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물살
“우선 나를 믿고 어려운 길을 오늘까지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열 여섯이면 소년이라기보다 청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아직도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굳건한 믿음과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보다 빠르고 굳건하게 커나가는 세틴군에 대한 자부심이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고 있습니다.
나를 언제까지나 따르며 충성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세틴군의 마스코트 정도로 생각해 주셔도 좋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할 자신은 없습니다. 나의 소망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제국의 백성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편안하고 걱정없는 삶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같이 꿈꾸실 분이라면 나는 출신도, 전력도, 신분도 가리지 않고 모든 믿음을 드릴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함께 달려가 봅시다.”
세틴과 함께 잔을 들어올려 건배를 하는 분위기는 자못 숙연했다.
밤늦도록 이어진 생일 잔치가 끝나고 브라스트가의 사람들 만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유일하게 추가된 사람은 호아니 뿐이었다. 율리와 함께 온 토마스와 상카, 그리고 바네사가 오붓한 자리에 참여하고 있었다.
호아니가 맨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제가 끼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너는 호아니 맨든이라 합니다. 세틴군에서는 군사참모 역을 맡고 있습니다. 세틴 장군께서 이 자리에 저를 부르신 것은 이제는 한 식구로 여긴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무척이나 영광스럽고 다행입니다.”
세틴이 호아니를 소개했다.
“다들 잘 모르시겠지만 맨든 남작은 제국 제일의 천재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황도에서는 물론 옴비두스에 대한 전권대사 일과 이번 도강작전, 바늘 요새 전투까지 절반 이상이 그의 공입니다.
더구나 호아니는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세틴군을 위해서 제국 내무부의 인사담당 참사관이라는 요직을 내던지고 따라나섰습니다. 이제는 그 없이는 한 발자욱도 내딛기 힘들 만큼 의지하고 있지요.”
세틴의 말에 율리를 비롯한 모든 브라스트 사람들이 호아니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정중한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호아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같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브라스트 사람들이 얼마나 진정으로 세틴을 위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대목이었다.
세틴이 본론을 꺼냈다.
“지금 브라스트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
율리가 대답했다.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께서는 건강하십니다. 6백작령을 비롯해서 공국 전체에 대풍년이 들어 3 년의 기근이 말끔히 해소되었고, 역병도 가라앉았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 모든 게 세틴 소가주의 덕이라며 칭송이 자자하고, 제가 듣기에도 조금 민망할 정도까지 소가주를 신격화하는 설화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군제 개혁은 지지부진 했으나, 최근 들어 전란이 발생하고 정세가 급박하게 흐르면서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외인 부대와 정보 부대는 당사자들이 직접 말씀드리도록 하시오.”
토마스가 말이 고팠는지 먼저 나섰다.
“정보부는 대공 직할의 독립부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국 전역으로 확대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나 대공령과 6백작령에는 물샐 틈 없는 정보망을 구축했다고 자부합니다.
최근 들어 브라스틴과 리스톤, 놀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조만간 그들이 공국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세틴이 재차 확인을 요구했다.
“브라스틴이야 그렇다고 쳐도 놀란까지 ?”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확실합니다. 최근 브라스틴과 놀란 사이에 연락이 빈번하고 놀란에는 사우셔 항을 통해 수상한 자들이 꾸준히 유입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브라스틴보다 놀란이 주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틴이 조금은 놀랍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
“대공께서는 선제적으로 출병하실 생각은 없으십니다. 첩보 만으로 출병을 한다면 공국의 백성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의구심만 커지게 한다고 보십니다.
그들이 반역을 꾀한다 하더라도 하늘요새를 넘지 못하게 하면 대공령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하늘 요새의 경계를 강화하고 오스틴과 긴밀하게 조응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오스틴 백작과 서스텐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한편 나바니아가 그들에게 가담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리스톤은 나바니아에 비길 바가 못되고, 브라스틴과 놀란이 연합한다 해도 나바니아가 그린테일 강을 사수한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틴은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놀란이 기어코......”
호아니가 말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제국의 영주는 크나 작으나 자기 영지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무제한의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인성이나 능력을 떠나서 언제든지 하극상을 통해 제약을 풀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 전란이 시작되었으니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는 자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가 노스롭을 공략할 때도 이 점을 감안해야 하고 때로는 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쟁쟁한 브라스트도 4 대를 이어온 주종관계에도 불구하고 백작들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노스롭이 주변 영주들을 그리 쉽게 굴복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세틴이 상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외인부대는 아직까지 정식으로 발족하지 못했습니다. 상비군의 성격으로 창설할 수도 없고 그것을 뒷받침할 재정도 충분치 않습니다.
하지만 브라스트 3 대 검가의 가주들이 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신 외인부대 창설에 동의하셨고, 브라스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용병단 또한 참여를 확약했습니다.
만약을 위한 연락망과 동원체계가 마련되었고, 최근에는 일부 인원들이 참가하는 전술 훈련도 몇 차례 실시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온 이유는 일단 상카 용병단 만이라도 세틴군에 합류하고자 함입니다. 전부는 아니고 최정예 40 인 정도를 데려올 생각입니다.”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바네사 때문에 오려는 건 아니고 ? 하하, 농담일세. 그보다 나는 여기보다 브라스트가 더 걱정이야. 놀란 그자는 나마저도 속여넘겼어. 막상 일을 벌이면 대충하지는 않을 거야.”
호아니가 말했다.
“토마스 경의 말을 들어보니 자세히는 몰라도 충분히 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는데도 성공하는 반역은 거의 없습니다.
그 부분은 대공 전하를 믿으시지요. 장군께서 걱정하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수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브라스트에서 세틴군에 힘을 실어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저는 상카 경의 합류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용병단 꼬리표를 떼고 세틴군 친위대에 정식으로 편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토마스에게 말했다.
“예전에 순행에 나섰을 때, 티리아와 마주쳤던 장소들을 기억하는가 ? 그린호와 12폭포 가도 중간. 그 두 곳을 중심으로 그린호와 12 폭포 가도 주변에서 우회로로 쓸 수 있는 곳들을 샅샅이 파악해 두어야 할 것이야.
그린호와 12 폭포 가도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않고서는 충분한 대비를 했다고 할 수 없을 걸세.”
토마스가 대답했다.
“넵, 잘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제국에서 브라스트의 위명은 세틴이 상상하던 이상으로 매우 높았다. 최근 수 백년 동안 폴른 왕국을 격파한 사울 브라스트만큼 큰 전과를 거둔 예가 없었고, 멀린과 조스핀의 결혼 이후에는 황실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가문으로 브라스트 가문이 제국인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비록 적은 숫자라고는 하나 브라스트군이 세틴군에 합류한다는 상징적 의미 외에도 이미 마스터급의 무위를 가진 상카가 세틴의 친위군이 된다는 것도 세틴의 위상을 높일 뿐아니라 안정감을 더해 주었다.
마스터급 무인의 가치는 실질적으로도 매우 컸다. 바늘 요새 점령 작전도 세틴과 고진이라는 두 마스터가 있었기에 큰 희생 없이 손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세틴이 에메랄드호변 영지들로 순행에 나섰을 때, 5 대 영주들이 예외없이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하게 된 것도 세틴의 배후에 브라스트가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황명에 따른 토벌군이라는 명분과 세틴의 역량과 세틴군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믿음, 브라스트와의 연계라는 사실이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에메랄드 5 대 영주들의 도움으로 6 만이라는 군세를 거느리게 된 세틴이 바늘 요새로 복귀하는 길에서 황도로부터 급변 사태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모그란데가 10만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황도를 장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도가 발칵 뒤집혔다. 모그란데는 3 황자를 비롯한 세 황자가 그동안 황제가 통치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황명을 조작해왔으며, 최근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황제를 시해하고 3 황자가 황제에 등극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세 황자들을 체포했다.
오디어스가 모그란데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이었다. 모그란데는 1황자를 협박해서 스스로 섭정왕의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모그란데는 황자들을 한 명도 죽이지는 않았다. 3, 4, 5 황자는 자택에 연금되었을 뿐이고, 그 가족들에게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4 황자의 배후로 알려진 갈리온 후작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5 황자의 배후로 알려진 돈프로스트 제국군 사령관은 사령관의 직위를 해제했을 뿐이었다.
모그란데는 전국의 영주들에게 황도에 직접 올라와 황제를 배알하라는 소집령을 발동했다. 모든 영주들을 황도로 불러들이는 소집령은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에나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 그것도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고 해서 무조건 발동되는 것도 아니었다.
모그란데가 소집령을 발동한 의도는 분명했다. 전국의 영주들에게 자신에게 굴복할 것인지 반항할 것인지 선택을 하라는 협박이었다.
기한은 백 일이 주어졌다. 백 일 안에 상경하여 굴복하지 않는 영주는 모두 제국의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바늘 요새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이 소식을 접한 세틴은 호아니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쳐오니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군요. 다른 것은 몰라도 영주들에게 소집령을 발동한 것은 의외네요. 지나친 무리수 아닌가요 ?”
호아니가 말했다.
“모그란데는 전국적으로 전란을 부추길 생각입니다. 그 여우가 소집령에 순순히 응할 영주들이 많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모그란데에게 굽힐 생각이 없고 야심을 가진 자라면 서둘러 세력을 넓히고자 할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어차피 모그란데에게 먹힐 수밖에 없으니까요.”
세틴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그란데에게 반대하는 영주들이 전국적으로 연합해서 그에게 저항할 가능성은요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