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무대
황자들을 모두 방문한 세틴은 큰 자신감을 얻었다.
4, 5 황자는 황도에서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고, 대부분의 조정 관료를 배출하는 황도의 유서 깊은 귀족들에게는 골트릿이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었으며, 현실적으로는 설리반 후작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다.
사실 세틴이 군사적으로 모그란데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면 모그란데가 옴치고 뛸 여지가 많지 않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골트릿은 말할 것도 없고 황실과 조정을 제대로 세운다는 명분에서 설리반 후작도 모그란데보다 세틴에게 기운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6 황자를 방문하고 나온 세틴은 동행했던 오클린, 토마스, 울브린과 함께 브라스트 가문의 사가로 향했다.
세틴이 사령관 관저에 자리를 잡으면서 브라스트 사가에는 저스틴과 프라움에서 합류한 무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저스틴은 연무장에서 무인들의 검술을 봐주고 있었다.
세틴을 발견한 저스틴과 무인들이 일제히 도열하여 인사를 올렸다.
전체 인원이 백 명을 조금 넘어 보였다.
“아직 날이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도 한바탕 어울려보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 제가 제일 힘들어 하는 일을 마치고 온지라 기진맥진입니다.
다음 기회에 칼을 맞대 보지요.
브라스트가 자랑하는 3 대 검가를 대표하는 분들이 이렇게 함께 해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푸른색 경장에 검은 팔토시와 각반을 착용한 장년의 검객이 일행을 대표해서 말했다.
“브라스트의 소가주님을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저희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저희에게 특수한 임무가 주어질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가문과 브라스트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내겠다는 각오는 충분합니다.
믿고 맡겨만 주십시오.”
세틴이 두 팔을 들고 고개를 숙이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
“말씀만 들어도 듬직합니다.
오늘은 제가 형님과 긴히 나눌 얘기가 있어서 왔으니 이만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했다.
모인 다섯 사람이 모두 브라스트 가문이었다.
세틴의 친위대장인 오클린은 비록 브라스트 성을 쓰지는 않지만, 혈육 못지 않게 세틴에게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모두 세틴이 의도적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우리 사람들만 따로 모인 이유가 있어요.
제국군 내에서 공과 사를 분명히 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밀을 요하는 문제를 처리할 대책이 필요합니다.
황도 내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술수나 모사보다 공개적이고 당당하게 매사를 해결해나갈 생각이에요.
황자님들을 모두 만나본 결과 도움을 받을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호아니 군사와 의논해서 대처해나가도 충분할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부족한 부분이 우살리드와 남부에 대한 정보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전쟁 상황이 아닌 남부는 토마스 경이 맡아주시고, 북동부는 저스틴 형이 무인들을 이끌고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느 쪽이든 상단이나 용병으로 위장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두 분이 오골보르 상단을 방문하셔서 상단주에게 협조를 구하세요.
그에게 우리의 목적을 알리는 건 괜찮습니다.
목적을 알아야 적절한 협력이 가능할 테니까요.
실제로 상단이나 용병단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만 해도 일이 적지 않을 테니 오골보르에게 적절한 협조를 받는 편이 최상입니다.”
저스틴이 물었다.
“우살리드라면 군사정보가 최우선인가 ?”
세틴이 말했다.
“물론 전체적인 군세나 레인저부대, 설인족, 설산표범 등에 대한 정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민심의 흐름과 북동부 귀족들의 동향입니다.
제국 중앙군은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을 겁니다.
반 년 가량 여유가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 실제로 장사꾼이나 용병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생각하고 준비해주세요.
무인들이 정보 활동에 부족함이 많을 테니 토마스 경이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무인 10 명 한 조에 정보부 요원들을 한 두명 씩 포함해야 할 겁니다.
북동부가 전시 태세라서 무력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 빈번할 거라 무인들을 그쪽으로 파견하지만, 정보 능력과 경험이 중요합니다.”
토마스가 말했다.
“당연히 최선을 다해 도와야지요.
그 부분은 제가 저스틴 대장과 협의해서 잘 진행하겠습니다.
그런데 남부는 모그란데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 말고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워낙 넓기도 하고 인구 수 만 명에 달하는 도시가 수 십 개인 지역이 남부입니다.
지금 저희 정보 역량으로는 넓은 지역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주셨으면 합니다.”
세틴의 목소리가 신중해졌다.
“나는 가능하면 남부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정국이 수습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4황자의 야심이 여전하고 가리온 후작 또한 쉽게 남에게 숙이고 들어갈 사람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황도의 상황과 우살리드와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따라 가리온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는 일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큰 변화가 있을 때를 노릴 수도 있어요.
알려진 바로는 남부가 일체가 되어 가리온을 지지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가리온이 군사적 움직임을 보인다면 곧바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함은 기본입니다.
남부 귀족들에게는 우리가 파고들 여지가 있습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우리의 5대 지역에 군상 체제가 확립되고 나면 남부와도 교역을 확대할 겁니다.
또한 최남단의 호르바트 백작은 놀란 경의 장인입니다.
그러니 토마스 경은 이 부분에서 놀란 경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합니다.
당장은 군상 체제를 마련하는 일이 우선이니 서둘 필요는 없습니다.”
토마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저스틴 경과 함께 세부 계획도 마련하고 오골보르 상단과도 접촉한 이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간단한 보고 외에 관저에서는 언급을 삼가도록 합시다.
필요하면 여기서 만나 의논하도록 해요.
내가 사저에 들락거리는 거야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울브린 경에게도 따로 할 말이 있습니다.
지금 제국군 기병대에 부대장으로 편입했지요 ?
기병대 총 대장인 뱅골 도이어는 훌륭한 장군이고 역량도 뛰어나지만 모그란데와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가 스스로도 나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공언했고, 나도 그것이 진심임을 믿어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모그란데와의 관계가 큰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경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쳐야 합니다.
지금 제국군 기병대의 규모가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커졌어요.
앞으로는 더 불어날 겁니다.
앞으로 합류할 영주들과 그 휘하의 기사들을 대부분 기병대로 편입할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울브린 경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기존의 기병대 내에서 영향력도 확보하는 동시에 추가로 합류하는 영주들과 기사들의 군기를 확실하게 잡아야 합니다.
밑작업은 내가 직접 해줄 거에요.
영주들의 독자적인 지휘권을 철저히 배제하고, 제국군의 군사 행정 체제에 따르도록 할 겁니다.”
울브린이 말재간이 없어서 그렇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차없이 목을 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사안인 데다 하늘같이 우러러 보던 영주들을 휘어잡으라는 말에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토마스의 장난기가 어김없이 발동했다.
“너무 겁주시는 거 아닙니까 ?
울브린의 표정을 좀 보세요.
저러다 울겠습니다.
이봐, 너무 걱정 말라고,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
정해진 수순처럼 울브린이 눈을 부라렸다.
“흥, 내가 자네 도움 따위를 바랄까.
소가주님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명을 완수하겠습니다.”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울브린을 돕는답시고 뱅골이나 영주들의 뒤나 캐고 다닐 필요는 없네.
그런 쓸데없는 짓에 낭비할 힘이 어디 있겠나 ?
정찰대장이었던 고진 장군이 신병의 훈련과 편제를 총괄하게 될 걸세.
그리고 좌, 우군도 해체해서 커티스 장군이 보급을 맡을 거요.
내가 미리 언질을 두었으니 두 장군에게 상의하면 큰 도움이 될 거요.”
울브린도 고진과 커티스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노스롭 토벌에서 고진의 혁혁한 활약은 말할 것도 없고, 전임 사령관의 아들인 커티스 또한 무게감이 컸다.
그런 두 사람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유일하게 별다른 임무를 받지 못한 오클린이 말은 하지 않았어도 어딘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외부에 알려지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만한 얘기들을 들으면서 세틴이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이런 자리에 합류시킬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전공으로 어느덧 3등 장군까지 직위를 올린 오클린이었다.
명시적이지는 않으나 3 등 장군이면 백작에 준하는 지위였다.
세틴이 그런 오클린을 보며 말했다.
“처음 황도를 향할 때부터 나와 함께 한 청랑대는 그동안 세틴군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불구덩이를 마다 않고 뛰어든 병력도 항상 청랑대였고, 세틴군의 엄정하고 빈틈없는 군기의 상징도 청랑대였지요.
내가 오늘 오클린 장군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은 새로운 부탁을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상 그동안 친위대는 친위대라기보다 모든 싸움에 앞장선 진정한 선봉이었지요.
이제 제국군은 세틴의 사병이 아니고, 친위대의 임무도 달라져야 합니다.
이미 황도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제가 가장 신경이 쓰이는 곳이 바로 황궁입니다.
황궁에서 어떤 변고가 일어나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발생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오클린 장군을 황궁 근위대장으로 추천하려 합니다.
내 생각이 관철되리라는 보장은 아직 없지만, 가능하면 그렇게 되도록 할 겁니다.”
오클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됩니다.
저는 아직 장군님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고, 황궁의 경비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청랑대를 비롯해서 친위대 상당수가 빠지면 친위대가 너무 허술해집니다.
더구나 지금 상카 경도 다른 임무를 받아 나가신 마당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세틴이 말했다.
“저에게 장군만큼 든든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옆에 끼고만 있으면 서로에게 발전이 없습니다.
지금은 나를 지키는 일은 작은 일이고 황궁 경비를 강화하는 일은 큰 일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저스틴 형, 토마스 경, 울브린 경도 일 년 반 넘게 제 곁을 떠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냈습니다.
우리가 함께 했어도 많은 공을 세웠겠지만, 저에게는 멀리 떠나서 꼭 필요한 일을 해줄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오클린이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기도 하고 뭔가 세틴을 설득할 말을 찾기도 했으나 세틴의 결정을 부정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토마스가 말했다.
“오클린 경, 장군님은 무엇보다 대국을 중시하고 주변 사람들이 꼭 필요한 일을 해내면서 성장하길 바라시는 분입니다.
장군님 곁을 지키겠다는 충정을 모르지 않으나, 내가 아니면 지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일 수 있습니다.”
오클린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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