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의 데이트
세틴은 어려서부터 눈을 좋아했다.
눈이 내리는 모습도 좋았지만, 온 세상이 흰색으로 뒤덮여 모든 차별과 더러움이 사라진 풍경을 좋아했다.
황도 밖 제국군 사령부에서 시오미를 만난 세틴이 아무도 모르게 사령부를 빠져나왔다.
세상에 단 두 사람만 남아 있다는 그런 느낌을 싫어 할 연인이 있을까.
눈밭을 뒹굴며 빨개진 볼을 하고 입김을 훅훅 불어대던 시오미가 말했다.
“살면서 이렇게 즐거운 기분은 처음이야.
어떻게 여길 나올 생각을 한 거야 ?”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어려서부터 강아지처럼 눈밭을 뛰어다니길 좋아 했어.
그땐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이길 바랬지.
요즘은 시오미 생각이 너무 나서 안절부절일 때가 많은데, 아무 생각 없이 눈밭을 함께 뒹굴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할 줄은 나도 몰랐네.”
세틴은 짚단을 쌓아 놓아서 바람을 막아주고 쌓인 눈도 적은 곳으로 시오미를 이끌었다.
그리고 짚을 꺼내어 앉을 자리도 만들어 주고 작게 모닥불을 피웠다.
한동안 말이 없던 시오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구라도 지금 이런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거야.
그런데 나는 여전히 늘 불안해.
내가 언제까지 사람 노릇을 하면서 살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옴비두스도 모그란데도 내게는 시궁창에서 건져준 사람들이야.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에 부족할 것도 없고, 세틴 자신이 어디 있더라도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이라서 늘 불안해.
내게 맞는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벗어날 수가 없어.
세틴, 부끄럽고 엉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피임 도구를 왜 만들어야 했는지 알아 ?”
세틴은 말없이 시오미에게 다가가 어깨를 안아주었다.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언제든 널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우리가 늙어 호호백발이 되어서도 이렇게 서로를 데워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할 수 있을 때, 서로에게 최선을 다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내일 헤어져도 후회가 없을 만큼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면 되는 것 아닐까 ?”
세틴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나, 시오미는 말없이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 시오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양부가 요즘 꽤 바빠졌어.
만나는 사람도 많고 갈수록 눈빛이 강하게 빛나고 있지.
조만간 큰 결정을 하지 않나 싶어.
아무래도 돌아가는 정세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여.
유독 북부군을 챙기고 있지.
우살리드 토벌을 자신이 주도할 결심을 했을 거야.”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난 처음부터 우살리드 토벌에 나설 생각이 없었어.
모그란데가 나서도록 몰아간 거야.
새해를 맞아 첫 어전회의가 열리면 거기서 결정타를 날릴 생각이지.
문제는 모그란데가 직접 나설지는 모르겠지만, 마법 병단을 그냥 놀리지는 않을 거야.
좋든 싫든 시오미도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둬.”
시오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틴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세틴의 계획이라고 ?
북부군을 화살받이로 몰겠다는 생각은 알겠는데, 그러다 북부군이 우살리드에게 대승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
세틴이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모그란데는 북부군을 스스로 해산하지는 않겠지 ?
내가 사령관직을 수락한 가장 큰 이유가 북부군이 황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어.
만약에 모그란데가 우살리드 토벌에 성공한다면 그 위세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지겠지.
그래도 난 받아들일 생각이야.
그런데 이번에 동부 가도를 가보니까 우살리드가 결코 만만치 않아.
난 모그란데가 성공하는 것보다 너무나 형편없이 깨지는 게 더 걱정돼.
내가 북부군의 전력을 잘 모르지만, 우살리드의 기세와 역량과 나름의 명분이 가볍지 않지.
시오미가 참전하게 된다면 아마 살아남는 걸 더 걱정해야 될 지도 몰라.”
시오미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우살리드가 그 정도라고 ?”
“황도에서는 북동부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조정에도 북동부 출신은 거의 없고, 그저 촌구석에 먹고 살기도 팍팍한 동네라고 간주해 버려.
하지만 그게 바로 북동부 사람들을 뭉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우살리드 군대는 숱한 대몬스터 전쟁으로 단련되어 있고, 그들을 이끄는 우살리드의 통솔력이 무시 못할 수준이지.
모그란데가 우살리드 토벌에 나서겠다면 시오미가 내가 한 얘기들을 모두 해줘도 좋아.
내가 장담하건대 우살리드를 우습게 보고 덤볐다간 단숨에 날아갈 수도 있어.
그리고 한 가지 더.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넘어 모그란데의 본거지를 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할 거야.
하랑가가 험하기는 해도 넘자고 작정하면 며칠 걸리지도 않는다고 들었어.”
시오미가 다시 물었다.
“그런 얘기들을 양부에게 모두 전하라고 ?
세틴은 오히려 양부가 우살리드에게 철저히 짓밟히길 바란 거 아니었어 ?”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거야.
난 모그란데가 자신이 가진 힘을 제국의 안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곳에 쓰기를 바래.
모그란데는 나를 암살하려 했고, 자신이 원하는 정국을 조성하는데 나를 꼭두각시로 이용해 먹었고, 브라스트에서 반란을 부추기기까지 했지.
우리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인 건 맞아.
모그란데도 언제든 가능만 하다면 나를 치우고 싶겠지.
나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제국을 위해 쓰는 것으로 그가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길 바랄 뿐이야.
나는 오늘 밤이라도 모그란데를 암살해버릴 자신이 있어.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지.
모그란데는 자신이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기 전에는 죽을 자격도 없는 자야.”
시오미가 덜덜 떨고 있었다.
모닥불이 사그라들고 있어서 그런 줄로 생각한 세틴이 짚을 한 아름 더해 불길을 키웠지만 시오미는 여전했다.
“무, 무서워. 세틴이 무섭다는 건 아냐.
얘기를 듣다 보니 내가 생각한 세상이 너무 좁았어.
내가 배운 것이 너무 없다는 건 알지만, 사람과 세상 일을 경험한 것이 적지는 않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나보다 어린 세틴의 세상이 너무 넓고 깊다는 느낌이 들었어.”
세틴이 다시 시오미의 어깨를 힘주어 안았다.
“누구나 조금씩 알아 가고 배우는 건 같아.
내가 만나본 사람이 적지 않지만 시오미만큼 말귀를 바로바로 알아듣는 사람도 흔치는 않지.
나도 매일 시녀의 행동에서도, 병사의 말 한 마디에서도 배우는 게 많아.
솔라스경에도 그런 말이 있지.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이가 가져야 할 제 일의 덕목’이라고.”
시오미의 안색이 돌아왔다.
“오늘은 즐거웠던 기억만 남기고 싶었는데......
즐거움도 누릴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건가 ?”
세틴이 웃었다.
“그럼 결국 나만 즐거운 셈이 되어버렸다는 거네.
역시 심각한 얘기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시오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냐.
심각한 얘기를 꺼낸 건 내쪽인 걸.
얘기를 시작한 목적은 이루었어.
결국 내 불안감은 세틴처럼 드넓은 흉금을 가져야만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 해도 충분해.”
모처럼 즐거운 나들이에서 돌아온 세틴은 남아 있는 연말 8 일 동안 제국군 전체에 휴가를 주었다.
때마침 군상 체계를 만들기 위해 떠났던 완다가 돌아왔다.
놀란이 당분간 사우셔와 노스롭에 머물면서 해운과 수군 양성에 주력하고 상카와 완다가 교대로 순행하면서 군상의 정착을 감독하기로 하고, 일차 보고를 위해 완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세틴을 만난 완다의 일성은 활기가 넘쳤다.
“파이트 노스롭이 꽤나 일을 잘 하던데요.
시건 훈련소가 제국군 사령부 못지 않게 잘 돌아가고 있더라구요.”
세틴이 완다를 반갑게 맞았다.
“여, 완다, 고생 많았지 ?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난다는 지금 동부 가도 정비를 감독하러 나가 있어.
모처럼 돌아왔는데 아쉽겠군.”
완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 괜찮아요.
이제 우리도 각자 독립해서 살아야죠.
제국군이 휴가라니 제가 가서 만나고 오든가 할게요.”
세틴이 물었다.
“갔던 일은 할만 하던가 ?”
완다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 했다.
“생각보다 순조로웠어요.
일단 사령관님에 대한 믿음이 단단한 사람들이 많아서 설득이 쉬운 편이었구요.
보내주신 자금 덕분에 초반부터 빠르게 일이 진행되니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아요.
군에서 차출한 사람들과 상인들이 당분간 엇박자를 내기는 하겠지만, 상카 경이 워낙 군인과 상인들을 잘 다루시고, 놀란 경도 무역에 경험이 꽤 있으시니 크게 무리는 없을 거에요.”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 참 다행이군.
그런데 휴가를 준 김에 난다도 황도에 들르라고 전갈을 보낼게.
완다는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나랑 공부 좀 하자.
완다라면 아마 며칠 내에 배울 수 있을 거야.”
완다가 물었다.
“오랜만에 왔는데 웬 공부에요 ?”
“아마 시작하고 나면 완다가 더 열성일 것 같은데......
내가 구상한 새로운 회계 장부 작성법이야.
복식 부기라는 건데.”
아닌 게 아니라 완다는 곧바로 복식 부기에 빠져들었다.
세틴도 전생에 회계학을 공부했다고는 하나 실무 경험이 없어서 개념을 전수해 주는 수준이었으나, 완다는 단순히 현금과 물자의 출납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자산과 부채를 나누어 영업의 현황을 파악하는 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틴이 복식 부기를 도입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현금 출납을 위주로 작성하는 거래 장부로는 거대하고 광범위한 상업망을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원시적인 회계 방식으로는 짜임새 있는 계획을 세울 수도, 여기 저기서 속출하게 될 부정행위를 잡아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현대적인 회사는 아니더라도 원활한 군상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합리적인 회계방식이 도입되어야 했다.
어찌 보면 시대적 상황과는 동떨어진 회계 방식을 도입한다는 일이 무리일 수도 있었지만, 세틴은 완다의 천부적인 재능과 탁월한 상업 감각을 믿었다.
실제로 완다는 복식부기의 유용한 점들을 아주 쉽게 알아차리고, 다소 흥분하기까지 하면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방안들을 스스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군이라는 특성상 세틴의 군상은 실질적으로 거의 독점적인 상업망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었다.
특히 강과 바다를 이용한 수운 체계가 광범위하게 안정적으로 구축되고 이를 바탕으로 제국 전역을 오가는 무역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파급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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