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 도일의 진가
세틴이 맞장구를 쳤다.
“대롱형이라면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군요.
그 정도 크기라면 살상력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겠어요.
아마 병사들마다 투척 무기나 슬링, 새총같은 원거리 무기를 다뤄본 경험들이 있을 거에요.
각자 자신있는 공격 수단을 하나 정도는 익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레인저 상대로 기병을 어떻게 운용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원거리 무기를 하나씩 갖추도록 하면 전술적인 활용 범위가 넓어질 겁니다.”
베른이 말했다.
“이곳 경비대가 전원 기병이니 당장 실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전투가 많지는 않으니 정비단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겠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필요한 장비나 재료는 난다에게 요청하세요.
최대한 조달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겠습니다.”
세틴은 베른과의 대화가 무척 즐거웠다.
새로운 문제를 만났을 때,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으려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고, 세틴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다고는 해도 젊은 편이라 말이 잘 통했다.
세틴 일행은 저스틴이 정보부대의 지휘를 위해 정비단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귀경길에 올랐다.
세틴은 저스틴에게 베른의 무술도 봐주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저스틴이 나이는 더 많지만 군 부대의 운용이나 전술에 대해서는 베른에게서 배울 점도 많으리라는 짐작이었다.
세틴이 급속 행군으로 황도에 돌아왔다.
세틴이 황도를 12 일 비운 셈이었다.
첫눈이 내려 온통 백색으로 덮인 황도의 경관은 그것대로 장관이었다.
십자 대로를 따라 저마다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들은 물론이고, 눈 덮인 황궁은 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듯한 형상이었다.
오후에 관저에 도착한 세틴에게는 접견을 원하는 배첩이 순식간이 쌓였다.
세틴은 모든 요청을 일단 다음날 이후로 미루고, 저녁에 찾아온 시오미를 만났다.
“잘 다녀왔어 ?”
세틴이 웃으며 시오미를 맞았다.
“가도 정비와 병참 건설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여러 가지 성과가 적지 않아.
그런데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돌아오자마자 보자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
시오미가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
황태자님과 양부가 공개적으로 언성을 높이며 싸운 것만 세 번이야.
본격적인 힘겨루기에 들어간 셈인데, 양부는 황태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고, 황태자는 양부에 대한 불신이 크니 사사건건 파열음이 날 수밖에......”
세틴이 물었다.
“무슨 일로 ?
당장 그렇게 크게 부딪힐 일이 있나 ?”
시오미가 대답했다.
“일단 하나는 제국군에 대한 지원문제야.
양부는 병부에서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서 만든 안이니 황태자에게 웬만하면 인정하라는 식이고, 황태자님은 당장 내년 봄에 제국군이 우살리드 토벌에 나서야 하는데 장수들 급여하고 병사들의 식비만 줘서 어떻게 하냐고 맞서셨어.”
세틴이 피식 웃었다.
“그거 하나만 갖고도 사람들이 날 찾을 만하네.
사실 그 부분은 내가 모그란데와 협의를 이미 한 사항이기는 한데, 따지고 보면 그 정도 재정으로 토벌을 준비하라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모그란데가 좀 답답하긴 하겠군.
명분이 없어서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내가 문서로 약속한 것도 아니고, 자리를 비워버렸으니 말이야.
다른 건 ?”
시오미가 말했다.
“오늘 내가 온 건 양부가 제국군 예산 문제를 어찌 할 건지 답을 받아 오라는 게 제일 커.
다른 건 황실 예산문제하고 대신 이하 관료들의 인선인데, 양부가 섭정을 하면서 황실 직속의 예산을 대부분 조정 예산으로 돌린 상태거든.
지금 제대로 세금을 바치는 곳이 별로 없으니 조정의 예산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황실에서 직접 운영하는 영지들에서 나오는 수입이 대부분이야.
이 문제도 서로 양보하기 힘든 상황이긴 하지.
관료 인선이야 서로 자기 사람 하나라도 더 넣으려고 다투는 거라 어차피 시간이 좀 지나면 일, 이 황자님이 중재를 해서 어떻게든 정리가 되겠지.”
세틴이 웃었다.
“내가 그런 문제들 때문에 서로 싸우는 꼴 보기 싫어서 도망쳤던 건데, 하나도 해결된 게 없다니 원.
제국군 예산 문제는 내가 양보해서 어떻게 넘어간다 해도, 다른 두 가지는 내가 나서기 곤란한 문제인데 어떻게 하나......”
시오미가 물었다.
“그럼 제국군 예산은 세틴이 알아서 해결한다고 전해 ?
그래도 되겠어 ?”
세틴이 말했다.
“그건 내가 모그란데와 약속한 거니 일단 지키기는 할 건데, 모그란데에게 한 마디만 전해.
내가 그 정도로 양해한다 해도 북부군을 해산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막아줄 방법은 없다고 말이야.”
시오미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연결이 되나 ?
아직까지는 북부군을 물려야 한다는 말은 누구도 꺼낸 적이 없어.
조정에서 제국군 예산을 논하다 보면 턱없이 부족한 황실과 조정의 예산 문제가 나올 거고, 그 상당 부분을 북부군에 쓰고 있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군.
허, 양부 입장에서는 차라리 예산 문제에 대한 전권을 황태자께 넘기고, 북부군에 대한 지원만 확실히 보장받는 편이 낫다는 얘기지 ?”
세틴이 웃으며 엄지척을 했다.
“역시 똑똑해.
어차피 돈 나올 구멍이 뻔한데.
모그란데가 고집을 부리다간 빼도 박도 못하는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크지.
내가 한 말은 ‘약속은 지킨다’하고 ‘북부군에 대한 말이 나올 거다’ 이 두 가지만 전해.
다른 말들은 내가 하더라는 얘기는 하지 말고.”
시오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
그런데 세틴은 이런 상황까지 다 예상을 하고 나갔다 온 거야 ?”
세틴이 웃었다.
“하하, 내가 그걸 어떻게 다 알아.
그냥 그간 오간 얘기들을 듣고 판단한 거지.
황태자 등극 축하 연회 때 번잡한 게 싫은 것도 있지만, 우살리드 쪽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서 상황을 보고 가도 정비단도 둘러보는 게 주 목적이었어.”
시오미가 화제를 돌렸다.
“난 난다와 완다가 장군이 되어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그냥 똑똑하고 예쁘고 무술에도 소질이 있는 시녀들로만 생각했지.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그녀들이 세틴의 부인이 되어 나타난 것보다 장군이 되었다는 사실이 솔직히 더 부러웠어.
여자가 다른 일도 아니고 장수가 된다는 걸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세틴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
그녀들이 장군이 됐을 때 반발은 없었고 ?”
세틴이 말했다.
“장군이라고는 하지만 하는 일은 주로 군사 행정이야.
나는 행정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난다와 완다는 마침 그 일을 아주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
그녀들은 군직에 오르기 전부터 내 보좌역으로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했어.
그러면서 모든 장수들에게 인정을 받았지.
장수들의 속마음까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노스롭 토벌에 참여했던 장수들 대부분이 그녀들을 무서워하면서도 고맙게 여겨.
토벌군이 빠르게 성장하고, 세를 키우면서도 질서정연하고 강력한 군기를 갖게 되는 데는 그녀들의 공이 무척 컸어.
제국법이나 역사적인 선례를 보아도 여성이 작위를 갖거나, 조정이나 군에서 직위를 갖는 걸을 제약하는 법은 없어.
그냥 여자들은 안된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뿐이지.”
시오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높은 지위에 올라 사람들을 호령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지만,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해.
언젠가 나도 정말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다.”
세틴이 웃었다.
“아니, 천년 제국 황실의 마법병단장께서 새삼 무슨 그런 말을 하실까 ?
하하하.”
시오미는 시무룩했다.
“그거야 양부가 그냥 정해준 직위고, 마법사들 열 댓 명 모여서 연구를 한다고 하지만, 뭘 얼마나 할 수 있을지도 아직 불분명한 걸.
일전에 세틴이 마법을 많은 사람들이 편하고 이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생각을 많이 했어.
요즘은 하루 빨리 그런 방향으로 매진할 여건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야.”
세틴이 말했다.
“아참, 나한테 선물한다는 건 아직이야 ?”
시오미가 웃으며 대답했다.
“거의 다 됐어. 조만간 보여줄게.”
세틴이 황도를 비운 동안, 정국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흘러가는 듯했으나, 사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격변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존했다.
모그란데가 섭정의 지위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던 상황에서 황태자 옹립 후, 궁지에 몰리는 일들이 잦아지고 있었다.
여기서 모그란데가 쉽게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족한 황실과 조정의 예산을 둘러싼 다툼이 본격적인 정권다툼의 시발점이 되고 있는 셈이었다.
모그란데에게 가장 큰 압박이 되는 여론은 북부군의 해산에 관한 건이었다.
하지만 모그란데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세틴은 그것을 빌미로 모그란데의 정국 주도권을 서서히 박탈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다 보면 모그란데가 우살리드 정벌에 앞장 서는 것으로 정국을 타개할 계기로 삼는다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을 세틴은 기대하고 있었다.
현재까지의 흐름으로만 보면 모든 것이 세틴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었으나, 과연 모그란데가 또 무슨 수를 들고 나올지, 또 다른 어딘가에서 새로운 변수가 등장할지 모를 일이었다.
세틴은 면담 요청을 대부분 제국군을 오래 비워 처리할 일이 많다는 핑계를 들어 미루었으나, 둘은 거부할 수 없었다.
하나는 이제는 황태자가 된 오디어스가 보낸 그의 딸 카스텔라였고, 다른 하나는 가리온 후작의 대리인으로 보이는 자였다.
오전에 황궁으로 카스텔라를 방문하려 했으나, 그녀는 오전에는 준비가 어렵다며 굳이 저녁에 보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예전에 카스텔라는 스스로 나서서 세틴과의 결혼을 추진했던 만큼 상당히 껄끄러운 사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세틴이 그녀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셈이었고, 그녀 다름대로는 많은 고심을 하고 추진했던 일이어서 세틴에 대한 원한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일단 세틴은 오디어스가 황태자로서 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만, 모그란데를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방식으로 황태자를 돕는 모양새는 결코 취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가운데 오디어스가 또다시 카스텔라를 통해 자신에게 접근하는 상황이 달갑지 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세틴은 그저 사촌누이로서 카스텔라를 대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으로 일단 만나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