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프
당장 총독회의라는 최대의 현안이 있는 데다 골트릿의 장례문제까지 겹쳐있는 상황에서 동부 왕국과의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었기에 긴 얘기가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세틴은 이번 총독회의는 현 총독들의 태도와 그들의 거취에 대해 조정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관건인 만큼, 총독들을 만나보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며 빠르게 황궁에서 물러나왔다.
거의 일 년 반 만에 다시 만난 베르토프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혈색이 아주 좋고, 몸가짐과 말투에서 여유가 넘쳐 흘렀다.
세틴이 제국군에 합류할 당시 사령관을 제외하면 최고참 장군으로 세틴과 동일 선상에서 하나의 군단을 이끌었던 그는 판단력이 좋고 처신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전국의 판도를 읽고 세틴이 승승장구하는 흐름에 무난히 몸을 실을 수 있었고, 스스로 몸을 낮춰 세틴에게 복종하는 자세를 취했었다.
덕분에 그는 최초의 총독으로 제국 남서부를 총괄하는 지위에 올라섰 수 있었으며, 세틴의 방침과 새로운 사업에 대해서도 나름 적극적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였었다.
세틴은 다시 만난 베르토프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기도 전에 그의 태도에서 일방의 패자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고, 이번에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마음을 정했다.
“못 뵙는 사이에 신수가 훤해 지셨습니다, 베르토프 총독.
아무래도 전장에 직접 나서는 것보다야 몸이 고달프지는 않지요 ?”
베르토프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세틴의 말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있음을 알아 챈 그는 여유 넘치던 자세부터 바로 잡았다.
“맞습니다.
사령관께서 풍찬노숙 하시면서 난적들을 물리치는 동안, 저는 늙은 몸을 핑계 삼아 후방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음을 늘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저는 언제라도 불러만 주신다면 적과 맞서 싸우다 전장에서 죽는 것이 꿈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총독이라는 자리에 내게는 맞지 않는 옷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사령관님께서 불러 주시면 언제든지 총독 자리를 박차고 달려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상명하복과 위계에 익숙한 군인이면서, 지금 제국에서 세틴의 눈밖에 나면 어떤 꼴을 당할지 누구보다 잘 아는 베르토프가 자세를 한껏 낮추는 모양새였다.
세틴이 웃었다.
“하하하,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올려주신 보고서는 충분히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동안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된 보고를 통해 남서부의 상황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함께 싸운 전우로서 마음 편히 얘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장군은 제가 임명한 최초의 총독이자, 총독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이고 길을 개척하는 위치에 계십니다.
그동안 총독 일을 해보니 어떻던가요 ?”
베르토프는 이미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세틴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향후 자신의 거취와 영향력이 좌우될 수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원래 제가 총독에 임명될 때는 남서부 전역의 군사에 관한 일만을 총괄하면서 후방에서 전선을 지원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모든 영주들의 군사에 관한 권한을 모두 빼앗아 오는 일이었기에 귀족들을 어르고 달래가면서 협조를 얻어내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남서부 귀족들이 노스롭에게 협력한 전과가 있는지라 그들을 명분으로 제압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고, 사령관님께서 노스롭 평정은 물론 계속 승승장구하시니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없었지요.
제국군에 군상 체계가 도입되면서부터는 솔직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그와 관련된 일은 놀란 경, 완다 경, 상카 경에게 모든 일을 위임하다시피 했지요.
군상 체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상업 및 외부와의 교역이 많아지면서는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천생 군인이라 뇌물이라면 뜨거운 불처럼 경계하는 게 습관입니다.
그런데 부끄럽지만 총독으로 있으면서 여기 저기서 뇌물성 선물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아무 거나 주는대로 받아먹지는 않았고, 저 나름대로 선은 지켰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어떻냐고 물으시니 솔직하게 답하자면, 총독이라는 자리가 참으로 좋은 자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평소에 누구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남서부에서는 왕까지는 아니라도 남부럽지 않은 위치지요.
내게 이거 해줘라 저거 해줘라 요구하는 건 별로 없고, 바리바리 싸들고 부탁하러 오는 사람은 많습니다.
저에게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뭐냐 물으신다면, 다 필요 없고 그냥 죽을 때까지 총독이나 하고 있으라면 좋겠습니다.”
세틴은 베르토프의 말을 들으면서 갈수록 말이 착해진다고 느꼈다.
“진솔하신 말씀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제가 여섯 총독 중에서 장군을 처음으로 만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
장군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행하시느냐에 따라 총독이라는 제도 자체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 총독회의를 통해서 총독을 교체하거나 총독의 권한을 위축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직 총독이라는 제도 자체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을 교체해 봐야 오히려 혼란을 불러올 뿐입니다.
저는 오히려 총독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지위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보려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총독의 권한 강화는 당연히 지금의 총독들을 키워주고 떠받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지금의 군상 체계는 임시 방편에 불과합니다.
군이 상업과 무역을 맡는다는 게 어울리는 일은 아니지요.
장기적으로 총독은 군상 체계에서 손을 떼고 차츰 민간에 권한을 넘겨주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에 군사를 총괄하는 총독만 있지 통일적인 행정 체계는 아직 없습니다.
조만간 각 지역에 행정을 관할하는 총책과 교육과 여론을 관할하는 총책을 파견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이 행정, 군사, 교육 및 여론,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었다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지금은 현임 총독들이 그 역할을 모두 수행해야만 합니다.
어디까지나 임시적이고 과도기적으로 그 역할을 모두 수행하되, 상업과 무역은 민간으로, 행정과 교육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별도의 총책들에게 언제든지 이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역할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군인이 뇌물을 받으면서 이게 받아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이나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
행정과 교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총독을 일방을 지배하는 고정적인 자리로 생각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각지의 총독은 어디까지나 중앙 조정에서 파견하는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저는 장군께서 제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베르토프가 말했다.
“‘이 땅 너 가지라고 준 거 아니다’는 말씀이지요 ?
당장은 전국이 변란에 휩싸여 있으니 임시적으로 군이 모든 개혁을 주도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민간에 넘기거나 전국적인 행정 체계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제가 능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가란 강을 건너 사령관님에게 합류했을 때, 저는 이미 사령관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제가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사령관님의 포부와 제국을 완전히 새롭게 변모시키겠다는 계획에 전심전력으로 협조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번 총독회의에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향을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이번에 황도에서 모든 총독들을 불러 올려 총독회의를 열게 된 이유는 총독들을 다그치거나 통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요.
총독회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하나는 제가 이미 말씀드린 제국 전역에 걸친 개혁을 공식화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각지의 귀족들이 새로운 체계에 반발하거나 기득권을 고수하는데 주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변화에 적극 협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셋째는 총독 개인이 아니라 각 지역을 대변하여 중앙을 견제하는 관계를 정립하고자 합니다.
총독을 조정에서 임명하기는 하지만, 역으로 각지의 총독들이 조정의 대사에 대한 일정한 발언권을 갖게 하자는 거지요.
제가 총독들이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을 극히 우려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총독들은 제국의 변란을 잠재우는데 각기 지대한 역할을 해낸 공신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최근 큰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상업과 무역을 주도하면서 향후 조정과 황실의 재정을 책임질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조정이 황자들을 비롯해서 몇몇 대신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각 지방에 일방적으로 요구만 하는 관계가 지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자면 총독회의에서 총독들이 얌전하게 굴어서는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총독회의의 주인공은 총독들 자신이라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첫째, 최근에 군상 체계의 도입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 특히 일반 백성들이 얼마나 환호하며 반기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사업을 일구고 새로운 돈벌이를 찾기 위해 나서고 있는지는 아무리 자랑하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둘째, 현재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면서 권한 강화를 주장해야 합니다.
단순히 총독 개인의 권한을 더 달라는 게 아니라 중앙에서 여러 방면에서 일할 인재들을 파견해 달라거나, 새로운 사업을 펼칠 수 있는 자율성을 달라거나 하는 일 말입니다.
셋째, 중앙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어느 정도 가라앉기는 했으나 황궁 증축 문제로 지방에 재정을 요구한 일, 황궁에서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는 예산이 엄청나게 낭비되고 있는 일 등에 대한 비판을 가혹하게 해야 합니다.
넷째, 각지의 귀족들이 황도에 선을 대면서 총독들을 비난하고 있다 하는데, 그런 비판에 결코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당당하게 맞서서 다시는 그런 얘기들이 나올 수 없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베르토프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웃음이 번졌다.
“그러니까 사령관님 말씀은 절대로 주눅들 것 없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도 된다는 거네요.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저도 그동안 지방 귀족들과 대거리를 하면서 말빨도 좀 늘었지요, 하하하.
세상 물정도 많이 배웠구요.
거침없이 행동하되 사령관님의 근본 취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저도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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