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링 전선
그날 밤, 세틴은 시오미와 긴 통신을 했다,
우살리드는 여전히 제국군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북부군에서는 다수의 영주들이 일단 한 번 붙어보자고 연일 베그던 백작을 조르고 있었다.
제국군의 도발에 우살리드군이 참지 못하고 출진할 때까지 기다려 보고, 교전의 결과가 나오면 그 이후에 전술을 정해서 결전을 벌이자는 베그던의 주장을 영주들은 겁쟁이라고 비웃고 있었다.
세틴은 시오미에게 동부왕국과의 연계에 대한 기미가 있는지를 물었으나, 시오미는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옴비두스보다 시오미를 선택한 그녀의 사형들이 마법 병단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만약에 모그란데의 반역 의도가 보이는 즉시 군을 이탈하기로 이미 얘기가 충분히 되어 있다고 했다.
우살리드가 진지를 구축한 곳은 페링이라는 지역이었다.
페링은 하랑가 고원과 제국 동부와 북동부를 가르는 자군드라 강 사이가 가장 좁혀지는 지역이었고, 남서쪽을 향해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고 있어서 방어에 상당히 유리했다.
우살리드의 진지가 페링 전지역을 완전히 봉쇄하는 형태는 아니었으나. 자군드라 강을 통해 대군을 후면으로 이동시키지 않는 한, 우회하기는 어려웠다.
시오미의 말에 따르면 제국군과 북부군은 군영의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했다.
7 만 여 명이 집결한 북부군은 황도 북부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군기가 엉망이고, 영지군들 사이에 다툼이나, 도둑질, 심지어 도박까지 성행할 정도였다.
심지어 군상들이 마련한 집창촌까지 성업할 정도라니 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오미는 야전 생활이 힘들지는 않고 ?’
‘장교 이상은 지내는 막사나 음식 등 모두 특혜를 받으니 힘들 건 없는데, 여자가 거의 없다 보니 여성을 위한 배려가 게 전혀 없는 게 조금 불편할 뿐이야.
승상의 양녀라는 신분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접근하지도 못하니 딱히 신경쓸 일도 별로 없어.
베그던 백작이 가끔 세틴과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 정도야.
그는 세틴을 굉장히 좋게 본 거 같더라.
세틴과 나눈 이야기를 상세히 밝히지는 않는데 꽤나 믿고 있는 눈치였어.’
‘나중에 북부군에서 몸을 뺄 일이 생기면 베그던에게는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는 봐.
그도 입장이 있으니 어떨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 역적의 멍에를 뒤집어 쓰면서까지 북부군에 남아 있으려 하지는 않을 사람으로 보았어.
차후 북부의 재건을 위해서도 그런 사람은 꼭 필요할 거야.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설득은 해 봐.
적어도 모그란데에게 고자질을 할 사람은 아닐 거야.’
‘미리 얘기를 해보면 안되겠지 ?’
‘그건 좀 곤란하지.’
장거리 마법 통신은 꽤 많은 마나와 체력을 잡아먹는 일이었다.
세틴은 더 버틸 수 있다 해도 시오미를 생각해서 그 정도에서 통신을 마무리했다.
세틴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두 가지 조치를 해두었다.
하나는 멀린에게 직접 출정할 준비를 갖추라는 것이었다.
세틴이 브라스트에서 데려온 병력이 워낙 적어서 대공령과 6 백작령에서 총력을 기울이면 10 만 대군도 가능했다.
당장 광범위한 징병을 하기보다는 핵심 전력과 지휘부를 구성하고 언제든지 출병할 수 있다는 선언은 해두도록 했다.
다른 하나는 노스롭, 남서부, 서부에서 각각 총독이나 요새 사령관을 맡고 있는 바드랑 숄츠, 베르토프, 하푼 페드로에게도 유사시 출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한편 놀란에게는 수군과 전선 확보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다.
세틴의 이런 조치는 갈리온이 황도를 향해 진격하는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다.
세틴이 황도를 비우더라도 최소한의 수비 병력을 남겨 두어 방어전을 치를 생각이었다.
만약의 경우 황도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세틴과 제국군이 곧바로 귀경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멀린과 총독들로 하여금 황도를 구원하게 할 계획이었다.
애초에 세틴의 영향력 하에 있는 서부의 지역들에서 차출한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고, 각 지역에서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면서 대기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병력을 모두 동원한다면 최대 30만 이상도 가능한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사시 브라스트 등의 군대가 일제히 황도를 구원하기 위해 나선다는 사실을 널리 공표하는 것으로 갈리온이 감히 황도를 넘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세틴이 서부 지역들에 소집령을 내렸다는 소식은 곧바로 조정에서 큰 논란 거리가 되었다.
오디어스도 크게 놀라 어전 회의를 소집했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기도 전에 오디어스가 세틴을 추궁했다.
“브라스트 등의 지역에 세틴 사령관이 소집령을 내렸다는 말이 정녕 사실인가 ?
사실이라면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병력은 얼마나 되는지 소상히 밝히라.”
세틴이 정중하게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집령이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내린 조치일 뿐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당장 병력을 끌어 올리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병력은 최대로 잡을 경우 30 만이 조금 넘을 것입니다.”
모그란데가 비웃듯이 말했다.
“사령관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만.
그동안 입만 열면 제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오더니, 뭐 ? 30 만 ?
제국의 제일 큰 도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려.
이건 당장 사령관을 해임하고 잡아 넣어야 할 사안이오.”
오디어스가 급히 태세를 전환했다.
“승상은 무슨 말을 그리 험하게 하시오.
당장 병력을 불러 올리겠다는 게 아니라지 않소.
적어도 애초에 마음대로 대군을 이끌고 황도를 장악해서 스스로 섭정에 오른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오.
일단 세틴 사령관의 얘기를 좀더 소상히 들어봅시다.”
세틴이 말했다.
“제가 힘으로 황도를 장악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제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올라올 때, 많은 병력을 끌고 왔을 것입니다.
노스롭 토벌을 끝냈을 당시, 제국군은 이미 10 만을 넘겼습니다.
저는 그 병력조차 병사들의 자원에 따라 대부분 해산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내린 소집령은 말 그대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만약의 사태라 함은 황도가 반역도들의 손에 장악될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황태자 전하와 조정에서 반대하는 상황에서 실제 소집을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모그란데가 여전히 딴지를 걸었다.
“그런 말을 누가 곧이 곧대로 믿는단 말인가 ?
언제든지 30 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으니 찍소리 말고 숨죽이고 있으라는 협박이나 다름 없지.
나는 인정할 수 없네.
즉각 소집령을 취소하게.
그렇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북부군을 다시 불러들이지 말란 법도 없지.
황도를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
6 황자 맬덤이 발끈했다.
“아니, 승상은 왜 그리 감정적으로 나오시오소 ?
군사를 부리는 일이 무슨 애들 장난이라도 되오 ?
우살리드를 치겠다고 부득부득 우겨 출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불러 들인다고 ?
세틴이 병력을 당장 불러 올린다는 것도 아니고, 조정이 반대하면 절대 그럴 일 없다고 다짐까지 하는데 왜 혼자 흥분하는지 모르겠군.
갈수록 언사에 벽이 없어지니 제국의 승상이라는 사람이 그리 가벼워서야 원......”
병부 대신이 모그란데를 지원하고 나섰다..
“제국 전반의 군사를 움직이는 권한이 제국군 사령관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나, 병부와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사령관께서 이번 일은 너무 독단으로 처리하셨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그란데를 일별하고 단호히 말했다.
“병부에서 절차상의 문제를 들고 나오니 제가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각 지역에서 병력을 마련하고 유사시에 대비하는 일은 원래 제국의 일반적인 방침에 따르는 게 아니라 독자적인 권한입니다.
제국군이나 병부에서도 일일이 간섭할 수 없는 사안이지요.
둘째, 제국군이 병부와 상의해야 할 일은 전국에서 병력을 동원할 때, 그 타당성과 예산을 협의하기 위함입니다.
각 지역과 영주들이 황실과 조정이 위급에 처했을 때, 이를 구조하는 것은 가장 일차적인 임무이자 책임이기 때문에 당장 병부와 협의할 내용이 없습니다.
셋째, 제가 소집령을 내리지 않았으면 서부의 각 지역들에서 군사적인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
제가 이번에 이를 공표하는 것은 새롭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고자 함이 아니라 천하의 영주들에게 명백한 지침을 주기 위함입니다.
황도가 외적의 위협에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는데 사사로이 군을 동원하여 진격하는 일을 막기 위함입니다.
두 번 다시 자의로 병력을 끌고 황도로 진격하는 영주가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모그란데조차 세틴의 명쾌한 설명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벌인 일을 본따 너도 나도 황도를 무력을 장악하려는 자들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오디어스는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내가 처음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조카를 의심하고 말았네.
그렇게 깊은 뜻이 있을 줄이야.
외삼촌이 너무 속이 좁다고 비웃지나 말아 주게.
한편으로 생각하면 30 만이 넘는 대군이 언제라도 황도를 지켜 줄거라 생각하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든든하기는 하구만. 하하하.”
조정에서 이 정도로 공론화를 해놨으니 효과는 분명 있을 터였다.
이제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황도로 진격하고자 할 때는 반역이라는 오명을 감수할 자신이 있어야 했다.
세틴은 적어도 갈리온이 모그란데를 흉내 내어 황도를 불시에 장악하려는 시도는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머지 않아 세틴 자신이 황도를 비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예상을 전제로 대비책을 마련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모그란데가 어떤 이유로든 직접 출전하겠다는 의사를 점점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고, 세틴이 생각하기에 모그란데의 출전은 곧바로 정국의 카다란 변화를 의미할 것이었다.
현재 제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군사력들이 북동부로 집결하게 되는 상황에서 세틴이 출전하게 된다면 황도가 무주공산이 되었다고 판단할 세력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아직까지 갈리온은 정국의 주도권을 스스로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갈리온이 계속 순순히 주저앉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가장 부유하고 넓은 남부의 맹주로서 갈리온이 언젠가는 이빨을 드러낼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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