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페리앙
배커가 대꾸를 했다.
“우리는 제국 중앙군으로 반역자 우살리드를 잡으러 왔소.
나는 세틴 사령관님의 친위대장을 맡고 있는 배커라 하오.
즉시 성문을 열고 투항하지 않는다면 제국군의 거센 공격 앞에 이 따위 허술한 성채는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오.
그런데 묻는 그대는 누구시오 ?”
“나는 우살리드 장군의 아내, 샬롬 페리앙이다.
다짜고짜 항복하라고 윽박지르기부터 하다니 역시 황실의 개들 답군.
우리 북동부인이 고분고분 머리를 숙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한 사람의 숨이 넘어갈 때까지 맞서 싸울 것이야.
가서 너의 윗대가리에게 전하라.
자신이 있으면 쳐들어 와보라고 말이야.
할 말은 이게 다다.
썩 꺼져.”
역시 샬롬은 대단한 여자였다.
페리앙에 실제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 여자의 기세 만큼을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는 것이 배커의 감상이었다.
길게 얘기해 봐야 득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배커는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배커에게서 샬롬을 만난 얘기를 전해 들은 세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페리앙 성채 안에도 우리가 파견한 세작들이 들어가 있어요.
저곳에 실제로 싸울 만한 병력은 채 5 백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샬롬이라는 여자가 갑옷까지 입고 나서서 저리 나오는 것은 아마도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어보자는 생각이지요.
어찌 보면 지금의 이 사단을 만든 원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여인인데, 끝까지 골치 아프게 구는군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
세키가 말했다.
“아마 샬롬은 우살리드가 이미 패망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살리드에게서 무슨 소식이라도 오기 전까지는 시간을 끌며 버텨보려는 생각 같습니다.
그녀에게 우살리드가 패망한 사실을 알려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
세틴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믿지 않을 거에요.
그 여자는 남편의 시신을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으려 하지 않겠지요.
무엇보다 문제는 지금 북동부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페리앙에서 나는 절대로 피를 보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힘으로 밀어 부친다면 큰 어려움 없이 장악할 수야 있겠지만, 그들이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한다면 북동부인들에게는 아마 페리앙을 피로 물들은 제국군이라는 식으로 기억될 겁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샬롬이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저항하겠다고 버틴다면 실로 난제입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지켜 볼 수도 없고, 이곳을 그대로 놔둔 채 우살리드를 잡으러 간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가우디가 말했다.
“그 정도 병력이라면 저와 배커가 수십의 정예병을 이끌고 잡입해서 샬롬이라는 여자만 잡아 오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샬롬만 없어지고 나면 저들의 저항 의지도 꺾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키가 곧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러면 오히려 제국군이 비겁한 짓을 했다 하여 북동부인들의 저항 의지만 더 키울 수도 있습니다.
샬롬이 지금 북동부인들의 구심점인 것은 맞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샬롬을 따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샬롬에 대한 북동부인들의 심정이 어떻든 지금은 그녀가 우살리드를 대신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 페리앙에 남아 있는 병력은 대부분이 오랫 동안 페리앙 가문을 섬겨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결속이 결코 약하다고 볼 수는 없지요.
지금 이대로는 뾰족한 방법이랄 게 없겠습니다.
일단 내일 내가 직접 그녀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말은 강하게 해도 그녀나 페리앙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겁니다.
마냥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라 하니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면 길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당장은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군요.”
세틴이 어떤 식으로든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샬롬에게서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세틴이 단신으로 성루에 올라 온다면 만나 줄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죽을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니 용기가 있으면 한 번 와 보든가’하는 식의 제안이었다.
아마도 세틴이 페링에서 우살리드의 진지로 찾아갔던 일을 떠올린 듯한 제안이었다.
세틴은 장수와 참모들의 우려섞인 눈빛에도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약속한 시간에 성문 앞에 도착한 세틴은 날아가는 새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성채를 두 번 발로 딛고 올라 성루 옆쪽에 멋들어지게 착지했다.
샬롬은 세틴이 그런 식으로 성루에 올라올 줄은 몰랐던지 놀란 토끼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고 말했다.
“역시 제국의 사령관다운 배포와 기세시네요.
먼저 여기 앉아 제 술 한 잔 받으시지요.”
성루 위에는 제법 그럴 듯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양쪽으로 꽤 화려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세틴은 두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샬롬의 술을 받았다.
하지만 마시지는 않고 그대로 상 위에 잔을 내려 놓았다.
“내가 원래 술을 즐기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얘기가 잘 풀려 기분이 좋아진다면 기꺼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시겠습니다.
내 얘기보다 그쪽의 얘기를 먼저 듣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부인께서는 어떤 얘기든 해보시지요.”
샬롬은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제국군에서는 제가 무슨 사악한 마녀라도 되는 듯이 소문이 났다지요 ?
우리 군이 제국군과 맞서서 크게 싸운 적도 없고, 제국군에 피해를 준 것도 없는데 왜 우리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구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나에 대한 소문도 마찬가지구요.
어떤 정신나간 자가 그 따위 얘기를 지어내서 나를 모함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령관께서는 우살리드 장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북동부를 아예 송두리째 점령하려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영주들을 무자비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북동부인들을 크게 해치지는 않았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게 북동부를 큰 소음없이 날로 먹겠다는 속셈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나요 ?
나는 우살리드 장군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이 페리앙을 결코 넘겨줄 마음이 없습니다.
힘으로 점령을 하겠다면 페리앙에 있는 쥐새끼 한 마리까지 모조리 잡아 죽이겠다는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그것이 나와 페리앙 성채에 있는 모든 사람, 나아가 전체 북동부인의 의지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 두셨으면 좋겠네요.”
샬롬은 말을 하면서 스스로 흥분해 얼굴이 달아 올랐고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세틴 크게 화를 내거나 위압적인 태도로 나오리라 예상하고 세틴을 바라보니, 세틴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부인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을 알기에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
나는 많은 피를 보고 싶지도 않고, 힘으로 윽박질러서 페리앙을 억지로 점령하지도 않을 겁니다.
부인께서 그렇게 버티시겠다면 솔직히 저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살리드가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어 북부를 점령하고 황도로 진격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우살리드는 이미 패망했어요.
내가 미리 파견한 별동대에 막혀 북부 땅에는 발도 디뎌보지 못하고 전군이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습니다.
우살리드 본인의 생사도 불분명하지요.”
샬롬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거짓말.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사람으로 보였다면 큰 오산이에요.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아직 나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사령관이 속속들이 알 수 있지요 ?”
세틴이 여전히 조용하게 답했다.
“우선, 나는 우살리드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까지는 묻지 말아 주세요.
나는 황도와 언제든지 직접 통신할 수 있는 통신 마도구를 가지고 있고, 황도에서 북부, 그리고 하랑가 초입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 별동대까지도 몇 단계를 거쳐 소식을 전할 수 있는 통신망을 구축해 놓았습니다.
그것도 하랑가를 넘어 북부로 진출하려는 우살리드에 대한 대책으로 내가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지요.
우살리드는 내가 북동부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패망했습니다.
돌아오고 있다 해도 지금쯤 하랑가 고원 어딘가에서 적지 않은 난관을 겪고 있을 겁니다.”
샬롬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나는 절대로 믿지 않아요.
내 눈으로 직접 그를 보기 전에는 믿지 않을 겁니다.
그런 말로 나를 낙담시켜 어찌 해보려 했다면 큰 오산이에요.
그럴수록 우리 북동부인들의 결사적인 저항 의지가 굳어질 뿐입니다.”
세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인께서 그러실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시지요.
만약 우살리드가 대성공을 거두어 북부를 점령하고 황도까지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제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
하루빨리 페리앙을 점령하고 부인을 사로잡아서 인질로라도 써먹을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
그래야 우살리드에 대적할 하나의 수단이 생기는 셈이니까요.
그건 우살리드가 지금 어디에선가 제국군과 강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나는 페리앙을 피를 봐가면서까지 서둘러 장악할 생각도 없고, 부인께서 버티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려 줄 용의가 있습니다.
페리앙을 점령하지 않더라도 이미 북동부 대부분은 우리 손에 들어왔고, 차차 안정을 찾아가게 됩니다.”
샬롬이 발악하듯 말했다.
“그럼 날 보고 어쩌란 말이지요 ?
페리앙의 식구들 전부 무기를 버리고 무릎꿇고 항복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럴 수 없어요.
우리는 끝까지 싸울 거라구요.”
세틴이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샬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살리드의 패망에 대해 믿든 믿지 않든 일단 샬롬의 마음 한 구석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고 보이기는 했다.
샬롬 자신은 어디까지나 우살리드의 대신이었다.
우살리드를 대신해서 끝까지 북동부의 심장인 페리앙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일 터였다.
세틴이 조금은 차갑게 말했다.
“우살리드가 패망한 순간, 이미 북동부는 끝났습니다.
나는 부인에게 항복을 받을 필요가 없고, 부인은 내게 항복을 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우리 제국군은, 세틴군은 지금까지 수많은 영지들은 평정하면서 영주의 부인이나 식솔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항복하는 절차도 필요 없고, 나는 누군가를 심하게 처벌할 생각도 없습니다.
단지, 하루빨리 북동부가 안정을 찾고 백성들이 안심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하는 조치들을 순순히 따라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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