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세틴은 옴비두스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이겨냈다. 자꾸 시오미를 들먹이는 것이 시오미에 대한 세틴의 마음을 어떻게든 이용해보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하지만 늙은 것이 염치도 없이 어린 제자를 추행하려 한 주제에 시오미가 미인계를 쓴 것으로 호도하려는 모습에는 절로 욕지기가 일었다.
“제가 시오미에게 가진 마음이 작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마법사께서 당장 시오미를 저에게 데려다 준다 해도 그것을 대가로 무언가를 해드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칙명에는 새날의 빛과 옴비두스의 불만과 요구를 무엇인지 충분히 들어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구절절 뻔한 이야기야 필요 없을 거고, 단도직입적으로 그쪽에서 조성하고 픈 유리한 국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내어줄 수 있는지 복안을 말씀해 보시지요.”
옴비두스도 이만 하면 세틴을 흔들어 놓겠다는 애초의 의도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보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의 제국의 정세는 누가 먼저 칼을 뽑아 황도로 진격할 것인지 눈치를 보고 있는 일촉즉발의 형국이지. 새날의 빛을 토벌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하나도 없는 주된 이유야. 황도로 진격해서 대권을 잡아보겠다고 나서기에는 아직 명분이 부족하니, 새날의 빛을 희생양 삼아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는 의도를 가진 세력들도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와 단독으로 맞서서 이길 자신이 있는 세력은 없을 거야. 내 뒤에는 에반 왕국까지 있고, 무엇보다 섣불리 나섰다간 다른 세력들에게 집중 견제를 받게 되겠지. 그래서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거야. 내 의도는 하나네. 누가 먼저일지는 모르지만 황도로 진격할 명분을 만들어 주는 거야. 어떻게 ? 내 복안은 많지만 그건 차츰 의논해보도록 하세.”
세틴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제국을 극단적인 혼란으로 몰고 갈 계획에 동참하리라 생각하시오 ?”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니까. 나나 그대가 아니라도 언제든지 터지게 되어있다고. 자, 우선 자네가 내게 협조하는 대가로 내가 내줄 것부터 들어보게. 우리가 제국에 투항할 수는 없어. 목숨조차 보장받기 어려울 것을 뻔히 아는데 어떻게 투항을 하겠나. 대신 새날의 빛은 완전히 해산하고 투앙 백작령도 원상 복구시키겠네. 나나 몇몇 수하들에 대해 역모의 죄를 묻겠다는 것도 감수하겠네. 공식적으로는 마법사 사면령 하나면 충분하네.”
일단 옴비두스의 제안은 그 자체로 꽤나 구미가 당길 만했다. 역모의 죄를 사면해주지도 않고 마법사 사면령 만으로 새날의 빛의 완전 해산과 원상 복구라면 명분이 충분히 설 수 있었다. 다만, 옴비두스가 이런 제안을 하는 이면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세틴이 보기에 옴비두스는 쉽사리 새날의 빛을 포기하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는 걸 받아들일 자가 아니었다.
“새날의 빛이 완전히 해산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 그리고 투앙은 애초에 당신의 제자라서 원상 복구도 의미가 없겠지요.”
“그게 중요한가 ? 어차피 실제적인 타협으로 우리가 뭔가를 도출해낼 가능성은 없어. 중요한 것은 명분과 모양새일 뿐.”
“마법사들에게 큰 원한을 가진 모종의 세력이 준비되어 있겠군요. 마법사들을 명분 없이 사면해준 것도 모자라 반역을 꾀한 새날의 빛을 유야무야 봐주고 넘어가는 조정을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며 황도로 진격할 세력이요.”
“오, 대단하네. 그것까지 유추해낼 줄은 몰랐어. 아, 물론 내가 그들과 야합한 것은 아니네. 애초에 나와는 물과 불같은 관계이니.”
“하나 더 추론해볼까요 ? 아마도 그들이 먼저 불을 당겨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세력, 혹은 세력들이 있겠군요. 마법사께서는 그들과 모종의 연계를 갖고 있겠구요. 뭐, 다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그런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 전권대사로서 대임을 훌륭하게 완수했다는 명성을 위해서 ? 또는 어쩌면 시오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위해서 ?”
옴비두스의 눈이 번득거렸다.
“오늘 한 번의 만남으로 쉽게 합의점을 찾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네. 일단 내가 생각하는 가장 현실적인 안은 모두 다 말한 셈이네. 솔직히 나는 아쉬울 게 없네. 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도 손해볼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이지. 잘 생각해 보고 받아들일지 말지는 신중하게 판단하도록 해. 일단 같이 온 조정의 관료들에게는 사면령만 내려주면 이쪽에서 대부분 양보할 것으로 얘기해도 되네. 그들하고 논의를 해보고 다시 만나도록 하세. 내가 의도까지 다 밝혀가면서 복안을 얘기한 뜻을 잘 따져 보게.”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세틴의 고심이 깊어졌다. 사실 새날의 빛을 해산하겠다는 것만 해도 파격적이고 그리 기대했던 사항이 아니었다. 브라스트와의 동맹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얘기도, 시오미와 관련된 얘기도, 그리고 옴비두스의 의도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시오미를 통해서 들었던 이야기와 골트릿의 얘기에서 옴비두스에 대한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었으나, 당장 만나서 나눈 대화의 내용이나 태도만 보더라도 옴비두스는 결코 믿을 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옴비두스의 말들을 통해 세 황자들이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골트릿의 진단이 분명한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이미 제국의 정세는 황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옴비두스의 말이 일정 부분 사실이라면 황자들은 자신들의 몰락을 재촉할 일을 꾸미는데 스스로 앞장서서 세틴을 몰아부친 셈이었으니 한심하다 못해 불쌍할 지경이었다.
세틴은 일단 관료들에게 공론을 붙여 반응을 보고 나서 판단을 하기로 했다. 단독회담의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옴비두스가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소. 요약하자면 마법사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령만 내려주면 새날의 빛을 완전히 해산하고 더 이상 제국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며, 투앙 백작령도 원상 복구하겠다는 것이오.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일단 확답은 주지 않았소. 이에 대해 네 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소.”
오브린 타스가 곧바로 반응했다.
“일단 큰 윤곽으로는 그 정도면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어 보이오. 대전회의에서도 반대가 없지는 않더라도 사면령은 대체로 용인하는 것이 대세였다고 해도 무리가 없지요. 다만, 새날의 빛이 해산한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소. 보나 마나 무슨 꿍꿍이가 있을 터인데 속셈이 뭐냐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르틴 후작이 말했다.
“일방적으로 해산한다는 말만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요. 투항하고 귀순하는 절차를 밟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오. 그렇다고 새날의 빛 수뇌부 전체가 규정대로 귀순하라고 한들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소. 이 부분에 대해 적당한 보완이 필요할 것이오.”
호아니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후작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공공연하게 해산을 선포하고 적대를 멈추겠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작지는 않습니다. 새날의 빛의 이름으로 활동하기는 어려워질 것이고, 옴비두스를 비롯해서 그 수뇌부들은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옴비두스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이 이상하군요. 혹시 전권대사께서 우리가 모르는 능력이라도 발휘하신 겁니까 ?”
세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나는 거의 일방적으로 옴비두스의 이야기를 듣고 왔을 뿐이요. 그에게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번 일을 주도하신 3 황자나 4 황자께서 미리 옴비두스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도록 손을 쓰신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세틴이 말을 하며 타스 자작과 마르틴 후작을 의도적으로 바라봤다. 둘이 각각 3 황자와 4 황자의 사람임을 알고 있으니 뭔가 있으면 꺼내보라는 의미였다.
오브린이 적극 부인하고 나섰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소. 3 황자께서는 그저 전권대사와 옴비두스가 어떤 식으로든 합의를 낼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라는 지시를 하셨을 뿐이오.”
“나도 최대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진력하라는 당부 외에 아무 것도 들은 게 없습니다. 4 황자와 갈리온 후작께서는 워낙 황도에서만 활동하신지라 지역이나 마법사들과는 거의 연결고리가 없으시오. 내가 모르는 어떤 시도가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오.”
참모장 숄츠 백작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다른 것은 잘 모르겠소. 단, 한 가지만 분명히 하겠소. 그저 말로만 해산하고 원상 복구를 하겠다는 말은 믿을 수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투항하고 귀순하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움비두스의 말에 놀아나서 실질적인 내용도 없이 쓸데없는 공을 탐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세틴이 말했다.
“일단 옴비두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자는 데에는 모두 동의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 실무 회담을 통해서 필요한 보완을 한다는 전제로 말입니다.”
세틴이 모두를 둘러보자 아무도 반대의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그럼 네 분이 실무회담을 통해 보완할 내용에 대해 의논해 보세요. 저는 따로 생각을 좀 정리해 보겠습니다. 의논이 되는 대로 다시 모여서 다음 일정을 결정하도록 합시다.”
세틴은 옴비두스가 모그란데 공작과 긴밀하게 협조하거나, 그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 있다고 보았다. 황제의 특명 전권대사를 파견한다는 이벤트를 통해 그들이 노리는 바는 마법사들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갖고 있고, 황도로 진격하여 군사적으로 조정을 장악할 능력과 야망이 있으며,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는 세력이 선제적으로 움직일 명분과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옴비두스가 그런 계획을 세틴에게 귀띔한 것은 차후에도 브라스트와는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보여주고, 파격적인 제안의 이면을 의심하여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우려를 없애기 위함으로 보였다.
모그란데가 그림자의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모그란데는 실로 무서운 자였다. 지금까지 세틴이 경험하거나 들었던 내용만 갖고 보더라도 제국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세틴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가 가진 세력도 없고 오로지 브라스트라는 배경 뿐이었고, 제국 전반의 정세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적어서 능동적인 대처는 애초에 어려웠다. 옴비두스의 제안을 받을지 말지 결정을 해야 했다.
그의 추정이 맞다면 결국 모그란데의 황도 입성과 정국 장악에 협조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이었다. 멀린을 칙명으로 승상에 임명한다고 했던 이벤트도 모그란데 자신이 승상이 되기 위한 포석일 가능성이 높았다. 느닷없이 자신이 승상이 되겠다고 하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나, 이미 브라스트에도 제안했던 승상직을 왜 모그란데가 못하냐는 식의 반론이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일 수 있었다.
다른 대안도 없이 옴비두스의 제안을 무조건 거부할 수는 없었다. 저들이 이미 완벽하게 짜놓은 판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자괴감도 없지 않았다. 골트릿이 우려하던 바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이 되고 마는 그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틴이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모그란데와 옴비두스가 짜놓은 판을 따라가면서 최대한 변수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을 때, 관료들의 어느 정도 논의가 끝났다는 통보를 해왔다.
세틴이 그들과 다시 마주 앉자, 오브린 타스가 논의 결과를 알려왔다. 그들도 결국 옴비두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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