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황자의 유언
오디어스를 비롯한 황자들은 최근 황실과 조정에서 일어난 일들로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말다툼을 해댔다.
세틴은 황궁과 황도가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할 기회라 여겨서 조용히 지켜 보고만 있었다.
4, 5, 6 황자가 가진 불만이 무엇이고, 그들이 무엇 때문에 오디어스에게 반발하는지도 알 수 있었고, 오디어스에 대한 다른 황자들의 태도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쟁점은 오디어스가 갑자기 황궁을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들이밀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전국의 반란이 얼추 정리되었으니 분위기도 쇄신할 겸 황궁을 화려하게 증개축하여 황실의 권위를 바로 잡을 기회라는 것이 오디어스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이에는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였다.
오디어스는 거창하게 자금 조달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전가하는 내용이었다.
우선 오디어스는 유일하게 전란을 겪지 않은 남부가 상당한 부담을 해야 하며, 갈리온 후작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기만 한다면 그동안 황실에 불충했던 일들을 덮어줄 수도 있다는 유인책을 들고 나왔다.
다음으로 황도의 귀족들이 그동안 반란을 잠재우는데 적극 나서지도 않고, 편안하게 지내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고 불리는 데만 열중했으니, 이제라도 황실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출연할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최근 세틴의 세력권이라 할 수 있는 지역들에서 총독들이 군상 체계를 도입하면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데. 조정에 상납하는 세금이 쥐꼬리라며 세금을 대폭 인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황자들이 반발하는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계획 때문임은 물론이었다.
거친 말까지 오고 가는 언쟁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세틴이 황자들의 말이 중언부언 반복될 때에야 입을 열었다.
“황궁을 증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 소관도 아니고 하니 굳이 의견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각지의 총독들은 사실상 제가 임명한 사람들이고, 군상 체계를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도록 한 사람도 저입니다.
총독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겠다는 계획에 대해서도 찬반을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방적으로 세금 인상을 통보한다면 아마도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총독들을 모두 황궁으로 소집해서 그들의 얘기도 들어보고 황태자께서 취지도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하면 어떻겠습니까 ?”
이 대목에서 오디어스가 반색을 했다.
“그래도 되겠는가 ?
지금 총독들의 위세가 만만치 않아서 내가 부른다고 꼭 오리라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
나보다 세틴 자네가 그들을 부른다면 감히 거부하지는 못할 거야.
자네가 총독들을 황도로 소집해주기만 하면 내 더 바랄 것이 없겠어.”
세틴이 무슨 생각으로 총독들을 황도로 불러 들이려는 것인지 오디어스는 관심도 없고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른 황자들이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는데, 세틴이 말했다.
“전하께서 필요하시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이번 기회에 총독들의 지위와 권한에 대해서도 재정비가 필요하고, 황실과 조정에 대한 책임 소재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다짜고짜 증세 얘기부터 꺼내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저도 그들을 만나 본 지가 오래 되어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총독들이 세력을 키우고 큰 부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차제에 황실과 제가 힘을 모아 그들을 확실하게 견제할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각지의 총독들이 세틴의 수하나 다름없다고 알고 있는 황자들은 세틴의 얘기에서 어디까지가 본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디어스가 이런 의문을 두고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총독들은 모두 네 부하였던 사람들 아니냐.
나는 그들이 세틴 네가 말 한 마디로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인 줄로 알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조심스러운 거지 ?”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각 지역의 총독은 제국군의 산하에 편입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황실 직속이지요.
결코 제 수하라고 볼 수 없고, 그들을 그렇게 다룬 적도 없습니다.
대부분 노스롭 토벌군과 제국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군들인데 제가 어찌 그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겠습니까 ?
물론 모두 제가 추천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황실과 조정에서 임명한 총독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그들에 대한 감독을 어떻게 할 것인지 조정에서 대책을 마련하셔야 할 듯합니다.”
오디어스가 이마를 탁 쳤다.
“그렇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
나는 총독들을 제국군과 세틴에게 소속된 사람들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그럼 이참에 네 이름을 빌릴 것도 없이 그냥 황태자의 어명으로 불러 올려야겠다.
제대로 권위를 세워야 나라에 질서가 잡히지.”
세틴이 한 두 마디 했다고 어느새 거드름을 피우며 모두가 자기 말을 들을 것처럼 위세를 떠는 오디어스였다.
파이란이 비웃듯이 말했다.
“어디 그렇게 한 번 해 보슈.
황태자가 소집령을 내려서 총독들이 두말없이 모두 올라온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지.
세틴이 정론을 말했다 해서 금방 그렇게 위세를 부리다니 참 세상을 쉽게 사는 사람이구려.
세틴이 원리원칙대로 말하고 일한다 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따를 거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지.
그러지 말고 애초 얘기대로 세틴이 소집하는 걸로 하슈.
다시 똑바로 알 수 있게 말해 줘요 ?
총독들은 세틴이 부르면 오겠지만 황태자가 부른다고 달려올 사람들이 절대 아니우.”
오디어스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다른 두 황자도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어쨌든 세틴이 오디어스의 난감한 상황을 풀어주어야 했다.
“이렇게 하시지요.
제가 소집은 하되, 황실과 조정의 이름으로, 특히 황태자의 명을 받아 소집을 하는 것으로 하면 됩니다.
누가 부르면 오고, 누가 부르면 오지 않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황자님들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떻게든 황태자 전하를 깎아 내리려고만 하지 마시고, 체면을 세워 주셔야 합니다.
지금 황실이 황태자 전하를 중심으로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6 황자 트리엄이 반발하고 나섰다.
“옳은 얘기인 줄은 안다만, 황태자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 선은 지켜줘야 우리도 체면을 세워 주지.
명분도 없고, 시기도 맞지 않는 문제를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니 우리가 체면을 살려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문제지.”
오디어스가 발끈했다.
“내가 무슨 ?”
오디어스가 말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파이란과 맬덤이 또 벌떼처럼 달려들어 황궁 증축 문제를 따지기 시작했다.
수도 없이 반복했던 얘기의 재탕이었다.
남부와 황도의 귀족들을 대신해서 오디어스의 계획에 결사반대를 외치는 그들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자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서 세틴이 다시 월칸의 영전에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오골보르 상단주였다.
세틴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그가 말했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 황자 전하께서 사령관님께 꼭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상단주는 세틴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세틴이 자리를 잡고 앉자 오골보르가 봉투에 담긴 서신을 공손하게 넘겨 주었다.
‘사랑하는 조카, 세틴에게
요즘 영원히 눈을 감을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단다.
어쩌다 정신이 맑은 날을 골라 너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몇 자 적는다.
언젠가 네게 말했듯이 나는 세틴 네가 제위에 오르는 것만이 천년 제국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고 있다.
사람들은 믿지 않지만 나는 네가 진실로 제위에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다시 말하지만 나의 마지막 소망은 네가 제위에 오르는 거란다.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너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제국의 존속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 믿기에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내가 가진 것은 이미 대부분 너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네가 황제가 되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겠지.
사실 나와 이 황자, 그리고 네 어미 조프핀을 제외하고 다른 황실의 자손들은 모두 황제 폐하의 핏줄이 아니란다.
폐하께서도 늘그막에 뒤늦게 그 사실을 아시고 충격을 받아 정신줄을 놓으신 거란다.
물론 나는 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지.
폐하께서는 조스핀을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병을 앓았는데, 그 때 이미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신체가 되었단다.
그 이후에 낳은 자식들은 모두 황비들이 황제를 속이고 낳은 자식들이지.
세상에 누가 이 기막힌 이야기를 믿을까.
당시 폐하의 진료를 맡았던 의사들 중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는 여러 군데에서 압력을 받아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그렇게 영원한 비밀로 묻힐 뻔한 일이었다.
그 의사는 누구에게도 사실을 밝히지 않았지만, 글로 상세한 정황과 함께 진료 자료들을 모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가 죽고 나서야 그것이 황제 폐하께 전해진 것이었지.
폐하께서 받으신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평생 황궁 전체가 자신을 속이고, 친자식도 아닌 자들을 자식으로 어여삐 여기며 키우게 했다는 사실에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말았단다.
이 모든 사실을 내게 전해준 사람이 바로 오골보르다.
그는 내게도 충실하지만, 원래 황제 폐하를 모시는 근신이었단다.
네가 이런 일들을 모른 채 하고, 덮고 넘어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으니까 말이다.
너무 무거운 짐을 너에게 떠넘겨 실로 미안하기는 하지만 부디 네가 감당해주었으면 한다.
현실적인 이해를 떠나서 이런 일을 모두 없던 것으로 하고 넘어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
이제 죽어가는 내가 너에게 판단과 선택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아무쪼록 현명한 결정을 바란다.
다시 한 번 어린 네게 이런 짐을 남겨 너무 미안하구나.
저승에서나마 영원히 너의 건승을 빌겠다.
못난 삼촌 일 황자 월칸 하만’
편지를 모두 읽고 난 세틴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삼 황자 이하의 모든 황자와 황녀들이 가짜 황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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