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세틴은 저스틴과 상카 만을 데리고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죽거나 다친 병사들의 적지 않아 보였고, 전열이 많이 흐트러진 상황이었다. 시커먼 야행복을 입은 암살자들이 산개하여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에 언뜻 보면 아군 병사들끼리 싸움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세틴이 저스틴과 상카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황이 불리해보이고 기사가 죽거나 병사들이 많이 다친 곳 위주로 빠르게 정리해 주세요. 우리도 흩어집시다.”
세 사람이 개입하자 전황은 급속도로 변해갔다. 이미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저스틴과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상카의 실력은 대단했다. 개입하는 싸움마다 불과 몇 수 만에 암살자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하지만 발군은 역시 세틴이었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포효가 한 번 터져 나올 때마다 한 명의 암살자가 쓰러졌다. 한결같이 단 한 수였다. 세틴은 암살자들을 죽이기보다 무기를 든 팔을 자르고 칼등으로 머리를 가격하여 기절시키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주변의 기사에게 재갈을 물려 제압해두도록 지시했다.
세틴이 암살자 10 여 명을, 저스틴과 상카가 각각 대여섯을 제압하자 전장은 오래지 않아 안정이 되었다. 끝까지 저항하는 암살자들을 기사와 병사들 만으로 충분해 보이자, 세틴은 자신이 제압한 암살자들을 잘 감금해두도록 지시한 후 자리를 떴다.
배를 통해 강변으로 침입한 자들이 거의 진압될 무렵, 군영의 정문에 해당하는 백사장 방면으로 백 명이 넘는 암살자들이 쳐들어왔다. 이번에는 제법 진형을 갖추고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모양새였다.
새롭게 쳐들어온 자들을 지휘하는 자는 밝은 갈색의 가죽갑옷을 입어 눈에 확 띄었는데, 정문에 배치된 기사 두 명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군영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 외에 어두운 갈색 갑옷을 입은 자들이 10여 명으로 중간 지휘자로 보였고, 나머지 암살자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기사 둘을 빠르게 처치한 솜씨로 보아 암살자의 지휘자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셔틀리는 수뇌부를 사수해야 했으므로 세틴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강변 방면에 배치되어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정면으로 속속 증원되면서 팽팽한 전선이 형성되었다. 세틴은 한 명이라도 희생을 줄여야 했기에 곧바로 적의 대장에게 달려들었다.
말 그대로 문답무용. 세틴은 재커드 검법의 두 가지 필살기 중 ‘재커드의 송곳니’를 시전했다. 무려 20 여 보를 도약해서 공중에서 역수로 든 검을 내려찍는 공격이었다. 실전에서 사용하기는 처음이었다.
이것이 ‘마스터조차 알고도 못 막는 필살기’로 알려지게 될 재커드의 송곳니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장면이었다. 적의 대장은 표범인지 호랑인지 모를 거대한 포식자의 아가리에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환상을 보았고, 하늘을 향해 뻗어낸 검이 무색하게 세틴의 외날검에 목이 뚫리고 말았다.
‘적의 대장을 잡았다’는 외침도 없었다. 대장을 잡자마자, 세틴은 암살자들의 진형을 세 번의 연속 돌진 공격으로 헤집었다. 개인이 아닌 집단을 향한 세틴의 돌진 공격은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회전 공격이었다.
눈으로 분간하기도 힘들 만큼 빠르게 전진하면서 회전하는 세틴의 검은 걸리는 것이 사람의 목이든 팔이든 무기든 모조리 토막내버리는 흉기였다. 정삼각형을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돌진 공격에 암살자들의 진형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대장이 죽고 진형의 중심이 무너지자,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사절단이 암살자들을 서서히 압박하며 토벌하는 형세가 되었다.
두 번의 필살기로 전황을 장악한 세틴은 뒤로 물러나 활을 들었다. 전체 전황을 살피며 눈에 띄는 자들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세틴의 화살은 전투 중인 자가 여유 있게 칼로 쳐내거나 쉽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세를 떨치거나 전황을 뒤집을 만한 활약을 할 만한 자는 예외 없이 세틴의 화살을 받았다. 즉사하지는 않아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거나, 화살을 피하려다 전투 중이던 상대에게 당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제는 상황이 거의 장악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 터졌다. 수뇌부가 모여 있던 대형 막사 중앙에서 갑자기 암살자들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몸을 드러낸 암살자 셋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올란드 후작을 향해 돌진했다.
다행히 셔틀리와 흑룡기사 둘이 율리를 근접 경호하고 있었기에 암살자들의 일차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리 의외의 변수가 있다 해도 흑룡기사단은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일인 경호를 하는데 특화된 조직이었다.
비록 올란드 후작에 대한 암살시도는 빗나갔지만, 막사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리를 지르는 자, 밖으로 나가려는 자, 숨을 곳을 찾는 자, 탁자가 뒤집히고, 엉망진창인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다가 앉은 채로 벌렁 넘어져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거윈 백작과 그를 양쪽에서 부축하려던 기사 둘이 암살자들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율리를 처치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한 암살자들이 무차별 공격을 가하려던 차에 고른 대상이 바로 그들이었다. 중요 부위를 가린 작은 천조각 외에는 걸친 게 없는 알몸의 암살자들은 끝이 독수리의 발톱처럼 세 갈래로 구부러진 기형 병기를 들고 있었다. 암살자들의 공격은 누가 손을 쓸 새도 없이 거윈 백작과 기사 둘의 목에 깊이 패인 상처를 남겼고, 그들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사방으로 펴져나갔다.
암살자들은 곧바로 셔틀리에 의해 진압되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땅굴을 파서 수뇌부의 막사에 진입한 것이었다. 오랜 세월 퇴적된 모래톱은 땅굴을 파기에 가장 좋은 땅이었고, 아마도 세 암살자들은 땅굴을 파는 전문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들의 독특한 복장과 무기를 보아도 그러했다.
그림자의 기습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막아냈다고는 하나, 사절단의 분위기는 침통하기 그지 없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거윈 백작이 참변을 당한 것이 컸다. 이 세계의 봉토를 가진 백작이라면 작은 나라의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제국과 공국의 지배를 받는다고는 하나, 단지 명분일 뿐, 자신의 영지에서는 무슨 짓을 하든 참견할 사람이 없는 게 영주들이었다.
사절단은 뒤처리를 위해 주항의 관사에서 이틀을 머물러야 했다. 사망자의 장례와 사후처리, 부상자 치료, 사로잡은 암살자 취조 등이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다른 일들은 정해진 관례에 따라 진행하면 될 일이지만, 거윈 백작의 후계 문제와 생포한 암살자 처리가 문제였다.
거윈 백작은 이미 장자가 후계자로 정해져 있었고, 그가 일행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프라움에 도착하는 즉시 후계 절차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세틴은 암살자들의 취조에 열의를 보였는데, 그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시오미의 행방이었다. 토마스를 비롯해서 각 영지의 취조 및 고문기술자까지 총동원한 심문을 통해 얻은 것은 많지 않았다.
잡힌 암살자들이 최하급이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사절단의 구호 물자를 탈취하려는 시도가 그들의 소행이었고, 단지 혼선을 빚게 할 목적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오미의 행방에 대해서는 그중 하나가 당시 새날의 빛 급습에 참여했고, 시오미가 살아있으며 그들에게 잡혀 어딘가로 압송되었다는 정보가 확인되었을 뿐이었다.
세틴은 시오미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
이전에 브라스트 공국에서 그림자가 크게 활동한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이번 사절단 기습의 충격은 매우 컸다. 실로 작은 전쟁을 한 차례 치른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동원한 암살자의 수, 암살자들의 수준, 마스터에 이른 지휘자 등이 모두 경악할 만했다.
미리 예상한 기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이 너무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막강한 그림자를 상대하면서 상대적으로 희생이 크지는 않았고, 결과적으로 기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는 점이 서서히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런 성공의 중심에 세틴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그림자의 움직임을 파악해낸 능력, 그에 따른 치밀한 대응, 군사적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병영 설치 과정에서 보여준 세밀한 지식과 적절한 배치, 무엇보다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세틴의 무위에 대한 칭송이 귀족들이나 기사들, 일반 병사들까지 화제가 되곤 했다.
사망자와 부상자, 뒤처리를 위해 남겨진 자를 제외하고 30% 가량 줄어든 사절단 행렬은 향후 일정을 최대한 서두르기로 방침을 정하고 그린테일 강을 건넜다. 주항인지라 강을 건너는 나룻배는 많았지만, 크기는 예전에 나바니아로 향할 때 탔던 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행렬의 크기도 몇 배로 불어났기에 강을 건너는 데만 또 하루를 잡아먹었다.
강 건너편 브라스틴쪽 주항에는 브라스틴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올란드 후작과 세틴에게 예를 표하고, 이제 새롭게 거윈 백작이 될 후계자에게 애도를 표했을 뿐, 나바니아 백작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후작 각하, 승전을 축하드리오. 그림자 놈들이 그토록 악랄하고 강력할 줄은 몰랐소. 거윈 백작이 희생당한 일은 애석하나,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 놈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후작께서 무사하시니 이건 대승이라 할 만합니다. 더구나 13 공자께서 활약하신 얘기를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브라스트 공국의 앞날을 위해 이보다 더한 경사가 없을 것이오. 하하하”
브라스틴 백작은 천하태평이었다. 그의 지나치다 싶은 호들갑에 사절단 일행은 대부분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반박할 말도 없고 굳이 나서기도 민망한 눈치였다. 율리가 말했다.
“죽고 다친 수가 적지 않소. 감히 승패를 따질 생각도 없고 그럴 계재도 아니라고 보오. 그보다 브라스틴 경내에서는 별다른 기미가 없었소 ?”
“없습니다. 구호 물자는 속속 무사히 도착하고 있고, 13 공자가 불러온 비로 백성들에게는 생기가 돌고 있소. 서둘러 파종을 준비하고 있는 자들도 있소이다. 지긋지긋한 가뭄과 기근의 끝이 보이니 희망이 싹트는 거요.”
세틴이 말했다.
“내가 비를 불렀다는 얘기는 터무니 없는 낭설에 불과합니다. 그럴 능력이 있다는 말도 믿지 않습니다. 백작까지 그런 말을 하니 내가 부끄럽습니다.”
“하하하. 어쨌든 비가 오는 것은 좋은 일 아니오. 백성들이 13 공자가 비를 불러왔다고 믿는 것도 나는 그다지 나쁠 건 없다고 보오. 그렇지 않소 여러분 ?”
대부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 적극적으로 반박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도 없었다. 세틴은 아무 말이나 마구 질러대는 것처럼 보이는 브라스틴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능구렁이로 보고 있었다. 몇 차례나 사절단을 골탕먹이려는 수작을 부리고도 혼담까지 꺼내드는 뻔뻔함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사절단 행렬은 순조롭게 길을 재촉할 수 있었다. 오스틴과 놀란 갈림길에서 놀란 백작의 일행이 합류했고, 오스틴에 도착하면서 모든 백작이 동행하게 되었다.
12 폭포 가도와 하늘 요새, 그린드래곤 호수를 거쳐 사절단 일행이 프라움에 도착한 것은 봄기운이 완연한 4월 초였다.
멀린 대공은 브라스트 궁문 밖에서 사절단과 6 백작을 맞이했다. 자식들에게 엄격하고 냉담한 그답게 세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한편, 올란드 후작과 관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6 백작들을 환대했다. 누구보다 거윈 백작의 장자에게 장시간을 할애해서 애도를 표하고 백작위를 승계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배려하겠다는 약속까지 해줬다.
조스핀과 세틴의 누이 요리는 세틴의 양 팔을 하나씩 부여잡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몇 달 사이에 부쩍 자란 키에 다소 수척해보이는 얼굴을 어루만지랴 흐르는 눈물을 닦으랴 어쩔 줄 모르는 그녀들이었다.
궁성 앞에서 공식적인 환영 행사가 마무리되고 순행 사절단의 해산이 선언되고, 6 백작과 그의 일행들에게 숙소까지 배정되고 난 이후에야 멀린은 단독으로 세틴을 마주했다.
“잘 해주었다. 내 생전에 아들에게 이렇게 만족스러운 기분은 처음이야. 이리 오너라. 한 번 안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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