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제일의 신랑감
세틴이 자못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황도에 도착해서 어떤 처지가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설마하니 황제 폐하의 외손자인 나를 감히 인질로 잡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황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난장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황도에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없는 나입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대공비 전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혼사를 추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사 내가 마음이 있다 한들 귀하디 귀한 처자를 무슨 염치로 끌고 들어가겠습니까.”
다른 영애가 나섰다.
“제가 정치를 모르지만 세상에 누가 감히 브라스트 대공가의 소가주를 인질로 잡는단 말입니까 ?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저의 아버지부터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걸요.”
영애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맞아요. 맞아요.”
세틴이 웃음지으며 말했다.
“이거 말씀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소. 어렵고 복잡한 얘기는 그만 하고. 기왕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즐거운 시간을 가져봅시다.”
‘제국 제일의 신랑감’ 작전을 입안한 세틴 자신도 이런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제국의 변방이고 브라스트에 비교적 가까운 주변 영주들이어서 그럴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평소 제국에서 거의 화제에도 오르는 일이 없던 브라스트가 칙사 파견과 세틴의 혼담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급격히 부각되는 것만은 사실로 보였다.
카우스는 황도로 가는 세틴의 기를 좀 꺾어놓아야 한다는 얘기를 모인 귀족들에게 꺼내 보지도 못했다. 그랬다가는 몰매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세틴 일행이 지나는 길은 브라스트 접경에서 황도를 지나 제국의 동쪽 끝까지 제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제일 가도였다. 험악한 지형도 없고 천년에 걸쳐 다져진 길이라 대부분이 마차가 서너 대는 동시에 달릴 수 있는 대로였다. 강을 자주 건너야 했으나 강폭이 그리 크지 않아 도강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역참은 물론이고 간혹 들르는 영주들의 성에서도 페드로 자작성에서와 비슷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황도가 가까워질수록 영주성에 모여드는 귀족과 그 영애들의 수는 오히려 늘어났고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열기를 더해갔다. 카우스는 속이 타들어 갔으나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기를 쓰는 크고 작은 귀족들을 말릴 재간이 없었다.
세틴이 황도에 도착한 것은 브라스트를 떠난 지 두 달이 거의 다 지나 막 무더운 여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황도는 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튼튼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두를 만큼 많은 석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기 때문이었다.
여행 내내 테오의 등에서 청랑대와 함께 행군한 세틴은 황도를 앞에 두고 마차에 타고 있었다. 마차를 타야만 권위를 더할 수 있다는 바네사의 강권 때문이었다.
멀리 보이는 황도의 성곽은 보기에 장관이었다. 유일하게 황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했고, 높이가 다섯 길은 넘어 보였으며 주변에 산 하나 볼 수 없는 평원에 우뚝 솟은 구조물이었다.
카우스는 황도의 서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환영 인파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그들이 칙사인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은 애초에 기대조차 없었다.
구름같은 인파도 인파지만 그들의 선두에 서있는 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카우스가 잽싸게 달려나갔으나 보기 좋게 무시를 당하고 말았다. 황제를 제외하고 제국에서 서열 1, 2, 3에 해당하는 황자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인사도 없이 카우스를 지나친 세 황자들이 세틴의 마차를 향했다. 때마침 세틴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풀쩍 뛰어내린 세틴을 향해 일황자가 인사를 건냈다.
“어서 오게. 나는 폐하를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맡고 있는 일황자 월칸이라 하네. 조스핀의 아들이니 사적으로 나는 자네에게 외삼촌이 되겠구만. 먼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세틴은 월칸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브라스트 대공가의 소가주 세틴이 인사 올립니다.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이제 도착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네가 바로 그 제국 제일의 신랑감이군. 요즘 황도에서 으뜸가는 화제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어 반갑네. 조스핀이 몇 차례나 서신을 보내서 신신당부 하는 바람에 이렇게 나왔어. 나는 이황자 골트릿이라 하네. 조스핀의 아들이라면 내게도 아들이나 다름이 없지. 황도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나를 찾아 오게. 내가 비록 힘은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황자 아닌가. 조스핀의 부탁이 아니라도 내가 최대한 도와주겠네.”
“난 삼황자 오디어스 하만이야. 폐하께서 친히 그대를 접견하지 못함을 무척이나 아쉬워 하셨어. 조만간 폐하의 명이 내려올 테니 그때까지 황도에서 조신하게 지내도록. 쓸데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잡음이나 일으키지 않았으면 해.”
오디어스는 완연한 노인의 티가 나는 일, 이황자와 다르게 젊어 보였다. 이황자에 비해서도 열 살 이상 차이가 나 보였다. 세틴은 이황자와 삼황자에게도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일, 이황자와 확연하게 온도차가 느껴지는 삼황자의 태도에서 세틴은 잘낫에게 들었던 황자들에 대한 평가가 크게 틀리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자들이 돌아가자 카우스는 세틴에게 자신이 준비한 숙소로 가자고 했다. 세틴은 단칼에 거절했다.
“황도에 브라스트 대공의 관저가 있네. 멀쩡한 관저를 놔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네 ? 관저가 있다구요 ? 그런 말은 못 들어봤는데......”
“이런...... 명색이 제국 유일의 대공이신데 황도에 관저 하나 없겠는가. 외무대신이라는 사람이 그런 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한다고, 쯧쯧......”
세틴은 마중 나와 있던 자의 안내를 받아 곧장 관저로 향했다. 대공 관저에 도착해 보니 카우스가 모를 만도 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수십 년 동안 관리하는 사람도 없이 방치된 관저는 폐가나 다름이 없었다. 멀린이 결혼을 위해 황도에 왔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이용한 사람이 없는 관저였다.
다행히 터는 넓어 공지가 많았고, 원래는 그럴 듯한 정원이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할 정도로 작은 호수와 바윗돌로 꾸민 가산도 있었다. 세틴은 당분간 공지에서 야영하면서 차츰 수리해 나가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늙수그레한 집사가 하인들을 30 여 명이나 데리고 관저를 찾았다. 골트릿의 보낸 자였다.
“저는 골트릿 전하의 집사인 올릿이라 하옵니다. 전하께서 관저의 상태를 걱정하셔서 저와 하인들을 보내셨습니다. 전하께서 당부하시길 반드시 첩자가 들어올 것이니 다른 자들은 일체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데려온 자들은 모두 전하의 집안에서 오랫동안 일한 하인이거나 그 가족입니다. 모두 믿을 만한 자들입니다.”
세틴이 반색하며 말했다.
“내가 브라스트를 떠나올 때, 어머니께서 황도에서 의지할 만한 분은 이황자 전하 뿐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더니 과연 그렇구려.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까지 미리 챙겨주시니 세심한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요. 올릿이라 했나 ? 앞으로 잘 부탁하네. 그리고 이쪽은 내 시녀장인 바네사라 하네. 내 일상 기거와 일정은 모두 바네사에게 달려 있으니 앞으로 잘 상의하고 협조해주기 바라네.”
점심 나절에 카우스가 보냈다며 하인들 열 댓 명이 관저를 찾았다가 문턱도 넘지 못하고 쫓겨갔다. 고맙지만 브라스트에는 충성스러운 하인들이 많아 일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정중하게 전언을 보냈다.
세틴의 일행 중에 하인이라고 할 만한 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카우스는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었다. 소리 소문 없이 황도로 데리고 들어와 한 구석에 쳐박아 놓고 언제든지 인질로 활용할 수 있게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그의 눈과 귀가 되어줄 하인을 들여보내는 것까지 실패하자, 카우스는 절망감에 빠졌다. 자청해서 브라스트까지 몇 달을 고생해서 한 일이 성과도 없을뿐더러 자칫 역효과를 낼 가능성조차 커졌다. 3황자와 모그란데 공작의 질책을 받을 일이 꿈만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카우스를 불러들인 오디어스는 그를 보자마자 보기 좋게 따귀를 날렸다.
“명색이 외무대신에 칙사가 되어서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해 ? 차라리 어디론가 도망이나 가버리고 말 것이지 무슨 낯짝으로 황성에 기어 들어왔나 ? 어디 할 말 있으면 해 봐. 잘난 변명이라도 들어보자고.”
카우스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 일을 제안한 것도 자신이었고, 호기롭게 자기 말고는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자가 없다며 칙사를 자청한 것도 자신이었다.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애초에 승상직을 제안하면 대공이 얼씨구나 좋다고 받아들일 거라는 것부터 저의 계산착오였습니다. 멀린을 너무 얏본 불찰이 큽니다. 차선책으로 준비한 인질 계획은 멀린에게 쓸만한 아들이 없다는 정보에 따라 만든 것이었습니다. 난데없이 이제 15 살밖에 안 된 세틴을 후계자로 삼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조스핀 황녀께서 갑자기 세틴의 반려를 구한다는 서신을 전국으로 보낸 것이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건데 소신은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라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나마 브라스트의 허실은 충분히 파악한 셈이니 앞으로 이를 잘 활용할 대책을 수립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따귀를 정통으로 맞아 흔들리는 이빨의 통증을 참아가며 사력을 다해 변명하는 카우스를 보며 오디어스는 화가 반나마 풀리고 있었다. 사실 자신도 카우스의 계획에 무릎을 치며 동조했고, 카우스의 말마따나 예상치 못한 변수들도 적지 않았다. 카우스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리라는 점도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멀린에게 우리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심어버린 게 제일 커. 브라스트는 우리가 한 편으로 삼기에도 적으로 돌리기에도 덩치가 너무 크지. 제이 제삼의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실행할 수는 없어. 이렇게 된 마당에 세틴이 황도에서 마음대로 설치게 두면 곤란해. ‘제국 제일의 신랑감’이라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하지만 어떻게든 브라스트에 선을 대보려는 영지 귀족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네. 파이란과 트리엄도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픈 모양이야.”
“4황자야 원래 영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그렇다 해도, 5황자는 왜 그렇습니까 ?”
“중앙의 관료 귀족들이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게 뭔가 ? 독립적인 세력 기반이 없다는 점이지. 중앙 정치에서 자신이 가진 영향력과 브라스트의 기반이 연결되면 못할 일이 뭐겠나 하며 꿈을 키우는 자들이 없을 것 같나 ? 세틴이 조스핀의 아들인 것도 무시 못할 일이지. 현실적으로야 감히 내세우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황제의 외손자에게도 황위 계승권이 있어. 그들에게는 금상첨화라고 생각할 만한 요소지.”
“아무튼 4, 5 황자께서도 그리 여기신다면 세틴을 처리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좋은 머리로 대책을 강구해 보라고. 시간이 많지는 않아.”
“알겠습니다. 수일 내로 대책을 세워서 보고드리겠습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