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사절
세틴군 본영에 마련된 드넓은 연병장에서는 연일 올림픽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크게는 수천 부대 단위 경기에서부터 작게는 개인별 달리기나 높이뛰기, 멀리뛰기, 창던지기까지 수십 가지 대항전이 펼쳐지고, 병사별 개인 기록은 물론, 단체 경기에 나서는 초급 간부들의 기록까지 낱낱이 쌓여감은 물론, 매일같이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나 개인들에 대한 소소한 포상이 주어졌다.
포상도 다양해서 무구나 상금, 때로는 하루 이틀의 휴식, 부대별 차등 식단 등이었다. 특히 술과 고기가 포상으로 지급되는 단체 경기가 벌어지는 날이면 축제 분위기가 따로 없을 정도로 병사들의 반응과 열정은 폭발적이었다.
포상을 설정하고 조달하고 성적을 취합하고 포상을 집행하는 일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은 난다와 완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도 이로 인해 병사들과 장교들 사이에서 나날이 높아만 가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새로운 훈련 방식은 병사들의 사기와 부대의 단결력을 높이고, 정예를 선발하는 근거 자료를 수집한다는 목적 외에, 훈련 강도를 크게 낮추지 않으면서도 치열한 전투의 긴장감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세틴과 호아니가 머리를 맞대고 고안한 것이었다.
바움 강은 강폭은 넓은 편이었으나 수심이 얕고 중간 중간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들이 많았다. 이는 도강 작전에는 꽤나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세틴은 도강 작전을 위한 특임부대에게 세 가지 임무를 맡겼다. 작은 배를 이용한 지속적인 정찰, 섬들에 순차적으로 전진 기지 건설,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놓거나 배를 연결해서 만드는 배다리 건설이었다.
3천 여 특임부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이 꿀같은 휴식과 훈련을 즐기고 있는 동안, 6 개의 섬에 전진 기지가 건설되었고, 특히 최후에 건설한 전진기지는 노스롭 강변 쪽 사람과 육성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웬일인지 협상 사절의 파견을 미루고만 있던 노스롭에서 더 이상 기다리기는 어려웠는지 세틴에게 접견을 원한다는 전언이 왔다. 세틴은 언제든지 오라는 답신을 보냈다.
노스롭의 사절이 도착하는 날, 세틴은 모든 병사들에게 씨름이나 말달리기 등 훈련이라기보다 놀이에 가까운 경기들을 펼쳐 떠들썩하게 축제 분위기를 조성토록 했다.
노스롭이 파견한 사절들이 세틴을 만나기 전에 그런 장면들을 목격한 것은 물론이었다.
노스롭의 사절단을 이끌고 온 자는 작은 키에 다부진 체구,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세틴 장군님께 인사드립니다.노스롭 후작 각하의 명을 받아 투항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러 온 보로킨 백작이라고 합니다.”
세틴은 반가운 기색으로 일어나 기꺼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황명을 받아 노스롭 반역군을 토벌하러 온 세틴입니다. 노스롭이 투항을 결심했다니 참으로 다행하고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일이 있습니다. 노스롭은 물론 휘하의 모든 귀족들은 이미 지엄하신 황명에 따라 작위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대들이 작위를 내세울 작정이라면 진정한 투항의 의사가 없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사에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부드러운 말투지만 첫 마디부터 면박을 당한 보로킨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제국과 백성의 안위를 생각해서 평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꼭 그렇게 명분과 격식을 따져야 하겠습니까 ?
나는 투항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왔습니다. 장군께서 이토록 완고한 분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솔라스경을 숭상하는 저는 완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한 병사라도 소중한 목숨이고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의 삶이 망가집니다.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하고자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야합은 결코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나의 의지를 분명히 하고자 함이지 그대를 억압하거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면서 봤겠지만, 우리 병사들도 싸움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연일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노력해 봅시다.
셔플린이 그쪽에 어떤 합의를 전했는지 모르겠지만, 섭정 대리인 그와 나는 합의문을 작성하고 서명한 바 있습니다. 그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
보로킨이 말했다.
“우리가 노스롭 반도로 물러나면 협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내가 합의문을 보지는 못했지만, 세틴 장군께서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세틴이 옆에 서 있던 호아니에게 말했다.
“군사는 합의문을 사절에게 보여 주세요.”
호아니가 품에서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보로킨에게 전달했다. 빠르게 합의문을 읽어내린 보로킨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반군에 대한 처결권이 세틴에게 있다는 대목을 제외하고는 순조롭게 협상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보로킨이 호아니에게 합의문을 돌려준 후 말했다.
“제가 섭정 대리에게 들은 내용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부디 장군께서 백성을 생각하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좋은 결과는 내주시기 바랍니다.”
세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물론 그래야지요. 혹시 이번 반란에 가담했던 남서부 귀족들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들었습니까 ?”
보로킨이 다소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작위 계승권과 군사권을 박탈당했다지요.”
“작위를 유지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남서부 영주들이 노스롭 토벌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면 만회할 기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노스롭의 반역이 반도의 백성 모두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노스롭의 황실에 대한 사적인 원한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황실과 조정이 약해진 틈을 타서 가문의 원한을 풀고 개인의 영달을 꾀하려고 반도인 전체를 죄인으로 만든 셈이지요.”
보로킨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반발했다.
“장군의 말씀은 우리들 내부의 분열을 노리는 듯한데 우리 노스롭 반도의 영주들은 모두 한마음 한 뜻입니다. 협상에 임할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발언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세틴이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들렸습니까 ? 그쪽 영주들이 분열을 하든 합심하든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 말은 죄지은 사람을 최소로 줄이고 황실의 자비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최대로 늘리고자 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하자면 반도인 전체가 반역을 저질렀으니 누구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 그대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반역을 계속하겠다면 협상의 여지도 없습니다.”
말문이 막힌 보로킨이 같이 온 사절단을 둘러보며 누군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누구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보로킨이 물었다.
“장군께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우리가 투항을 한다면 어떤 처결을 내리시겠습니까 ?”
세틴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노스롭과 휘하의 영주들, 반도의 기타 5 영주가 모두 스스로 몸을 결박하고 내 앞에 무릎끓어 투항해야 합니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무조건 항복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까 ?”
세틴이 약간 뜸을 들이다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토벌군의 수장인 내게 투항한 자들에 대한 처결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이오. 비록 투항했다 하더라도 즉결에 처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투항한 적장을 죽일 만큼 야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적어도 목숨을 보장하겠습니다.
작위를 복원해주는 것은 나의 권한이 아니니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현재는 폐하께서 유고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니 그에 대한 권한은 오직 섭정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들이 투항한다고 해서 토벌군의 임무가 완료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토벌군의 수장으로서 노스롭 반도 끝까지 접수를 완료하고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살핀 이후에나 구 영주들과 반란군에 대한 처결을 조정에 상신할 것입니다.
반란에 가담한 모든 장수와 병사들은 포로로 간주할 것이오.”
보로킨이 쌍욕이라도 내뱉을 것처럼 격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그런......”
세틴은 여전히 느긋했다.
“내 말에 무슨 하자라도 있소 ? 제국의 천 년 역사에서 황실에 반기를 들었던 자들에게 이보다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경우가 있다면 한 번 말해 보시오.”
보로킨은 여전히 격앙된 목소리였다.
“말은 번드르르 하지만 결국 장군은 애초에 협상을 할 생각이 없었다는 말씀 아닙니까 ? 당장 목숨만은 살려두겠다는 말로 노스롭 반도를 날로 먹겠다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세틴의 표정과 말은 여전히 차분하기만 했다.
“나는 솔직하고 강단 있는 사람을 좋아 합니다. 다소 원색적이기는 하나 그대의 말을 타박하지는 않겠소.
반대로 내가 묻겠습니다. 날로 먹지 않으면 반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충분히 익히고 칼로 썰어서 먹어야겠습니까 ? 쓸데없는 입씨름이나 감정싸움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스롭은 어떤 협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 얘기나 들어 봅시다.”
보로킨이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저는 협상에 대한 전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장군의 입장을 전달하는 역할일 뿐입니다. 하지만 장군의 생각을 그대로 전한다면 협상이 성사될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노스롭 반도로 후퇴하는 것으로 원상 회복을 위한 조건을 충족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상태로 반란이 끝난 것으로 치고 토벌군을 물려라 ?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구려.
셔플린이 왜 정식 사절도 아닌 섭정의 개인 밀사로 왔는지 생각이나 해보셨소 ? 적당히 노스롭을 용서해 줄 명분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오.
그대들이 보기에 나는 새파란 애송이겠지만, 노스롭은 천년 제국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애초에 그러니까 그리 쉽게 반란을 일으켰겠지요.”
세틴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오늘 내가 한 말을 곰곰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 못지 않게 백성의 안위와 평화를 바랍니다. 이 전쟁이 계속된다 해도 세틴군이 노스롭의 백성들에게 약탈을 자행하거나 함부로 부수고 불태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정확히 죄 지은 자를 처단하고 죄를 덜 짓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내 마음이 노스롭의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습니다. 이제 돌아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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