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사람은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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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 고것은 내가 데려온 하녀 중에서 제일 어려서 안타까운 마음에 결혼까지 시켜주고 재산도 넉넉하게 마련해 주었건만 뭐가 부족해서 그런 짓을 했는지 원......”
조스핀이 분을 참지 못하고 부들거렸다,
“친위대의 조사보고서를 다 읽어 보셨어요 ?”
세틴이 물었다.
“아니야. 치가 떨려서 조금 보다 말았어. 그러게 너는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에 나한테 말했어야지. 아랫것들은 처음부터 단단히 잡지 않으면 언제든지 기어오른다니까.”
원래 세상의 무섭고 더러운 일들은 듣는 것조차 싫어하는 조스핀이었다. 세틴의 사람들이 벌여온 온갖 비리와 치졸한 수작들이 가득한 보고서를 제대로 읽었을 리 없었다. 보고서에는 명시적으로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들이 세틴에게 가스라이팅을 오랫동안 시도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조스핀은 그들을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정리를 하기로 마음을 굳힌 거야 ?”
“네, 그래야죠. 끼고 있어 봐도 도움이 될 자들이 아닌 걸요,”
“하지만 아랫것들을 내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사실 그대로 까발리고 내쫓거나 벌을 주더라도 이제 막 성인이 된 네 평판도 같이 떨어져.”
세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도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더라구요. 이럴 때 저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어머니 말고 누가 있겠어요 ?”
“흥, 필요한 게 있을 때만 엄마를 찾지 ?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니 ?”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어머니 말고는 이 일을 해결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겠드라구요. 사람을 내치는 것도 새 사람을 들이는 것도 다 도와주셔야 해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뜸들이지 말고, 우리 막내가 생각한 묘안이 도대체 뭔데 ?”
“어머니께서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시는 일이 무엇이더라......”
“그야 젊고 예쁜 아이들을 짝지워 주는 거지. 아 ! 그러니까 그 자들을 각각 결혼시킨다는 명분으로 내보내자는 거야 ? 셀리야 뭐 원래 내 하녀니까 제깟 게 죽으라면 죽는 거지. 좋은데 ?”
“대공비 전하의 주선과 명령으로 하는 결혼은 본인들에게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니 거부할 명분이 있을 리 없고, 시녀들이 마치 공자들의 성노리개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성인이 되면서 시동과 시녀들을 짝지워 내보내주면 대공가에 대한 평판도 좋아지리라 생각해요.”
조스핀은 좋아라 박수까지 치면서 세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새 사람들은 어쩔 셈이야 ?”
“이제 저도 어른이니 유모도 시동, 시녀도 필요하지는 않죠. 일상 기거를 시중드는 일이야 기존의 하인들로 충분해요. 가능하면 제 앞길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좀 있으면 좋겠는데......”
“좋아. 우리 막내가 성인이 되더니 철이 단단히 들었네 ? 하지만 혼인을 하지 전까지는 세심한 여인의 손길이 필요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야. 유모를 대신할 사람은 딱 이 사람이다 하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하네. 바네사는 어때 ?”
“바네사라면...... 아, 그 딱딱한 시녀장 말이죠 ?”
“맞아. 대공비궁에서 제일 똑똑한 시녀장이지. 벌써부터 장래의 대시녀장 감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어.”
“저한테도 몇 번 심부름을 왔었는데 바네사가 오면 우리 아이들이 바짝 긴장하곤 했던 기억이 있네요. 혹시 너무 꼬장꼬장하게 따지고 드는 게 귀찮아서 저한테 보내버리려는 건 아니죠 ?”
“아냐, 아냐. 바네사가 정치적 역학관계니 위신과 영향력이니 너무 어려운 말들을 많이 해대서 성가신 건 사실이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막내한테 도움도 안될 사람을 추천하겠니 ? 괜찮을 거야. 그리고 다른 시녀 둘은 바네사에게 맡기면 어련히 알아서 예쁜 애들로 골라줄 거야.”
세틴은 바네사라는 시녀장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브라스트 궁내의 모든 시녀들을 파악하고 있는 조스핀의 추천이라면 믿어야 했다. 조스핀이 나이답게 않게 철이 좀 없어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영민한 사람이었다. 세틴에게 해가 되거나 걸림돌이 될 사람을 보낼리 만무했다.
“알겠습니다. 바네사는 그렇게 하고요. 다른 시녀들은 예쁜 건 상관없어요. 원래 시동과 시녀들을 둔 이유가 형제나 친구처럼 함께 성장하고 평생 의지할 사람들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잖아요. 그리고 저는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건 관심 없습니다. 단지 제게 살아가는데 진실로 도움이 될 사람이면 좋겠어요. 여자는 언젠가 꼭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조스핀은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세틴을 바라보았다.
“귀족가의 여식들이 꼭 마음에 들어할 만한 소리를 하는구나. 오롯히 자신만을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는 것이 모든 소녀들의 꿈이지.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단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정략에 팔려갈 운명에서 벗어나긴 힘들지. 네 뜻을 잘 알았으니 바네사에게 좋은 아이들을 골라보라고 해두마. 그녀 성격에 여성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석같은 시녀들을 고르지나 않을지 걱정 되는구나 하하. 지금 있는 아이들이 정리되기 전에라도 바네사가 널 찾아갈 거야.”
“네 잘 부탁드려요 어머니. 시동을 대신할 사람들은 아버지께 말씀드려 볼 게요. 대공께서 허락하시고 본인들이 응한다면 아카데미에서 같이 수학한 친구들 중에서 구해도 좋을 거에요.”
“아카데미라면 브라스트 가문의 아이들이잖아. 시동을 하려고 할까 ?”
조스핀은 여전히 세틴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시동이라기보다 호위나 참모 격으로 봐야 하고,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친구들은 제가 설득할 수 있을 거에요. 어머니 막내 아들이 친구들 사이에 나름 인기도 있고 마음을 나눌 만한 녀석들도 꽤 많답니다. 문제는 대공께서 허락을 해주실지에요. 자칫 가문 내에서 패거리를 만드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어서요.”
조스핀이 이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세틴이 원한다니 꼭 이루어주고 싶었다.
“음...... 내 생각에는 말이다. 일을 좀 크게 벌여야 할 듯 하구나. 네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예 궁 내에서 서로 눈이 맞은 시동 시녀들을 한꺼번에 결혼시켜야겠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판이 벌어지면 너의 호위 둘을 새로 임명하는 정도는 그냥 묻혀갈 수 있을 거야. 어떠냐, 내 생각이 ?”
세틴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대찬성이에요. 역시 어머니는 대단하세요. 그렇게 하면 제 사람들을 콕 찝어서 내친다는 느낌도 전혀 없을 테고, 대공비와 대공가의 평판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세틴이 연신 엄지척을 해가며 추켜세워주자, 조스핀은 칭찬받은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벌써부터 일을 어떻게 벌일지 머리를 굴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이 바로 세틴이 조스핀과의 만남에서 이루고자 하는 결론이었다.
궁내에 대공비가 마음이 맞는 시동 시녀들을 결혼시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세틴은 자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자애로운 대공비께서 이번에 아주 좋은 일을 벌이실 생각인가 봐. 원하는 사람들은 결혼해서 나가는 조건으로 시동, 시녀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기로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
소문은 이미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으나, 딱히 맘에 둔 사람도 없고 궁을 나가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던 존 등은 세틴이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 생각한 셀리가 장단을 맞춰주었다.
“대공비께서는 그 나이를 먹고서도 꿈많은 소녀같은 데가 있으세요. 제가 대공비 밑에 있을 때도 어린 게 고생이 많다고 얼마나 위해 주셨는데요. 제가 늦둥이를 낳고 애가 잘못 돼서 몸져 누웠을 때도 마침 대공비도 세틴 도련님을 낳자 바로 절 유모로 불러 주셨지요. 제가 그 은혜를 잊으면 사람도 아니지요.”
세틴이 자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고 넘겨 짚고 나오는 말이 결국은 대공비와 자신의 인연이 보통이 아님을 강조하고, 세틴과도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은연중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렇지. 은혜를 잊으면 사람도 아니지.”
세틴은 말을 끊고 한 명씩 눈을 맞추고서야 말을 이어갔다.
“그동안 그대들이 내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반성은 많이 한 것으로 보여. 그래서 십여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돌봐 준 정을 생각해서 그냥 묻고 넘어갈까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대공비 전하께서는 내 시동과 시녀 둘을 꼭 맺어주고 싶어 하시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 거부를 하고 내 곁에 꼭 남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아. 모처럼 대공비께서 하시는 일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날벼락을 맞은 시동, 시녀들이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이 모종의 결정이 내려진 사실을 직감한 셀리가 말했다.
“저, 저는요 ?”
“유모는 돌아갈 집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설마 이번 기회에 새로운 배필이 필요한 거야 ?”
이번에는 평소에 가장 과묵한 마크가 물었다.
“변경될 가능성이 없는 얘기입니까 ?”
“대공비 전하께서 준비한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13 공자의 시동, 시녀들이 짝을 이루는 거야. 너희끼리 의논해서 누가 누구하고 결혼을 할지 정하도록 해. 오래 같이 살다시피 했으니 서로 잘 알 것 아냐. 내가 시녀들에게 흔한 손장난 한 번 쳐본 적이 없는 건 너희들이 더 잘 알 거야. 세간의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먹다 버리는’ 게 아니란 거지. 며칠 안에 궁내부에서 연락이 올 거야. 서로 짝을 잘 맞춰 보도록 !”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는 마크, 존, 나티, 메기는 누구를 고를지 생각하기보다 갑작스레 바뀌어버린 자신의 운명 앞에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참, 결혼식 비용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애로운 대공비께서 설마하니 그대들에게 비용을 부담하게 하지는 않으실 거야. 하지만 살 집과 가재도구까지 마련해주기는 힘드실 테니 각자 집안에 연락해서 잘 준비하도록 해. 나한테 뭘 기대하지는 마. 누군가 하도 알뜰하게 해먹어서 난 모아놓은 돈이 전혀 없다고.”
졸업 기념 선물로 들어온 것만 해도 두 집 아니라 열 집 살림을 장만하고도 남을 세틴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이것으로 세틴과 그들의 인연은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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