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앞날을 논하다
유난히 호승심이 강하고 자신의 활솜씨를 자부하는 토마스는 패배를 실감하기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활시합에서 토마스는 세틴에게 완벽하게 무너졌다. 총점 27 점 대 23 점. 적은 차이가 아니었다.
세틴은 첫 발 1 점, 두 번째 2 점, 세 번째부터는 끝까지 모두 3 점을 맞추었다. 누가 보더라도 두 발로 영점을 맞추고 난 뒤에는 완벽한 실력을 보인 것이었다.
“실로 제가 질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1, 2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실력이 부쩍 느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제가 느끼기에 13 공자께서는 평소에 실력을 반쯤 감추신 것 같군요. 저 자신의 자만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내가 이래 봬도 활의 민족이라고, 하하하.”
“네 ? 활의 민족이라니요 ?”
“아, 아냐 아냐 그냥 해본 소리야.”
토마스가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과녁의 중앙 원은 원래 사람의 얼굴 크기를 기준으로 잡혀 있습니다. 200 보 거리에서 사람의 머리를 백발백중 맞출 수 있다면 그야말로 신궁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새롭게 눈을 뜨는군요. 공자님의 활 솜씨에 대해서는 완전히 승복합니다.”
“하하, 다른 두 가지 시험은 다를 거란 말이지 ? 좋아, 좋아. 이제 우리 아카데미 원탑 기사님의 검술 실력을 좀 보자고.”
이제 완벽하게 성장한 울브린과 한참 크고 있는 세틴은 키부터 차이가 꽤 났다. 울브린이 남들보다 체구가 큰 편이라 세틴은 그의 어깨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울브린이 세틴의 활 솜씨를 보고서도 검만큼은 자기에게 안될 거라고 자신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기사인 울브린은 당연히 자신의 검을 차고 있었으나, 대공가의 자녀와 대련할 때 진검 사용은 아예 가법으로 금지되었으므로 준비된 10여 개의 목검 중에서 골라야 했다.
둘의 대련은 초반부터 세차게 몰아치는 울브린을 세틴이 힘겹게 막아내는 모양새로 보였으나 결국은 울브린도 세틴에게 지고 말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같은 브라스트 검법을 쓰는 게 맞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울브린의 검로는 툭툭 막히고, 절묘하게 힘을 빼고 슬쩍슬쩍 흘리는 세틴의 검법은 분명 브라스트 검법이 맞으면서도 아닌 듯 보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쉽지 않겠다 생각한 울브린이 몇 차례 회심의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마저 모두 막히자 울브린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었다. 그런 순간에 세틴의 목검이 울브린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졌습니다.”
울브린이 검을 떨구었다.
“수고했어.”
울브린이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공자께서 쓰신 검법이 브라스트 검법이 맞긴 한 겁니까 ?”
“하하하. 태어나서 궁 밖에 나가본 적도 거의 없는 내가 무슨 다른 검술을 배웠겠어 ? 브라스트 검법 맞고 말고. 그런데 사실은 말이야. 이 대련은 처음부터 불공정한 게 맞아. 애초에 난 대공 전하께 검법을 배웠거든. 모두가 배우는 브라스트 검법과 대공 전하의 검법이 같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모두에게 공개된 검법이 모자라거나 숨긴 것이 있어서는 아니야. 같은 검법이라도 깨달음이 다른 거지. 울브린, 오늘 대련을 곰곰이 새겨 보면 얻는 게 적지 않을 거야.”
“잘 알겠습니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자, 이제 땀 좀 식히고 나서 두 번째 시험으로 넘어가 보자고. 저 과자 진짜 맛있다니까 ?”
제각기 하인들이 가져온 수건으로 땀을 닦고 찬물도 한 그릇씩 들이키고 나서 다시 다과가 차려진 탁자에 마주 앉았다. 웬일인지 울브린과 토마스는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다과를 즐겼다.
“이런 건 생전 처음 먹어 봅니다. 오늘 13 공자 덕분에 제 입이 호강하네요. 패배의 아픔이 싹 가시네요. 하하하.”
토마스가 참인지 농인지 모를 너스레를 떨었다.
“아까 검법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대공께서 내게 사울 선조의 검을 선물하신 뜻이 뭐라고 생각해 ?”
세틴이 본론을 꺼내자 토마스가 입을 닦고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호사가들의 입이 심심찮은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공께서 13 공자를 후계로 공표하신 거나 다름없다는 사람도 있고, 브라스트 검법에 맞지 않는 외날검을 주신 것으로 보아 그저 진귀한 선물에 불과하다는 편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필 13 공자의 성인식에서 후계문제를 공식화한 데에는 분명 깊은 뜻이 있을 거라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같이 합니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어. 대공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시피 검은 후계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대공은 정치적인 술수나 교묘히 뜻을 숨기는 식의 행사는 질색하시는 분이지. 사울 선조의 검을 선물한 것은 지금 심상찮은 제국의 정세를 전하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함이었어. 말씀하신 그대로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야. 그날 봤지 ? 대공께서 자리를 뜨자마자 놀자판으로 변해 버린 거. 대공의 뜻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
세틴이 한심한 세태를 거론하니 울브린은 잠시 아카데미에서 밤새 토론하곤 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감입니다. 13 공자. 기사단에서조차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제국의 상황을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저는 참혹한 전란의 시기가 멀지 않았다고 봅니다. 제국 내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이 어디입니까 ? 바로 브라스트 공국이죠. 황권 다툼이 본격화 하면 브라스트가 그냥 손놓고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세틴이 울브린에게 엄지척을 해보이며 말했다.
“더구나 우리 대공비께서는 제국의 황녀시지. 순위가 몇 십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황위 계승권도 있어. 대공비께서는 지금 한참 칼을 갈고 있는 형제들을 남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시고 애초에 정치에는 관심도 없지만 그건 이쪽 사정이지. 우리는 싫어도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봐. 대공께서 마지막에 ‘살고자 하는 자는 대비하라’고 하셨어.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지.”
“저희 정보 부서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제국은 이미 내란 직전까지 간 상태입니다. 황제께서 승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나 할까요. 병석에 든 황제는 날뛰는 황자들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적어도 세 명 이상의 황자들이 처가를 비롯한 세 모으기에 나섰습니다.”
아무래도 정보 부서에서 일하는 토마스가 제국 황가의 상황에 대해서는 가장 세밀하고 알고 있었다. 심상찮은 정세에 대한 세 사람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 세틴이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 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까 ? 그대들이 대국을 주관하는 입장이 아니지만, 대략이라도 대책을 말해 봐.”
“어째 공자님의 시험이 아니라 저희들을 시험하시는 기분이 드는데요 ? 하하하,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제가 대국을 주관할 수 없기 때문에 사고의 한계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책을 논하자면 대전제가 하나 꼭 필요합니다. 이 상황에서 공국의 목표가 무엇이냐. 별탈 없이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 세력을 넓힐 기회로 삼을 것인가, 혹은 그 이상을 바라볼 것인가. 그런 대전제 하에서만 대책이 나올 수 있죠. 그런데 이는 대공 전하의 뜻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누구도 쉽게 왈가왈부 할 수 없는 문제죠.”
세틴이 토마스를 밉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 보았다.
“어라, 잘도 빠져 나가는군. 하지만 토마스, 이번엔 자네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어. 대공께서 이 시점에 후계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가 뭐겠는가 ? 이는 자네가 말한 대전제를 후계자에게 맡기겠다는 뜻일 수도 있고, 바로 그 대전제를 제대로 세울 수 있는 사람에게 대권을 맡기겠다는 의도가 아니시겠나 ?”
울브린은 물론 말빨 좋은 토마스도 세틴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름대로 똑똑하다는 자부심도 있고, 누구 못지 않게 넓은 시야를 가졌다고 생각해왔지만, 세틴의 말을 듣고서 이런 게 바로 자신들과 대공자 자제의 뛰어 넘기 힘든 격차가 아닐까 싶었다. 세틴의 지적에 졸업파티에서 했던 멀린 대공의 연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세틴은 둘에게 다시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두 사람은 이제야 호위를 해달라는 제안이 단순히 마음에 드는 사람을 자기 곁에 두고 싶은 공자의 치기 어린 욕심이 아님을 파악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단지 호위해 줄 사람 한 둘을 구하는 게 뭐가 어렵겠어 ? 여섯 살부터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면서 우리 생도들끼리야 서로 손버릇 입버릇까지 빠삭하지. 내가 큰 일을 같이 논하고 마음을 나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딱 그대들 두 사람이야. 토마스가 말한 ‘대전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그대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싶어. 내가 말한 두 번째 시험은 이것으로 통과했다고 해도 좋을까 ?”
두 사람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이고, 토마스가 말을 덧붙였다.
“식견과 포부를 자랑삼아 겨루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토론 ‘시험’이라 하셔서 심판은 누가 보나 했는데, 이런 식으로 결착을 보는 13 공자의 방식에 진심으로 탄복했습니다. 무술 대결 못지 않게 훌륭한 점수로 합격입니다. 하하. 하지만 마지막 시험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13 공자를 후계자의 물망이 올린 적이 없는 현실입니다.”
“그럴까 ? 난 제일 쉽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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