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를 하려면 티끌도 남기지 말아야지
황궁 전체는 제국군에 완전히 장악되어 황태자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자신의 숙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연금상태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오골보르와 토머스가 이끄는 조사단이 이미 이번 거사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내관들의 숙소와 사무 공간에 대한 수색에 들어갔다.
세틴은 울브린과 배커가 이끄는 2 천 정예병을 이끌고 황제의 처소로 향했다.
이미 비언차이가 이끄는 결사대가 근위대의 방어망을 뚫고 제 이 관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에 근위대 숙소 앞마당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는 내관들을 신속하게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세틴은 배커가 이끄는 병력 1 천에게는 황제의 처소 전체를 물샐 틈 없이 포위하도록 했으며, 나머지 1 천 병력을 이끌고 제 일 관문으로 향했다.
내관들은 앞 마당에서의 전투가 치열한 만큼 일 관문을 지킬 병력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세틴이 도착했을 때, 관문의 담벼락 위에서 외부를 경계하거나 화살 공격을 해오는 병력조차 없을 정도였다.
안에서는 그나마 대문이라도 사수하려고 단단히 지키고 있을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세틴이 슬쩍 대문을 밀었다 강하게 잡아당기자 양쪽 대문 전체가 바깥 쪽으로 넘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근위대가 이미 모종의 조치를 취해 두고, 세틴에게 대문을 해제할 방법을 알려준 것이었다.
대문이 넘어가자 안쪽는 소스라치게 놀란 내관들 열 댓 명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세틴은 이날 밤에 손을 핏물에 담그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손속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순식간의 두 내관의 목이 세틴의 검에 달아나고 나머지는 미처 도망치지도 못하고 제압되고 말았다.
앞마당의 전투 상황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초반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고, 숨어 있던 근위대들의 기습 공격에 많은 내관들이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방어하는 근위대에 비해 내관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원래 황제의 처소에 상주하는 근위대는 백 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행여라도 내관들이 무슨 눈치라도 챌까 싶어 병력을 전혀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근위대가 4 명, 혹은 8 명 단위로 방어진을 치고, 내관들이 그들을 포위 공격하는 형태로 전투가 이루어졌다.
초반에도 많이 당했고, 마음이 급한 내관들이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단단히 진형을 사수하면서 버티는 근위대에 내관들이 희생이 갈수록 늘어가는 양상이었다.
세틴은 먼저 2 백 여 병사들에게 커다란 횃불을 붙여 치켜들도록 하고 앞마당을 포위하는 형태로 분산시켰다.
어느새 일, 이 관문 사이 근위대 숙소 앞마당 전체가 밝아졌다.
물론 횃불이 그리 멀리까지 비치지는 않기에 앞마당의 전모를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지는 않았으나, 그리 밝지 않은 달빛에만 의존하고 있던 내관들의 눈에는 그것이 완전 무장한 병사들이 자신들을 포위한 것보다 훨씬 큰 충격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세틴이 오러를 한껏 끌어올려 소리쳤다.
“나는 제국군 사령관이자 폐하의 외손주인 세틴이다.
이곳은 물론 황궁 전체는 이미 제국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고, 쥐새끼 하나 빠져 나갈 틈도 없이 포위되었다.
내 오늘 밤에는 손끝 하나, 눈빛 하나라도 반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저승으로 보내 버리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살 수 있는 기회는 주겠다.
살고자 하는 자는 무기를 버리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고개조차 쳐들지 말라.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자는 물론 우리 병사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는 자는 주저없이 주살하겠다.
더러운 목숨이나마 보존하고 싶다면 내 말을 따르라.
지금부터 셋을 세고 곧바로 공격에 들어가겠다.
잊지 말라.
눈만 마주쳐도 죽는다.
하나.
둘.
셋.
제국군 정예병들은 듣거라.
내 말을 잘 들었겠지.
눈만 마주쳐도 결코 숨을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즉시 공격 !!!”
세틴이 들어서고 횃불을 밝힌 병사들이 둘러싸는 순간, 이미 내관들과 근위대의 전투는 멈춰 있었다.
근위대는 사전에 지침이라도 받은 것인지 공격을 멈춘 내관들을 공격하지 않고 각자 자리를 사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2 관문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만은 누구도 통과시킬 수 없다는 듯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 넓은 앞마당에 있는 내관들 중 세틴의 말을 듣지 못한 자는 없었다.
진작부터 자신들의 거사가 거의 실패할 것을 예감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들도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어차피 살아날 길이 없을 바에야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각오가 있었고, 비언차이가 안으로 진입해서 황제를 시해하는 일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오디어스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할 것이라는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방어에 치중하고 있는 근위대를 향해 나름대로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는데, 제국군 사령관 세틴이 병력을 이끌고 이미 이곳까지 왔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내관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가 갑자기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 항복한다는 태세 전환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관들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는 근위대보다 새롭게 쳐들어오는 제국군이 무서웠고, 세틴의 말도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여기 저기서 제국군을 향해 칼을 치켜드는 자들이 나타나자, 항복할 때 하더라도 한 번 붙어보기라도 하자는 군중심리가 작동했다.
세틴은 이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무위가 높아 보이는 자들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솎아내기 시작했다.
세틴의 돌진 공격은 빠르게 움직이는 새가 마치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듯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그렇게 십 여 명의 목이 땅에 나뒹굴고 나서야 내관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국 제일의 사신, 세틴 사령관이 나섰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틴의 무명은 알게 모르게 황도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였기에 내관들도 귀가 따갑도록 들어본 자들이 많았다.
내관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싸우냐 마느냐가 아니라 목이 달아나느냐 아니냐의 선택 만이 자신들에게 남아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었다.
몇 명이 무기를 내던지고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하자, 도미노가 무너지는 것과 비슷한 형상으로 거의 모든 내관들이 이를 따랐다.
마음 속의 갈등이 채 해소되지 않았는지, 혹은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인지 주저하고 있는 내관들에게는 가차없이 제국군 졍예병들의 칼이 가해졌다.
앞마당의 내관들을 모두 제압하기까지는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앞마당에 엎드린 내관들을 차례 차례 묶어서 호송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제 이 관문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오클린을 선두로 근위대 50 여 명이 단단히 제압된 비언차이와 결사대 5 명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오클린은 세틴에게 깎듯이 군례를 올리고 보고했다.
“사령관님께 보고 드립니다.
황제 페하를 시해한 범인 비언차이 외 5 명을 제압했습니다.
결사대 7 명은 제압하는 과정에서 반항이 심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말을 이었다.
“비언차이의 간교한 속임수에 넘어가 폐하를 지키지 못한 죄를 지었습니다.
근위대장으로서 결코 용서받지 못할 과오를 저질렀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세틴이 물었다.
“아니, 어떻게 최정예 근위대가 비언차이와 십 여 명을 막지 못했단 말인가 ?”
“비언차이가 3 관문 아래로 뚫린 비밀통로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제가 아는 한 누구도 모르는 지하 통로였는데 비언차이가 어떻게 그 통로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태로 보아 최근에 새로 만든 통로는 아니고 무척 오래 전에 축조된 통로였습니다.
대부분의 근위대를 3 관문에 배치해서 누구도 통과시키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안에서 소란이 일고 제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이때 단단히 묶여 있던 비언차이가 일어나려고 용을 쓰면서 무언가 말하려는 듯 했으나, 입 밖으로 말은 나오지 않고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세틴이 보니 비언차이의 입과 얼굴에 피가 가득이었다.
입이 걸레쪼가리처럼 너덜너덜했다.
다른 5 명의 결사대도 상태는 비슷했다.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그들 모두의 입에 칼을 넣고 돌려버린 상태였던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말이 없어야 하므로......
비언차이가 황제가 머무는 방에 진입하는 데는 성공했고, 황제의 침상 위의 무언가에 수십 차례 칼질을 하기는 했으나, 이미 죽은 황제가 그곳에 있을 리 없었다.
비언차이가 황제를 죽인 자들은 따로 있다는 말을 하고 싶기는 할 터이나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세틴이 말했다.
“근위대장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추후 다시 논할 것이니 일단 일어나게.
듣거라.
제압한 내관들은 다친 곳을 잘 치료해주고, 물과 음식도 넉넉하게 제공해주도록 하라.
단, 지금부터 내관들끼리 서로 접촉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당장 오늘 밤부터 조사에 착수할 것이니 전부 독방에 가두고 신원 파악을 확실히 해두도록.”
이로써 내관들의 거사는 잘 짜여진 연극처럼 깔끔하게 끝이 났다.
세틴은 근위대와 제국군에게 사후 조치를 지시한 후, 다시 오디어스를 찾았다.
어쨌든 황제가 죽은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도 없고, 숨길 이유도 없어졌다.
그렇다면 당장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세틴은 이 문제에 대해 그날 밤 안으로 오디어스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오디어스가 자기 말고 누가 황제가 될 수 있느냐, 황태자라는 지위가 바로 이런 경우에 제위에 공백을 없애기 위해 만든 자리 아니냐고 우기기 시작하면 분란이 끝도 없을 터였다.
세틴은 오디어스에게 제위를 넘겨 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세틴이 보고를 하는 형식으로 오디어스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간교한 비언차이와 내관들이 자신들만 알고 있는 비밀통로를 통해 결사대를 진입시켜 기어이 폐하를 시해하고 말았습니다.
제게도 외조부이신 폐하께서 승하하심에 슬픔을 금할 길 없으나, 당장 대책을 세워야겠기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오디어스가 무척 놀란 표정을 하며 말했다.
“뭐라 ?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고 ?”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매어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이 몇 번이나 뭐라 말을 하려다 말기를 반복하더니 한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내관들이 대체 무슨 원한이 있다고 폐하를 시해한단 말인가.
평생 폐하의 은혜로 호의호식한 자들이 이제 와서 그런 짓을 벌였다는 사실을 나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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