국의 대신 자리까지 물려받은 것은 아니오. 대신에 오르기까지 검토한 문서와 자료가 그대들의 족히 열 배는 될 것이오. 부실하고 누락된 것을 그것대로 판단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 ‘백작들의 체면’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충분히 짐작하고 남지. 속살이 드러나는 것도 체면이 상하는 일이고, 남과 비교되는 것도 체면이 상하지. 하지만 자료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소 ? 대공께서 정한 방침에 딴지를 걸고 일정을 지연시키는 것이 체면 상하는 일인지, 감춘다고 감출 수 없는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체면 상하는 일인지 생각해 보시오. 내가 그런 일을 떠벌이고 다닐 사람 같으면 브라스트 공국의 외무 대신이라는 자리가 가당키나 할까 ?”
4 백작령의 총관들이 본전도 못찾고 돌아갔다. 올란드 후작을 만난 그들은 그릇과 역량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초장에 사절단의 기를 꺾어 얌전히 구호 물자나 전달하고 생색이나 내다가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이 얼마나 속절없는 바람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다만 자기의 백작에게 그것을 납득시키기가 얼마나 힘이 들지 걱정이 앞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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