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그던 사령관
결국 셔플린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과를 해야 했다.
제국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북부군이 우살리드에게 이긴다는 보장이 없고, 특히나 세틴과 호아니에게서 들은 정보들과 제구군이 세운 대책을 들으면서 더욱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젊은 토마스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현장에 가면 결국 자기가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있었기에 세틴에게 적대적인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셔플린과 시오미가 돌아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북부군의 베그던 사령관으로부터 세틴을 단독으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세틴도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 곧바로 방문을 허락했다.
베그던은 나이가 60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으나 경지에 오른 무인답게 체격이 건장하고 노쇠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곱게 기른 팔자 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상당히 과묵하고 예의바른 자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오.
18 세의 어린 나이에 제국군 총수가 되고, 검술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지 오래라니 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나는 치옹 베그던 백작으로 북부에서도 최북단의 영지를 운영하고 있소.”
세틴이 역시 예를 다해 인사했다.
“세틴 브라스트입니다.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어 어깨가 무거우시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저도 같이 참전하여 함께 싸우고 싶습니다만, 승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전달 받으셨겠지만, 제국군에서는 궁병 위주로 2 만을 보내고 푸스킨 샘프라 장군이 지휘를 맡을 것입니다.
전할 사항은 모두 셔플린 자작을 통해 보내 드렸는데, 급하게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
베그던이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사실 제국군에서 전해준 우살리드에 대한 평가와 대책들을 들으면서 조금 놀랐소.
북부군은 사실상 각 영지군이 모인 연합에 가깝지요.
대규모 전투를 체계적으로 치러 본 경험도 거의 없다오.
7 만이 간다고는 하지만 실제 북부군의 주력은 각 영지의 기사단이라고 봐도 무방하오.
기사단을 모두 모아도 1 만이 채 안되지요.
노스롭을 토벌하면서 제국군을 여러 가지로 개혁하고 새로운 체계를 도입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마음으로 수긍이 가더라도 북부군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소.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군의 영주들에게는 기사단이 앞장 서서 돌격하고 다수의 징집병으로 밀어 붙인다는 이상의 전술 개념조차 별로 없는 게 현실이라오.
내가 사령관이라고는 하지만 북부군의 영주들은 자기 부대의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모두 자체 조달하고 있기 때문에 명령 체계가 원활하게 작동하기도 어렵지요.
솔직한 내 심정은 제국군이 토벌을 주도하고 북부군은 뒤에서 조력이나 하는 편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한 번 정해진 일을 이제 와서 뒤집을 수도 없고, 승상의 태도가 워낙 완고한 지라 답답한 마음에 사령관님의 도움을 청해 볼까 해서 왔습니다.”
세틴은 베그던의 진솔한 얘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여러 가지 사항들을 전해주기는 하였으나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많은 것을 준비하고 변화시키기는 무리가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살리드 군도 직속의 2 만 레인저 부대를 제외한 영지군들의 사정은 우리보다 낫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국군이 레이저 부대에 대한 대책에 최대한 만전을 기하겠다는 정도입니다.
일단 서전을 제국군이 담당하기로 했고 우살리드도 직속 부대를 앞세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전 초기에는 북부군은 관망하면서 특히 궁병을 강화하는데 힘써 주시고, 최대한 전술을 신중하게 구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병력의 우세만 믿고 말씀하셨던 고전적인 전술로 돌격을 감행하다가는 곤란한 지경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작께서 저보다 병사들을 아끼는 마음이 크시겠지만, 북부군도 제국의 백성이라는 생각은 저도 똑같습니다.”
베그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진심어린 조언에 감사드리오.
다만, 승상께서 공을 독촉하시고 영주들이 결전을 재촉하면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라오.
징집병들은 태반이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이오.
나야 살 만큼 살았으니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을 각오지만, 이번 전쟁에서 대패라도 하는 날에는 제국 북부가 되살아나는 데 적어도 수십 년은 걸리겠지요.”
세틴은 과묵하고 진중해 보이는 베그던이 이렇듯 우는 소리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북부에서 10 만이라는 병력을 끌고 올 때는 모든 영지에서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했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제가 드릴 말씀은 신중, 또 신중하시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승상은 연합해서 도와 줄 세력이 있다고 하시던데, 설사 동부왕국에서 병력을 좀 끌어온다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언제라도 참전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는 하고 있겠습니다.
가능하면 제가 갈 때까지 총력전보다는 대치국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북부군이 일단 크게 무너지고 나면 제가 참전을 하더라도 몇 배는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됩니다. ”
베그던이 말했다.
“일단 세틴 사령관의 말씀에 따르도록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어쨌든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드오.
북부군에는 사령관을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생각하는 영주들도 적지 않다오.
제국군이 황도에 오고 나서 사람들이 북부군와 영주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라진 탓도 있을 거요.
오늘 만나서 속의 이야기를 하고 보니 진정으로 제국과 백성을 걱정하는 사람인 것을 알겠소.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상대가 풍기는 기운 만으로 어느 정도 성격을 가늠할 수 있지요.
내가 보기에 세틴 장군은 굳건하고 예리한 가운데 부드러운 화기가 모두를 감싸는 느낌이라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제국의 앞날에 대해 밤을 새워서라도 고견을 듣고 싶은 심정이오.”
세틴이 말했다.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보중하시고 막중 대사를 무사히 감당해 내기시를 기원하겠습니다.”
베그던이 돌아가자 세틴은 곧바로 호아니를 호출했다.
“베그던 사령관의 얘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북부군의 상황이 생각보다 썩 좋지 않은 듯해요.
초기에 큰 전과를 내지 못하면 마음이 급해진 모그란데가 동부왕국들을 끌어들여 조속히 결말을 짓고자 할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우리가 참전하는 시점이 생각보다 빨라질 수도 있어요.
시건에 모병과 군비 제작을 서두르라고 해야겠습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군사 경험이 적은 모그란데가 어떤 식으로 그림을 그릴지는 뻔합니다.
우선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염두에 두고 있겠지요.
만약 우살리드의 저지선에 들이 박았다가 대패를 당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하라무스의 제2 병참기지를 대폭 강화해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적어도 황도까지 쭉 밀려버리는 사태만은 막아야지요.
일단 북부군이 본진을 맡았고 모그란데는 마도구를 통해서라도 전쟁을 직접 주도할 겁니다.
그의 성격에 앉아서 기다리지는 않을 거에요.
한 번 결전이 벌어지기 전에는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결전을 벌여서 요행히 이긴다면 좋겠지만, 질 경우에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한 방침을 이번에 참전할 장수들에게 확실하게 주지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세틴이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모그란데가 동부왕국을 끌어들이면서 계속 황도에 남아 있을 거라고 보시나요.”
호아니가 고개를 저었다.
“동부왕국이 참전하는 순간, 모그란데는 남은 북부군을 이끌고 직접 참전하리라고 봅니다.
이황자께서 어전회의에서 확실하게 못을 박으셨습니다.
동부왕국을 끌어들이는 자가 반역자라고요.
그는 우살리드와의 전쟁에서 이기면 황도는 언제든지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판단할 거에요.
황도에 남아 있어서 그에게 좋을 일이 없습니다.
이번 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봐야죠.”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를 우살리드 토벌전에 앞장 세우기는 했지만, 모그란데의 입장에서도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우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당연히 했겠지요.
외부의 세력까지 끌어들이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우살리드를 응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모그란데가 이기면 그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질 수도 있어요.”
호아니가 말했다.
“아무래도 북부군 내부에도 ‘동부왕국을 끌어들이면 반역자다’하는 공작을 강화해둬야 하겠습니다.
모그란데가 그런 결정을 하는 데도 조금은 더 어렵게 하는 의미도 있고, 만약의 경우에 북부군의 일부라도 우리 쪽으로 돌려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되도록 말이지요.”
세틴이 말했다.
“어전 회의에서 모그란데가 보인 태도로 보건대 그의 결심은 이미 확고해요.
시오미에게는 이미 충분히 말해뒀습니다.
만약 모그란데가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마법 병단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최대한 이쪽으로 데리고 오도록 말이지요.
베그던에게 듣기로 북부의 영주들은 저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군요.
다만, 베그던 백작은 그나마 말이 좀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호아니의 안색이 밝아졌다.
“북부군 사령관이 그런 분이라면 그래도 조금 희망이 보이네요.
제가 인맥을 총동원 해서라도 북부 영주들의 인식을 바꾸도록 해보겠습니다.”
베그던을 만나본 세틴의 감상은 그가 모그란데의 심복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신중하고 올곧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북부군의 핵심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베그던을 보면서 세틴은 한 가닥 희망을 볼 수 있었다.
모그란데와 베그던의 관계를 속속들이 알기는 어려웠으나, 모그란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그던을 사령관의 자리에 앉힐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 터였다.
일단 잠시 동안의 대면이지만 베그던에 북부군 내에서 상당히 높은 인망을 얻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기는 했다.
하지만 북부군은 통일된 하나의 군대라기보다는 북부에 속한 영주군들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베그던에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모그란데가 동부 왕국을 끌어들이는 것이 확실하다고 했을 때, 과연 베그던과 북부의 영주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관건이었다.
이미 ‘외세를 개입시키는 자는 반역자다’는 2황자의 선언이 공식화된 마당에 동부왕국과의 연합이 확실해지는 순간, 모그란데는 반역자의 오명을 벗기 힘들었다.
세틴은 베그던을 보면서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의 끈을 찾게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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