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명 전권 대사
매일 멀린과 조스핀에게 각각 편지 한 통을 쓰는 것은 세틴의 주요 일과였다. 잠들기 전에 일기 쓰듯 하루 일과와 있었던 일들을 세세하게 적어 보냈다. 4, 5 일에 한 번씩 도착하는 전령은 브라스트와 황도를 거의 두 달 걸려 왕복했으므로 서신을 주고 받는 방식으로 당면한 사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멀린도 사안에 대한 지시를 내린다기보다는 브라스트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과 주요 사건들을 상세히 알려주는데 치중하였다. 반면 조스핀은 마치 세틴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질구레 한 일들에 대한 걱정과 조언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거의 매일같이 필요한 것은 없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기거에 불편함을 없는지 확인하려 했다.
새날의 빛에 대한 전권 대사로 간다는 일이 불확실성이 너무 컸고, 위험 요소가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지라 세틴의 편지에도 자연스럽게 그런 우려들이 담기지 않을 수 없었다.
브라스트에서 무력을 재정비 하는 일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6 백작령을 위한 구호 물자를 마련하는데 너무 많은 지출을 했기에 추가적으로 자금을 투입할 여력이 거의 없는 데다 6 백작들의 협조를 받을 수도 없었다. 제국으로 정보망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슈타인 상단의 협력이 필수였는데 슈타인 상단도 상권을 제국으로 확장하기에는 여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멀린은 기존의 기사단을 재편하는 일에도 심각하게 역부족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자신부터 전쟁이 경험이 없기도 했고, 기사단의 지휘부들은 관성에 젖어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세틴은 무리하게 강행을 해도 사람이 그대로면 부작용이 더 클 수 있으니, 일단은 외인부대와 젊은 층 위주로 구성된 특무부대를 새롭게 구성하는 방식을 추진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보내주었다.
탁자에 앉아 이것저것 끄적여가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세틴에게 바네사가 다가왔다.
“황실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특명 전권 대사는 황실의 마차를 이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크기도 크고 여러 가지 편의시설까지 갖춰진 마차라고 하는데, 익숙한 전용 마차보다 나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복도 맞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비용에 관한 문제 등은 제가 알아서 상의하면 되겠지만, 마차와 정복에 대해서는 공자께서 직접 나서주여야 하겠습니다.”
세틴은 황실에서 파견된 시종을 만나 황실 마차를 이용하는 것을 허가하고, 정복을 맞추기 위한 치수 측정에도 협력해 주었다. 시종은 원래 새로 맞추려며 보름 이상 걸리는 일이지만 준비된 옷에서 기장만 맞추면 되기 때문에 하루면 충분할 거라는 등 한참이나 너스레를 떨다 돌아갔다.
이미 세틴이 전권 대사로 가는 일이 기정사실이 된 거나 다름없는 만큼 며칠 후 속개된 대전회의에서는 큰 격론 없이 모든 사항이 결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새로운 칙명은 다음과 같았다.
“세틴 브라스트를 새날의 빛을 위무할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하노라. 세틴은 새날의 빛의 수괴인 옴비두스를 직접 만나 그들의 불만과 요구가 무엇인지 들어보고, 그와 조건을 협의하여 반역을 철회할 수 있도록 힘쓰라. 제국과 황실의 안위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기 위해 황제의 이름으로 세틴에게 이에 관한 제한 없는 권한을 부여하노라. 다만, 협상의 결과에 대해서는 차후 짐과 대전회의의 재가를 통해 이를 확정한다. 이상.”
세틴에게 모든 권한을 주되 새날의 빛과 맺는 협정에 대해서는 스스로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세틴은 이 칙명 뒤에 깔려 있는 함정이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딱히 거절할 명분도 대안도 없었기에 두 말 없이 받아들였다. 모든 것은 옴비두스를 만나 봐야만 확연하게 드러날 일이었다.
쓸 데 없이 위세를 과시할 이유가 없다는 세틴의 주장에 따라 호위는 청랑대 외에 추가되는 병력이 없었고, 조정 부서 중 3 부의 참사관 하나씩과 제국군 참모장이 세틴을 보좌하는 관료진으로 결정되었다. 그들 각자가 대여섯 명씩 수행하는 인원들이 있었으니 조정의 무리가 30 명 정도 같이 가는 셈이었다.
옴비두스가 직접 장악하고 있는 투앙 백작령은 황도에서 동쪽으로 20 일 정도의 거리였다. 세틴은 브라스트를 떠난 지 반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제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를 관통하게 되는 셈이었다.
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이었다. 걷거나 뛰거나 말을 타고 있는 모두가 땀을 뻘뻘흘리며 숨을 몰아쉴 정도로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햇빛이 따가웠다.
과연 황실 마차는 달랐다. 마차 안에서는 열기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달리는 기세 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통풍으로 열기가 머물 수 없었고 넓은 처마까지 달린 마치 지붕은 그 뜨거운 태양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한 켠에는 냉기가 보존되는 상자가 있어 차가운 음료까지 즐길 수 있었다.
세틴은 그늘이 보일 때마다 일정에 큰 차질이 없는 한 최대한 휴식을 취하라는 방침을 내렸다. 하지만 휴식을 취하는 순간에도 청랑대의 경비 태세에는 빈틈이 없었다. 누구든 세틴을 보려면 경계하는 대원에게 용무를 말하고 전령이 다시 세틴에게 갔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는 서로 얼굴 표정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을 때조차 마찬가지였다.
전권대사의 행로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제국이 혼란스럽다는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쳐가는 모든 영지들에는 긴장감조차 없었고, 황제의 전권대사를 맞이하는 영주들의 환대는 극진했으며, 혼담 역시 꾸준히 들어왔다.
투앙 백작령 도착을 하루 앞둔 저녁 머물고 있는 역참에서 세틴이 관료들을 소집했다.
“내일이면 투앙에 도착합니다. 회담의 형식이나 절차 등에 관해 서로 의논해야 할 것 같아 오시라고 했습니다. 애초에 새날의 빛은 제국의 멸망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그런 마당이니 저쪽에서 고분고분하게 나올 가능성이 높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 게 좋을지 의견들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세틴이 운을 떼자 그동안 말이 고팠던 관료들이 너나없이 손을 들었다.
“이번 일의 주관 부서가 외무부이니 외무부 참사관이 먼저 말씀해 보시지요.”
“외무부 참사관 오브린 타스 자작입니다. 뒤늦은 감이 있으나 이제라도 이런 자리가 마련되어 다행입니다. 원래는 저들이 역도의 무리인지라 황제 폐하의 전권대사로서 취조를 하는 형식을 취해야 마땅합니다. 대등한 회담은 사실 어불성설이지요. 하지만 저들이 취조라는 형식에 동의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일단 조정의 사전 통보를 받고 회담 형식의 만남에는 응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상태입니다. 우리가 전권대사와 3 부, 제국군 대표까지 5 명이니 5:5 회담을 갖는 방법과 전권대사를 제외하고 실무적인 회담을 먼저 진행한 후 5:5 회담을 갖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자작은 어떤 방식이 좋다고 보시오 ?”
“전권대사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혹시라도 실수를 하실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나는 실무회담을 먼저 갖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크리스 마르틴 후작입니다. 법무부에서 나왔지요. 나도 실무적인 협의를 선행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저쪽에서 어찌 나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든 이번 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진 전권대사의 입장이 중요합니다. 적들 앞에서 우리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결정을 하든 나는 전권대사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내무부 참사 호아니 맨든 남작입니다. 사실 우리는 옴비두스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회담에 응하겠다고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저들이 백기투항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번 행사에서 어떤 긍정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역도들과 조정, 그리고 여론까지 만족할 만한 성과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 참사관 중에 나이가 제일 적다는 이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이건 뭐 애들 소꿉장난 같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브린 타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호아니, 지금 그게 조정의 1등급 관료로서 할 말이요 ? 책임을 맡아서 나왔으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될 일이지 그게 무슨 태도요 ?”
호아니는 30대 초반의 남작이었다. 어떤 경로로 그 나이에 참사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단히 이례적인 인사임은 분명했다. 호아니가 혀를 날름 하더니 말했다.
“타스 자작님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랄 게 떠오르지 않는 걸 어떡합니까. 저는 여기 계신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까 ?”
마르틴 후작이 중재에 나섰다.
“어려서부터 제국 제일의 천재라 불린 맨든 남작조차 묘안이 없다니 사실 대단한 난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무런 목표도 없이 회담에 응한다면 그것도 문제인 것은 맞지요. 타스 자작은 어떤 타협이 가능하다고 보시오 ?”
화살이 자기에게로 날아오자 오브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소. 저들이 어떻게 나오나를 우선 보고 나서나 생각할 문제라고 생각하오.”
호아니가 또 나섰다.
“복안도 없이 회담에 응한다는 건 주도권이 상대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와서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조정에서 일정한 복안도 없이 전권대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전권대사를 파견함은 일정한 조건에서 그 동안의 죄과를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의사를 전제로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군사를 파견해서 토벌을 하면 그뿐입니다. 자, 단적으로 저들이 원할 최소한은 아마도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함일 것입니다. 조정에서 전권대사까지 파견한다니 그들은 그 이상을 원할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제국법에 따르면 역모에 가담했던 자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 제국을 위해 죄를 덮고도 남을 공을 세울 때이고, 실제 사례는 거의 전부가 반란 세력을 사전에 고변하거나, 내부에서 거꾸로 배신을 하여 수괴를 죽인 경우입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저들의 목숨을 살려주지요 ?”
오브린이 또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게 무슨 궤변인가 ? 이것이 보통 난제가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당초에 아무도 없었어. 그러니까 전권까지 부여하면서 대사를 파견했지. 법에 따라 척척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애초에 전권대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 개나 소나 아무나 시켜도 해낼 일이지.”
“아니, 그렇게 소리만 지르지 마시고요. 제 말에서 궤변에 해당하는 말이 정확히 어느 지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냥 제 생각을 말씀 드리지요. 지금 우리에게 최선은 저쪽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보고 ‘그래 잘 알았다. 너희의 사정과 요구를 황제 폐하께 있는 그대로 전하겠다. 너그러우신 폐하께서 선처하실 것이 분명하니 기대하고 있으라’ 하고 일을 마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오브린은 여전히 언성이 높았다.
“그럴 것이면 전령 하나 보내면 될 일이지 거창하게 전권대사까지 동원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 말도 안되는 언사로 일을 훼방 놓기나 할 것이면 애초에 임무를 거부할 것이지 여기까지 와서 그러는 것은 조정 관료로서 낙제야, 낙제.”
호아니도 지지 않았다.
“자작께서 저에게 낙제점을 주시는 건 자유이나, 애당초 시험 문제가 잘못 출제되었으면 그것부터 따지는 게 순서 아니겠습니까 ? 매년 인사안을 내는 것은 저의 고유 권한임은 잘 아시지요 ? 이번 일을 기획한 외무부 관료들이 내 손을 거쳐서 내년 승진 대상에 오를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 흥, 내년까지 자네가 그 자리를 보전한다는 보장은 누가 한다던가 ? 이건 뭐, 사람들이 천재라고 추켜세워주니 눈에 뵈는 게 없구만.”
“어떻게 봐도 저와 동급인 타스 자작께서 저에게 낙제점을 주실 일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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