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거의 제왕 할라크
여러 날 정찰을 통해 파악된 오우거들을 사냥하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오우거의 입장에서 변두리에 속하는 협곡 초입에는 오우거가 많지도 않았고, 단독 생활을 하거나 많아도 네다섯 정도의 가족 무리가 대부분이었다.
세이나가 제공한 마비약의 효과는 탁월했다. 화살과 창으로 양 다리에 상처를 입은 오우거는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행동이 굼떠졌다. 오우거 사냥에서 발생하는 피해는 거의 발광하여 정신없이 날뛰는 오우거를 제어하지 못해서 병사들이 우수수 나가 떨어지는 경우에 생기는데 하반신이 굳어진 오우거가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날뛰는 상황이 거의 없어졌다.
오우거를 단시간에 깔끔하게 잡아내는 실력은 세틴이 단연 발군이었다. 현대의 의학 상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그는 오우거의 목에 있는 경동맥을 집중공략했다. 어떤 짐승도 경동맥이 끊기면 뇌에 혈액을 공급할 수 없어 짧은 시간에 무력화된다.
마침 세틴의 필살기 중 하나인 재커둠의 송곳니는 경동맥 공격에 안성맞춤이었고, 오우거들은 유난히 경동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세틴은 오우거 직접 공략에 나서는 장수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고, 포위에 참여한 병사들이 위험에 빠질 위험성을 줄이는 쪽으로 더욱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하쿰과 오크들은 실로 무식하게 싸웠다. 다짜고짜 맞짱을 뜨는 것은 물론, 오우거가 휘두르는 몽둥이에도 힘으로 맞서곤 했다. 체고가 거의 두 배인 오우거와 육탄으로 맞서는 오크들의 전투 장면은 피가 끓어 오르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하쿰은 오우거의 목을 도끼로 완전히 절단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마무리하곤 했는데, 그전에 오우거는 온몸에 남긴 도끼자국으로 넝마가 되곤 하여 모우징에게 핀잔을 듣곤 했다. 그렇게 해놓으면 쓸 가죽이 얼마나 되겠냐며 차라리 뒤에서 구경이나 하라는 말이었다.
다섯의 마스터들은 단독으로 오우거를 처치하는데 별 무리가 없었으나, 상급 익스퍼트의 장수들도 협공이 아니면 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둔한 오우거의 공격에 노출되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결정타를 먹이는 데는 애를 먹었다.
세틴이 보여주는 경동맥 공략을 흉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면 자칫 반격에 당할 위험성이 높았고, 목 부위는 어떤 짐승이든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었다.
며칠에 걸쳐 오우거를 40여 마리 사냥할 때까지 병사들이나 직접 공격에 나선 장수들이 결정적인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오우거 서너 마리를 잡은 오크들 가운데 예닐곱이 사망하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사냥이 진행되는가 싶을 무렵, 오우거들이 협곡 중앙의 마을 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꼼꼼한 정찰을 통해 위치를 파악해두었던 오우거들이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틴은 일단 사냥을 잠시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군을 전체적으로 재정비하면서 일부는 노스롭 영지에 있는 본대와 교대하도록 명했다. 그런 가운데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다섯 소드마스터와 하쿰, 푸시니아, 모우징, 하포크, 그리고 고원 오크의 수장 격인 코큰이었다.
세틴이 서두를 뗐다.
“오우거들이 도망간 것이 단지 각자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친 것인지 오우거 마을에 있다는 오우거 두목의 명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오우거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일단은 우리 군도 정비할 겸 지켜봐야겠습니다. 오우거들의 두목에 대해서는 다른 정보가 있습니까 ?”
하포크가 대답했다.
“오우거들이 소통이 가능하지도 않고 외부와 어떤 교류를 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도 별다른 정보는 없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규모가 큰 집락지를 구축했다는 것만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지능과 통솔력, 지배력을 갖춘 존재임을 말입니다.
할라크는 오우거의 제왕이라고 불립니다. 일반 오우거와 달리 온몸이 까맣고 체고가 일반 오우거에 비해 1 미르 정도 크다고 합니다. 소문에는 마법을 쓴다고 하는데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고진이 정찰 상황을 보고했다.
“오우거들이 일시에 사라진 걸로 보아 그냥 겁을 먹고 도망치지는 않았다고 보입니다. 더욱이 이상한 점은 웨어 울프나 웨어 보어 같은 몬스터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는데 동시에 사라졌습니다. 오우거들이 다른 몬스터들을 부린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제 생각에는 정규전에 준하는 대규모 전투를 준비해야 할 듯합니다. 오우거들이 대규모로 집결하여 집단전의 양상으로 흐른다면, 다른 몬스터들이 합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일단 병력의 3 교대는 그대로 가되 선발된 장창병은 교대 없이 3천을 계속 유지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자칫 혼전이 펼쳐지면 일반 병사들의 희생이 커질 수 있으니 전투에 직접 투입하지는 않도록 합니다.
고진 대장께서 여기 두 족장과 함께 전면전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는데 집중해 주세요. 오우거가 대부대로 나온다면 곧바로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전선을 유지하되 후퇴하면서 적의 분산, 고립을 유도하는 작전을 위주로 합니다.
목책이나 방어 장치들은 오우거에게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구덩이 함정을 설치하고 유인하는데 적합한 지형을 중심으로 전장을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세틴은 군을 서서히 전진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초입에서 오우거 마을의 중간 지점에 이를 때까지 오우거는 물론 다른 몬스터들도 거의 조우하지 않았다.
이곳은 크고 작은 잡목들이 무성히 자라기 시작하는 지점이었다. 잡목숲을 1500 미르 가량 지나면 아름드리 거목이 빽빽이 들어선 숲이 시작되었다.
세틴군이 전장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이 잡목숲이었다. 초입에서 잡목숲까지의 구간은 대부분 풀이 듬성듬성 자라는 초원이어서 함정 설치에 적합하지 않았고, 큰 나무가 무성한 숲은 포위 작전이 어려워 오우거에게 유리한 전장이었다.
확실히 이곳의 협곡은 내려갈수록 폭이 좁아지고, 일조량이 더 적음에도 불구하고 생태계가 풍부해지는 특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세틴은 잡목숲이 시작되기 직전의 지점에 본진을 설치하고 숲을 마주하고 잡목숲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 1차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했다.
방어선에는 오우거에게도 어느 정도 위압감을 주고 자유로운 전진을 방해할 수 있는 거대한 녹각(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비스듬히 위를 향하게 하고 이를 지탱할 수 있도록 구성한 방어 장치, 주로 기병의 돌격을 방어하는데 쓰임. 사슴뿔 모양이어서 녹각이라 한다)을 군데군데 배치하였다.
군영이 설치된 바로 다음날부터 몬스터들의 간헐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두운 숲에서 갑작스럽게 몰려나오는 샤벨 타이거, 그림자 표범, 웨어울프, 웨어 보어 등의 기습적인 공격은 체계적이지는 않아도 제법 위협적이었다.
일시에 덮쳐오는 수가 적지 않기도 했고, 다양한 몬스터들이 군대를 향해 죽자사자 덤벼드는 모습은 공포스러운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장창병들이 촘촘하게 형성한 창막을 돌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일시적으로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 창막이 무너질 위기에는 어김없이 장수들이 나서서 몬스터들을 처치하거나 흩어놓은 방식으로 대처하다 보니 무난히 막아내고 있었다.
세틴은 장창병들을 교대로 투입하여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한편, 일반 병사 대부분을 동원하여 잡목숲 곳곳에 구덩이 함정을 준비하도록 했다.
구덩이 함정은 오우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기보다 전진을 지연시키는 목적이었기에 설치에 많은 장비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위장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리 겁이 없는 몬스터라 하더라도 일만이 넘는 군영에 기치창검이 휘황찬란한 부대를 공격하는 일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즉, 오우거의 부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셈이었다.
몬스터들을 동원한 공격이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는지, 사흘 후에는 몬스터의 출현이 뚝 끊겼다.
더 이상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전장의 긴장감은 오히려 높아졌다. 오우거 본대와의 본격적인 격돌이 머지 않았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컴컴한 숲 쪽에서 음울하고 께름칙한 기운이 진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런 시간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오우거들은 무엇을 기다리는지 쉽사리 숲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의 군대가 숲으로 진입하여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라도 있는 것처럼 수시로 숲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돌아가는 오우거들이 눈에 띄었다.
협곡에도 봄기운이 완연하고 안개가 자욱하게 낀 어느날 아침, 마침내 오우거들이 숲을 나와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체구의 오우거들이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줄을 지어 숲을 나와서 녹각이 설치된 지점에서 불과 20 미르 가량 떨어진 지점에 도열하는 모습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기이했다.
작은 산처럼 우람한 할라크가 거의 비슷하게 큰 오우거 두 마리를 양 옆에 거느리고 나와 도열한 오우거들의 중앙에 우뚝 서는 것으로 오우거의 출정은 끝이 났다. 비록 말이 없어도 오늘 결판을 내자는 의도가 전해졌다.
녹각 뒤편에 도열한 3천 명의 장창병들이 초라해 보일 만큼 오우거의 위압감이 컸다. 얼추 2백여 마리는 되어 보이는 오우거들이었다.
말없는 대치는 오래 가지 않았다. 할라크가 오른손으로 커다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뭐라 중얼대는가 하는 순간, 장병의 진영 중앙에 벼락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장창병 서너 명이 온몸에 연기를 품으며 쓰러졌다.
이어서 할라크의 입에서 천둥같은 고함이 터져나왔고, 오우거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창병들은 갑작스레 떨어진 벼락에 나가떨어진 동료의 모습에 당황할 새도 없이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는 충격에 휩싸였다.
전장 전체를 압도하는 할라크의 고함 소리에는 일시적으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었다.
세틴은 할라크의 고함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고, 울분과 원한, 슬픔, 걱정, 애정 등의 온갖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아 올라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예전에 재커둠의 힘을 각성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내질렀던 짐승의 울부짖음을 토해내었다.
세틴의 입에서 나왔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을 그 울부짖음은 병사들 모두의 정신을 일제히 깨웠다.
오우거들이 녹각을 깨부수거나 들어 올려 옆으로 치우기 시작했을 때, 장창병들은 평소 훈련했던 그대로 일제히 창을 내밀어 창막을 형성할 수 있었다.
아무리 오우거의 수가 많고 포위되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만 병사들을 공격한다 해도 장창병들의 창막이 일시적으로 무너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창병들은 오우거에게 힘으로 맞서지 않고 천천히 후퇴하면서 대처했다, 전체적으로 오우거들에게 밀리는 양상이었으나, 창병들의 진형은 굳건히 유지되고 있었다.
세틴군의 창진이 뒤로 밀려나는 가운데 점차 양 옆으로 분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다 보니 전선은 점차 넓어지고 오우거들 사이도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오우거들은 전체의 3분의 일 넘게 할라크를 감싸고 본영을 지키는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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