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호의 이변
대공의 방패라 불리는 흑룡기사단은 단장 포함 단 7 명으로 구성되는 만큼 선발 조건부터 까다로웠다.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무위는 물론 커다란 체구와 진중한 성격까지 보았다. 임무가 임무인지라 평소 훈련도 방어 훈련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흑룡기사의 무장은 어깨에서 무릎까지 거의 전신을 가리는 타워실드와 기사검인데 일반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보다 한 뼘 정도 길고 두터운 검신이 특징이었다.
객관적으로 세틴의 식구들이 흑룡기사와 대등하게 맞설 가능성은 낮았다. 변수라면 오러 사용 금지라는 조건이었다. 기사들의 전투력 대부분을 좌우하는 것이 오러 운용 능력인지라 이는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셔틀리에게서 몇 가지 지시를 듣고 출전한 흑룡기사는 보기에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말 그대로 난다와 완다가 어린 아이로 보일 정도로 체구 차이가 큰 데다 방패가 커다란 벽으로 보일 정도로 빈틈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난다와 완다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번갈아 가며 펼치는 파상 공세가 흑룡기사에게 모두 막히고 무너지지 않을 산처럼 보였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아 흑룡기사의 검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녀들은 흑룡기사의 무장이 갖는 약점을 일찌감치 간파해냈다. 커다란 검으로는 근접 공격이 어렵기 때문에 방패로 다가온 상대를 밀어내거나 방패 공격을 해야 하는데, 타워실드는 공격용으로 쓰기에는 적합한 형태가 아니었다. 긴 검을 활용한 찌르기로 접근을 견제하고 다가온 상대는 방패로 밀어내는 단순한 패턴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세틴은 그녀들의 독특한 체술을 주목했다. 남달리 날렵한 몸놀림은 고도로 숙련된 체술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흑룡기사가 검을 떨어뜨린 것은 근접한 완다를 검은 든 팔꿈치를 써서 공격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가녀린 완다와 팔꿈치를 마주쳤을 뿐인데 검을 떨구고 말았으니 흑룡기사는 영문도 모르고 당한 셈이었다.
다음 출전한 토마스도 난다와 완다처럼 민첩한 움직임으로 승부를 보려 했으나, 그는 둘이 아니라 혼자였고 남다른 체술도 없었다. 그는 검으로 흑룡기사를 공략할 방법이 없음을 인정하고 순순히 패배를 선언했다.
바네사의 화려하고 실전적인 공격들도 흑룡기사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한동안 보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살벌한 공격을 퍼붓다가, 거리를 허용한 순간 폭발적으로 돌격한 흑룡기사의 어깨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울브린은 막상막하의 접전을 펼쳤으나 아쉬운 패배.
저스틴의 검술은 거의 흑룡기사의 천적이라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고 거센 공격에 상대는 방어에 급급하다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과연 ‘검귀’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저스틴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미 3:2로 이기고 있으니 남은 기사 한 명을 내보낼 만도 했으나 셔틀리는 자신이 직접 13 공자를 상대하겠다고 나섰다.
“기왕이면 대공께서 하사하신 외날검을 구경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
셔틀리는 그것이 목적이기나 한 것처럼 물었다.
“하하하. 나도 그러고 싶으나 문제가 조금 있어요. 몇 번 써봤는데 상대의 검이 버티지를 못합니다. 부러지거나 날이 심각하게 상해서 검을 못쓰게 되는 일이 다반사라 실전이 아닌 대련에 사용할 수는 없어요. ‘소드 브레이커’란 별명까지 생겼죠. 오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단장의 검이라도 장담할 수 없을 거에요.”
“그렇다면 별 수 없죠. 공자께서 그동안 외날검 사용법을 얼마나 익히셨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자, 오세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셔틀리는 브라스트에서는 적수를 찾기 어렵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대공을 근접호위하는 임무의 성격상 다른 사람들과 검을 맞대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 정확한 실력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셔틀리는 방패도 사용하지 않고 평범해 보이는 기사검을 들고 나왔다. 이번에야 말로 브라스트 검법의 숙련도와 신체 조건 및 성향에 따른 체화 정도를 겨루는 대결이었다. 세틴이 그를 이길 수 있다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세틴은 나름 최선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고, 셔틀리는 가진 재주는 다 보여보라는 듯 반격을 거의 하지 않고 막아내는데 주력했다. 세틴에게나 구경하는 기사들에게도 쉽지 않은 기회가 될 것임을 알기에 보여주는 배려였다.
30 분 가까이 거센 공방이 펼쳐지고 세틴의 밑천이 거의 드러났다고 판단한 셔틀리가 말했다.
“여기까지 하지요. 공자께서도 제가 생각한 것보다 몇 배는 뛰어나시고, 다른 사람들도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감각이 대단하더군요. 진심으로 공자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흑룡기사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는 대련이었습니다. 순행하는 동안 틈나는대로 서로 상대하다 보면 많은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평소의 셔틀리를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긴 말이었다. 그만큼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대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린 드래곤 호수를 건너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꼬박 하루를 가야 했다. 그린호는 크게 보면 호리병 모양으로 대공령 쪽은 큰 타원, 6 백작령 쪽은 작은 타원의 호수가 있고 중간에 좁아지는 구간이 있는데, 물살이 급한 여울목을 일곱 번 지나야 협로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절단이 탄 배는 호수에서 운영하는 배로는 꽤나 큰 이중노선이었다. 원래는 그렇게 큰 배가 없었는데 사울 브라스트가 폴린 왕국을 공략할 때 병력을 실어 나르기 위해 건조한 것이 이처럼 대형 선박을 운용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현재는 주로 6 백작령에서 대공령으로 식량을 운송하는데 사용되고 있었다.
배 위에서 바라본 그린호 주변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멀리 만년설을 뒤집어 쓴 봉오리들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었고, 가까이는 급한 경사도에도 그린 듯이 쭉쭉 자란 침엽수들이 물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호수면에 그대로 반사되어 배는 마치 거꾸로 자란 숲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좌우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기암절벽에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중 배는 어느덧 여울목이 시작되는 지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뱃길이 험해 위험하오니, 어르신들께서는 이만 선실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숙달된 뱃사람도 가끔 물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 정도이니 선실에 들어가서도 꼭 기둥을 잡고 계셔야 합니다.”
여울목이 가까워오자 선장이 경고했고, 사절단은 선장의 지시에 따랐다. 거기까지는 거울같이 잔잔한 호수였는데 여울목에서는 급한 물살을 타게 된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급선회를 하면서 배가 한쪽으로 기울기까지 해 몸을 가누기 힘든 상황이 서너 차례 지났을 때, 갑자기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배가 멈추었다. 사절단의 수뇌부가 급히 갑판에 오르자 이미 갑판 주변을 병사들이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어떤 빌어먹을 작자들인지 여울목에 쇠사슬을 달아놓았습니다.”
선장이 급하게 후작에게 보고했다. 말을 하며 선장이 손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40 명 가량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울이 좁을대로 좁아져 물살은 거세고 배가 간신히 지날 만한 지점에 쇠사슬을 설치하여 가로막은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 올란드 후작 각하와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
그리 크게 외치지 않아도 말을 알아들을 만큼 가까운 거리의 백사장에 진을 친 무리에서 30 세 가량의 훤칠한 미남자가 나와 말했다.
“내가 율리 올란드네. 감히 브라스트 대공의 행사를 가로막은 그대들은 누구인가 ?”
올란드 후작의 갈라진 목소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새날의 빛’이라는 단체에서 말단으로 일하고 있는 마법사 티리아요. 단체와 이름을 당당히 밝히는 건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떳떳한 무리이기 때문이오. 이미 제국 어디에도 ‘새날의 빛’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소. 우리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첫 행사를 여기서 시작하는 데는 깊은 뜻이 있다오. 제국의 주구 중에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브라스트를 목표로 삼은 것이 첫째요. 돼지같은 귀족들의 배나 부풀릴 구호 물자를 우리가 대신해서 주린 백성에게 고루 나눠주고자 함이 둘째요. 썩을대로 썩은 천년 제국이 이제 끝장났음을 선언하고자 함이 세 번째요.”
마법사라는 존재 자체도 놀라운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러나 티리아의 말과 태도는 진중하기 그지 없었다.
6 백작령으로 넘어 가기도 전에 이런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율리였으나, 그는 여전히 침착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도 안되고, 불순하기 짝이 없는 언사도 못마땅하지만, 그래서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가 ? 배 한 척에 실린 구호물자가 많아야 얼마나 되겠는가 ? 그 인원으로 대공가의 무력에 대항할 방법이나 있고 ?”
“하하하. 대공가의 올란드 후작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거짓은 아니군요.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우리가 감히 흑룡기사단과 60 명의 정예 병력에 정면으로 맞설 능력이 안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시지요. 우리는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후작이 우리의 제안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 배가 불지옥이 되는데 얼마나 걸릴지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 우리 궁수들의 불화살 수백 발이 배에 꽂히는 건 눈 깜빡할 사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저의 불마법이 그런대로 쓸 만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무리의 중간 중간 모닥불과 기름통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무리의 대다수가 손에 활을 들고 있었다. 이쪽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텐데 과연 불화살로 순식간에 배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율리는 신중했다.
“그래서 우리를 봐주겠다는 그대의 제안이라는 게 무엇인가, 일단 들어나 보지.”
“간단하오. 배를 우리에게 넘길 것. 호명하는 순서대로 이쪽으로 넘어와 포박당할 것. 그러고 나면 13 공자와 슈타인 남작만 데리고 우리는 떠날 것이오. 물론 남은 사람들의 구명줄은 마련해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어찌 보면 황당하기만 한 제안이었지만, 새날의 빛과 티리아라는 마법사가 준비한 것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였다. 주목할 만한 건 이쪽의 주요 인사를 비롯한 제반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브라스트 대공가가 어지간히 얕보인 모양이군. 대공가의 대신으로서 그런 허황된 수작이 통할 거라고 믿는 작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네. 언제까지고 헛소리를 들어주고 있을 수는 없네. 어디 마음대로 해보게.”
율리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섰고, 셔틀리가 나서며 손짓을 하자 기사단과 병사들의 살벌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패기만만한 티리아가 나름대로 빠져나갈 길 없는 외통수를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대공가의 자존심에 모두 불에 타 죽는 한이 있어도, 그의 제안은 단 하나도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제 몸 하나 지키기에 급급한 돼지들’이라는 그의 귀족관이 낳은 실수였다.
티리아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약간 당황한 듯 보였으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의 수하들은 화살에 불을 붙이고 티리아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고, 티리아가 파이어 볼을 날리면 수십 발의 화살이 연달아 날아갈 것이었다.
사절단의 배에서는 방패를 든 병사들과 어느새 물통을 준비한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흑룡기사단 일곱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태세였다.
일촉즉발의 터질 듯한 분위기에서 세틴이 등장했다.
“이보시오 마법사 양반. 난 대공가의 13 공자 세틴 브라스트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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