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제국의 황자들
골트릿이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보자면 네 말대로 모그란데가 3황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제일 높기는 하지.
오디어스가 모그란데에게 원한이 작지 않겠지만, 그의 지지를 받는 것 말고 따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도 서로 잘 알고 있을 거야.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기는 할 테지만 오디어스의 행보는 너와의 관계에 따라 크게 달라질 거다.
너를 협력자로 생각한다면 모그란데와의 관계를 엎을 수도 있겠지만, 너를 경쟁자로 생각한다면 싫어도 모그란데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을 거야.
모그란데의 입장에서도 네가 오디어스와 가깝다고 생각하면 다른 황태자를 생각하게 될 수도 있지.
내일 오디어스를 방문한다고 들었다.
오디어스의 주변에는 모그란데의 사람들이 득실거릴 거야.
네가 잘 알아서 처신하리라 믿기는 한다만, 오디어스는 너에게 ‘외숙부들의 일이므로 중립을 지킨다’는 원론적인 얘기에 만족하지 않을 거야.”
세틴이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저는 3황자님이 황태자가 되는 편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숙부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골트릿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디어스가 처신이 모나지는 않으나 사실 내심은 몹시 편협하고 인재와 대국을 보는 눈이 썩 좋지도 않아.
솔직히 제국을 이끌어 갈 황제감은 아니라고 봐야지.
주변에 좋은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 가장 큰 흠이야.
상당 기간 겉으로나마 정국을 주도하면서 많이 신중해지고, 지나치게 무리를 하지 않는 면이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거다.
5, 6 황자는 둘 다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어.”
세틴이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할 겁니다.
모그란데는 제가 어떤 황자하고든 가까워지는 것을 가만 보고 있을 않을 테죠.
제가 숙부님하고 거리를 둬야 오히려 숙부님의 운신의 폭이 넓어질 겁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골트릿이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세틴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진 게 별로 없어 너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구나.
너도 몸 조심하고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지 연락 주거라.”
이튿날 단신으로 방문한 세틴에게 오디어스는 유난히 까다롭게 굴었다.
몸검사까지 하지는 않았으나, 입구에서부터 하지도 않은 무장 해제를 요구하고, 단단히 무장한 기사 둘을 붙여서 접견실까지 안내 아닌 감시를 하는 모양새였다.
오디어스는 접견실의 상석에 앉은 채로 세틴을 맞았다.
존장을 대하는 예를 다하는 세틴에게 던지듯 말했다.
“왔느냐. 거기 앉거라.”
세틴은 무덤덤한 태도로 아래쪽에 놓인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황자들을 순서대로 방문해서 인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제 제국군 사령관이 되었으니 내가 네 눈치를 살펴야 될 지도 모르겠구나.
이제 막 연금에서 풀려나서 너에게 줄 선물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이해하렴.”
세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황태자로 등극하실 숙부님인데 제가 숙부님께 잘 보여야죠.
황도의 백성 모두가 황자님들이 연금에서 풀려나신 것을 같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제가 황태자 옹립에 중립을 지키겠다고는 했으나, 내심 3황자 말고는 황태자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디어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
난 황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다.
나도 이제 지쳤어.
어디 조용한 곳에 숨어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 뿐이야.
네가 어디 가서 내가 황태자감이란 소리를 하고 다니면 그게 바로 나를 죽이는 짓이란 걸 모른단 말이냐 ?”
세틴은 여전히 담담했다.
“제가 그런 말을 떠벌이고 다닐 일은 없습니다.
그저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지금 상황에서 정국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만한 역량이 있는 분은 유일합니다.”
오디어스가 질색을 했다.
“그만, 그만.
황태자 소리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구나.
제국군을 재건하는 일은 잘 되어 가느냐 ?
그래도 내가 명색이 외숙부인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세틴이 말했다.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아 일일이 말씀드리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제국군이 제 사병도 아닌데 어찌 사사로이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앞으로 조정에서 많이 도와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일단 모그란데 공작이 장수들의 급여와 병사들의 식량은 책임져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디어스가 심술궂은 표정이 되었다.
“모그란데가 그랬다고 ?
언제까지 황실과 조정의 자금을 제 쌈짓돈처럼 생각하는지 지켜볼 일이군.
내가 그꼴을 계속 보고 있느니 차라리 짐싸서 시골 구석에 쳐박히고 말지.”
오디어스는 세틴과 밀담을 나누지도 않았고 접견실에서 가신과 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틴을 맞았다.
사실상 세틴과의 대화를 빌어서 모그란데에게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하는 셈이었다.
세틴이 계속해서 장단을 맞춰주었다.
“저는 사실 3황자께서 저를 옴비두스와 상대할 전권대사로 임명해주신 일도 그렇고, 백작위를 내려주신 일도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디어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가 조카를 너무 과대평가했나 ?
그때 일들은 모두 모그란데가 하잔대로 따랐던 것 뿐이야.
그걸 아직까지 몰랐다니......
앞으로는 내가 그런 식으로 널 괴롭힐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그렇다고 널 밀어주겠다는 뜻도 아니니 오해는 말고.”
세틴이 말했다.
“그렇군요.
저도 사적인 인연으로 청탁이나 하는 짓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제 막 연금이 풀려 처리할 일도 많으실 텐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세틴은 딱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왔다.
오디어스와의 대화는 무척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더 피곤할 4황자와의 만남을 위해서라도 힘을 아끼고 싶었다.
4황자 파이란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세틴이 나선다면 자신이 황태자가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애초에 세틴의 생각은 들어볼 생각도 없는 듯,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다.
황도의 여론이 모그란데에게서 등을 돌린 지 오래이니, 세틴이 자신과 가리온 후작을 도와준다면 모그란데를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한 대세가 그렇게 기울면 5, 6 황자도 자기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거라 열변을 토했다.
세틴에게 수많은 지원을 약속했고, 심지어 나중에 왕위를 주어 준독립적인 왕국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광설에 장밋빛 꿈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세틴이 물었다.
“4황자님, 제가 모그란데가 무서워서 그의 바짓가랑이에 기어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파이란은 세틴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는 듯 멀뚱거렸다.
“아, 아니. 내가 조카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
그만큼 높이 평가하니까 이런 소리도 하는 것 아닌가.”
세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를 무시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숙부께서는 모그란데만 제거하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리온 후작이 제 2의 모그란데가 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
황실이 굳건하지 못하고 힘 있는 귀족들의 수작에 계속 휘둘리는 상황이 반복될 뿐입니다.
저는 가리온 후작을 잘 모릅니다.
숙부께서 그를 얼마나 믿고 계신지는 모르나, 결코 가리온의 힘이 숙부의 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미 귀족들이 발호하여 황실을 무력화해 버린 지금의 상황은 누가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들은 얘기는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숙부께서 가리온 후작을 온전히 장악해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 때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이토록 간단하게 부정당할 줄 모르고 희망에 부풀어 있던 파이란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너져내렸다.
꿈에 부풀어 있기는 5황자 트리엄도 마찬가지였다.
전임 제국군 사령관이었던 질롱 돈프로스트와 근위대, 경비대에 의지하던 그는 사실상 세력이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그는 당장 자신이 황태자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제국군과 황궁 근위대, 수도 경비대는 다시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세틴이 자신의 구원자가 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트리엄을 보며 세틴은 실로 난감한 심정이었다.
황궁에서 나고 자란 데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게으르고 무술과 사냥에만 빠져 살았던 트리엄의 세계는 너무 좁았다.
세틴은 트리엄을 좋은 말로 달래주었다.
우선 세상을 좀 배우라는 뜻으로 골트릿이 많이 외로워하시니 자주 찾아 뵈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나, 트리엄이 그 말을 알아들었을지는 미지수였다.
6황자 맬덤 하만과 만나는 자리에는 설리반 후작이 동석하고 있었다.
맬덤의 장인이라는 관계로 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으나, 황도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는 세틴의 행보, 황자들을 만나는 자리에 끼어든 것은 대담한 짓이었다.
제국 제일의 부자가 가지는 여유와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맬덤은 황태자 자리에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자신은 그럴 능력도 안되고 정치적 소용돌이를 정면으로 맞서서 뚫고 나갈 자신감도 없다 했다.
황태자가 되려면 우선 모그란데와 손을 잡아야 하고, 적어도 당분간은 그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은 단 하루도 그런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설리반은 세틴이 모그란데와 일단 타협을 본 데 대해 높이 평가하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한 황태자 옹립 문제에서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한 점에 대해서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한쪽 편에 서는 일은 없겠지만, 가능하면 세틴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세틴은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 황실과 조정의 일들이 공명정대하고 명분에 입각해서 처리되야 함을 강조했다.
굳이 누구의 편인가를 따지기보다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공을 다투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눈치 빠른 설리반이었으나 세틴이 새삼스레 정론을 강조하는 뜻을 바로 알아차리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세틴은 그에 대해 더 많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때가 되면 설리반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었다.
세틴이 또 한 가지 설리반에게 부탁을 했다.
일황자가 최근 곤란한 일이 있으니 재산을 처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오골보르 상단에서 30만 골드 정도의 유물을 구입할 것을 부탁하자 설리반은 흔쾌히 수락했다.
크게 손해보는 일도 아니었고 일황자를 언급했지만 그것이 곧 세틴을 위하는 일임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의 관계야말로 설리반이 가장 원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황자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일을 모두 마치자 세틴이 느끼는 정신적인 피로감은 무척이나 컸다.
성과라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으나 말 한 마디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질 어려움 만남이었다.
하지만 당장 확보한 40만 골드라는 자금으로 자신감은 배가되었다.
군상 체계의 구축과 무구 개발에 박차를 가할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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