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틴의 결심
세틴이 시오미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 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떠나겠다고 하는 이유를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이해하기는 어려울 거야.
나는 그동안 무너져가는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지.
하지만 천년 제국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해.
이 큰 땅덩어리를 황제라는 한 사람이 이끌어가는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지.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활개를 치면서 ‘이 세상은 내 것이다’고 외칠 수 있는 세상을 원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총독회의가 그 시발점이 될 거야.
앞으로 갈수록 황도보다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세상을 이끌어 갈 거야.
그 길을 터주는 것으로 내 역할은 끝이라고 보는 거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고 너무 커다란 변화로 인해 세상이 더 어지러워질 수도 있어.
하지만 황제가 그 모든 변화를 홀로 감당해내는 존재가 되기는 어렵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황제는 아마 거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는 편이 더 나은 상황이 벌어질 거야.
내가 황제가 된다면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겠지.
나는 그걸 바라지도 않고 그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입증하려고 그러는 건 결코 아냐.
이 세상 끝까지 돌아다녀 보고 싶고, 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도 중요한 이유야.
울라프에게서 들은 얘기들을 이미 대충은 다 얘기해줬지 ?
이 세상에 얼마나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보고 듣고 부대껴보고 싶어.
아마 평생 실험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것보다 그 편이 마법 연구에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어.
지금까지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든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도록 지원하려고 애를 썼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면 어떤 사람은 훨씬 이전부터 나라는 존재가 그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할 거야.
어쩌면 이게 제일 큰 이유지.
지금까지는 나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일어나고 진행되고 해결되었지만, 앞으로는 그래서는 안돼.
시오미니까 이렇게라도 말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세상 구경을 마음껏 하고 싶다는 이유만 말해줄 거야.”
시오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눈치를 살피고, 내 말 한 마디에 백 사람 천 사람이 따르는 권세를 내가 바라는 걸까 하고 자문해 봤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내 성미에도 맞지 않고,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할 거야.
나는 몰라도 세틴은 세상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
세상이 어떻게 변해갈지, 세틴이 어떤 세상을 원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런 일들이 더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세틴이 없어야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갈 거라는 말은 아무리 듣고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어.”
세계사와 각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세틴이 나름대로 얻은 통찰과 그의 개인적인 성향이 어우러져 나온 결정을 말로 설명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세틴이 허탈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난 그저 시오미와 단둘이 마음껏 세상 구경이나 다니며 살고 싶어.
열 여섯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을 감당해야 했고, 나도 이제 지쳤다고.
그래서 시오미는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다는 거야 ?”
시오미가 눈을 흘겼다.
“그건 아니지.
가긴 갈 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아쉬워 할 게 뻔하니 그렇지.
세틴이 꼭 그렇게 해야겠다면 내가 무슨 수로 말릴 수 있겠어.
그럼, 난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고 있을게.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 ?”
세틴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얼마 전 세벤항에서 울라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울라프의 배를 타고 아르가스를 거쳐서 황도로 돌아온 일은 얘기했지 ?
우리가 온 세상 바다를 마음껏 다닐 수 있으려면 그때 타본 울라프의 배보다 더 좋은 배가 꼭 필요하지.
중요한 건 배를 움직이는 마력 기관인데, 내가 울라프에게서 받아온 설계도는 봤지 ?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한 두 달 안에 꼭 가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시오미가 그것보다 더 성능좋은 마력기관을 꼭 만들어야 해.
할 수 있겠어 ?”
시오미는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선생님 모드’로 바뀌고 있었다.
“마력을 동력으로 전환하는 기본 원리는 충분히 이해를 했어.
하지만 출력을 증폭하는 장치는 전혀 생소한 기계적인 원리를 담고 있어서 아직이야.
마력이 없던 힘을 저절로 만들어 내는 신기한 무언가는 아니거든.
마력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인 힘을 극대화시켜서 회전력으로 전환하는 기계장치가 엄청난 정밀도와 튼튼한 재질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실제로 빠른 시간 내에 그것을 구현해낼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어.
뭐, 내가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연구를 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울라프라는 사람이나 그가 데리고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직접 받을 수 있다면 일이 좀 더 쉬워지겠지.”
세틴이 자신의 머리를 쾅쾅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
내일이라도 세벤항으로 전갈을 보내도록 할게.
시오미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말이야.
세벤항에는 울라프의 사람이 상주하고 있고, 그들은 장거리 통신구가 있다고 했으니 빠르면 열흘 안으로 소식이 올 거야.”
그들이 타고 떠날 배의 크기나 구조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오미가 물었다.
“그런데 혹시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 ?”
세틴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아니, 아무도 안 데려 갈 거야.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앞으로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들인데 내가 빼갈 수는 없지.
그냥 우리 둘 하고 일을 도와줄 사람 몇, 항해에 필요한 사람 몇 정도면 충분할 거야.
대신 제국을 대표해서 여러 가지 교류를 추진할 수 있는 직책과 권한은 받아서 갈 거야.
제국을 떠나서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일을 해야지.”
시오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우리 둘이서만 가면 좀 외로울 것 같기도 해서 말이야.
아무튼 적극적으로 따라나서는 사람이 없으면 굳이 누군가를 데려갈 생각은 없단 말이지 ?”
이렇게 해서 세틴과 시오미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가운데 조만간 제국을 떠날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이튿날 속개된 총독회의에 세틴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가 있으면 논의가 좀 더 원활하게 진행될 수도 있겠지만, 조정 관료들은 한결같이 세틴의 눈치를 보느라 하고자 하는 얘기를 충분히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대신에 오디어스가 황궁에서 제공한 오찬 모임에 참석했다.
세틴이 연회가 마련된 장소에 들어섰을 때, 쉴 새 없이 웃음소리가 이어지며 화기애애하게 나누던 대화가 일시에 끊어졌다.
연회의 주석에는 황태자와 저스틴, 카스텔라가 앉아 있었고, 주변에 황비들 넷과 비언차이를 비롯한 몇몇 내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신혼인 저스틴과 카스텔라를 축하하고, 격려하는 자리라 했으나, 오디어스가 이런 자리를 만든 데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세틴이 총독회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목적이 제일 컸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세틴의 간을 보려고 마련한 자리였다.
오디어스가 세틴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게, 사령관.
자네 말대로 총독회의는 총독들과 조정 대신들에게 맡겨두고 오늘은 우리 집안 사람들끼리 오붓하게 얘기나 나누자고 불렀네.
저스틴은 내 사위이기 이전에 자네 형님이 아닌가.
오늘은 카스텔라와 저스틴의 결혼을 다시 한 번 축하하고 둘의 앞날을 설계하는 자리이니 자네가 빠져서는 안되지.”
세틴이 오디어스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린 후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일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두 분께 제대로 축하의 인사도 못드렸는데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스틴 형은 이제 비할 바 없이 고귀한 황실의 일원이 되셨으니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총독회의를 무사히 마치고 나면 황궁과 황실이 제자리를 잡고, 제국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재정비를 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할 것입니다.
부디 황태자 전하와 저스틴 부마께서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황실이 위계를 바로 세우고 제국의 모범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지원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디어스가 기꺼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말 한 번 잘 했네.
사령관이 황실을 위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저스틴이 제국군에서 보병대장을 일한다는 게 나는 계속 마음에 걸려.
명색이 제국의 부마이고 내 다음 세대에서는 황실의 기둥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그런 직책에 머물러서야 되겠는가.
사령관이 다시 한 번 힘을 좀 써 보게.”
세틴이 뭐라 대답을 하기 전에 저스틴이 나섰다.
“황태자 전하, 지금 제국군에서 제가 보병대장을 맡은 것도 과분한 일입니다.
군에서는 지위로 모든 일을 원활하게 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꾸 지위를 높이면 도리어 제국군의 장군들과 부하들 모두에게서 저 스스로 멀어지는 일이 되기 십상입니다.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그 일을 거론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실로 난처할 뿐입니다.”
오디어스의 안면이 구겨졌다.
“쯧쯧, 이런 못난 사람 같으니.
지금 황도에서 조정 관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귀족들이나 상인 중에 세틴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자가 없어.
제국군 내에서야 말할 필요도 없지.
세틴이 작정하고 하는 일에 어느 누가 감히 딴 마음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내 듣자 하니 세틴이 앞으로는 대외적인 일에만 주력하고 제국군 내의 일은 부사령관에게 일임할 거라 하네.
그럴 때, 자네가 부사령관 자리를 꿰어 차고 앉아서 호령을 하면 누가 감히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자네는 세틴의 친형이니 오죽 뜻이 잘 통할까.
오늘은 나서지 말고 잠자코 내가 하는 말이나 듣고 있게.”
세틴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고 뜻깊은 자리이니 저도 가급적 쓴 소리, 입바른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몇 차례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너무 서둘거나 재촉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직 제국군 본진이 황도로 귀환하지도 않았고, 새로 임명한 부사령관 고딘이 새로운 지휘 체계를 구축하지도 못한 상황입니다.
차차 시간을 두고 같이 지혜를 모아보는 걸로 해두시지요.
사실 그것을 위해서도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기 전에 저스틴 부마를 명확한 후계자로 지명해주시는 겁니다.
그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이견은 없다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추후에 저스틴 형이 제국군 내에서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