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린의 저주, 재커둠의 축복
족히 두 시간 넘게 이동해서 도착한 두 번째 유적지는 광산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인간의 손이 많이 간 동굴이었다. 개략적으로 현대의 온도계 모양처럼 입구의 광장에서 안쪽으로 긴 복도가 나 있는 형태였는데. 광장과 복도에는 주변에는 문 없는 방들이 여럿 마련되어 있었다.
원형 광장에는 푸석푸석한 동물의 뼈와 깨진 토기들이 나뒹굴고 있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물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들에는 부식되어 원래의 용도를 알 길 없는 도구들이 놓여 있었는데 대부분 뼈나 돌, 흙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마빈이 돌아다니며 군데군데 설치된 횃불 거치대를 밝히니 동굴의 전체적인 형태가 드러났다. 횃불에서 매캐한 기름 냄새가 퍼져나가자 이 큰 동굴의 환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 궁금증이 절로 일었다. 해답은 복도 맨 안쪽 제단이 설치된 정방형의 큰 방에 있었다. 안쪽의 커다란 창을 통해 하늘이 보였고, 밖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해안가 절벽의 중간쯤으로 보였다.
제단 위에는 무언가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였으나, 현재는 텅 비어 있었다. 제단은 움푹 패인 반구형의 구덩이 중앙에 있었고, 반구형 구덩이 안쪽을 돌아가며 폴린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전보다 길이도 길고 내용이 어려운지 세틴은 한 시간 가까이 침중한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하고 미간을 좁혀가며 몰입했다. 마침내 세틴의 입에서 해독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재커둠의 은혜를 저버린 자 누구인가
재커둠의 사랑을 배신한 자 누구인가
설원의 순결함을 잊은 자 누구인가
진정 잊었는가 재커드의 포효를
진정 잊었는가 빛나는 눈길을
지우려는가 재커드의 발자욱을
재커둠이 사람의 피와 살을 먹으라 했던가
재커둠이 형제를 차별하고 굶기라 했던가
재커둠이 형제를 도구로 쓰라 했던가
대지의 유혹에 굴복한 자들에게 저주를
대지의 아첨에 넘어간 자들에게 타락을
대지의 반란이 재커둠의 약속이리니
대지에 뿌린 씨앗을 거두지 못하리라
대지에 뿌린 정액은 말라가리라
땅의 사람들은 결코 형제가 되지 못하리라
재커드가 없어도 재커둠이 우리의 재커드
설원이 아니라도 재커둠이 우리들의 설원
재커둠이 없어도 영원한 우리의 어머니
젖보다 달콤한 빗물이 그들에겐 악몽
부드러운 햇살마저 그들에겐 저주
사랑스러운 바람도 그들에겐 재앙
재커둠을 떠난 자들은 형제가 아니리
재커둠의 사랑을 잊은 자들의 가슴도 말라 가리라
재커둠의 은혜에 등돌린 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슬프고, 분하고, 원망 가득한 노래였다. 왠지 세틴의 낭송이 원래의 뜻을 제대로 살려주는 느낌이었다.
일행이 각자 감흥에 젖어 할 말을 잊었다. 침묵 끝에 마빈이 말했다.
“폴린 왕국의 멸망을 예언한 내용처럼 들리는군요. 폴린어의 원래 발음은 알 길이 없다고 들었는데, 원음으로 읽는다면 느낌이 더 강렬했을 것 같소.”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 부분을 아쉽게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폴린 왕국 자체에서도 폴린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원음을 알 방법이 없죠. 폴린어 문서도 왕국 초기에 작성된 것들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에요.”
세틴은 과도하게 집중한 탓인지 글의 내용에 감동한 것인지 무척이나 지쳐 보였고 상기된 표정이었다. 셔틀리가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공자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입니다.”
야영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세틴은 이미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나의 흐름에 민감한 시오미는 세틴이 첫 번째 비문을 낭송했을 때부터 세틴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차의 좌석을 펼쳐 세틴을 반듯히 눕히고 난다와 완다에게 팔다리를 주무르도록 했다. 물잔을 들고 주문을 외워 차갑게 식힌 후 바네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수건에 물을 약간 적셔서 이마에 올리고 자주 갈아주세요. 물을 조금씩 입안으로 흘려 넣어 주시구요.”
그리고는 세틴의 곁에 정좌한 후 오른 손을 세틴의 아랫배 위에 올렸다. 세틴의 뱃속에서 세차게 맥동하는 무언가가 시오미의 손에 잡혔다. 이런 상황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그저 시오미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시오미가 맥동하는 무언가를 어르고 달래 세틴의 아랫배에 잡아두려 애쓰는 동안 꽤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시오미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때 마차 밖에서 마빈의 말이 들려왔다.
“이보게. 13 공자는 괜찮은가 ?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게.”
시오미가 말없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바네사가 대답했다.
“공자께서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아직 외인에게 보일 상황은 아닙니다. 저희들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곧바로 백작님께 알리겠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빈이 물러가자 완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저주일까요 ?”
시오미가 미미하게 고개를 저어 부정하는 뜻을 나타냈고, 바네사는 검지를 입술에 대어 침묵을 주문했다. 완다가 목을 움츠리며 다시 팔다리 주무르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오미가 애쓴 덕분에 세틴은 야영지에 도착하기 직전에 정신을 차렸다. 다행하게도 세틴은 깊은 잠이라도 자고 난 사람처럼 개운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시오미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뭐라 형언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깃든 말이었다.
“네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세틴이 짐작하기에 비문에 담긴 주술은 비문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며 낭송을 할 때 작동되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낭송을 마칠 때 쯤 비문에서 흘러나온 강력한 기운이 세틴에게 스며들었다. 세틴의 몸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세차게 맥동하던 기운은 세틴의 중심을 잡고 있던 오러와 충돌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몸에서 일어나는 격랑을 견디다 못한 세틴이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시오미가 두 기운이 융합되도록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세틴이 ‘재커드의 혼’이라 이름 붙인 그 기운은 결국 단전에 있는 오러 코어와 달리 명치 부근에 둥지를 틀었다. 재커드의 혼은 동면에 든 짐승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세틴은 자신의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거칠고 난폭한 재커드의 혼이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셔틀리로부터 세틴의 심상치 않은 상태에 대해 보고 받은 후작이 곧바로 세틴을 소환했다.
“공자, 별 이상은 없는 것이오 ? 이제라도 유물 답사는 중지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듣기에 유물이 가진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는 하지만, 나중에 전문 탐사대에 맡기는 편이 어떨지......”
“저는 일정이 허락하는 한은 계속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유물에 상당히 강력한 주술이 걸려있고, 비문의 내용이 슬픔, 분노, 원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주술은 이미 극복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비문에 걸린 주술은 부정적인 내용과는 달리 읽는 사람을 고무하고 각성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폴린 왕국은 브라스트 공국의 또 다른 뿌리입니다. 오늘 두 차례 비문을 본 것만으로 폴린 왕국의 초기 역사와 그 근원에 대한 이해가 비교할 바 없이 높아졌습니다. 사울 선조의 행적을 이해하는 것 못지 않게 폴린 왕국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음에 다시 이런 기회가 있을지도 불확실하지요.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약의 경우가 있더라도 옆에 뛰어난 마법사가 둘이나 있습니다. 마나를 각성한 자들은 여러 가지 기운을 다루는 데 능숙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법사가 둘이요 ?”
“아, 놀란 백작도 마법사입니다.”
“허 참. 별난 사람이구려. 아무리 대공께서 마법사를 단속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백작령의 영주가 마법을 배울 생각을 하다니. 혹시 마빈이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일을 꾸민 것은 아니겠지요 ?”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폴린어에 대한 자료가 워낙 희귀한 데다 대부분이 브라스트 아카데미의 도서관에 있고, 연구를 하는 사람도 아카데미의 몇 분 교수들 뿐입니다. 학장님이 지대한 열정을 갖고 계셔서 몇 사람이 흥미를 보일 뿐 실제로 깊이 있게 연구한 사람은 학장님이 거의 유일하죠. 폴린어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유물은 한낱 돌덩이에 불과합니다. 놀란 백작이 나 하나를 해치기 위해 일을 꾸밀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무엇보다 놀란 백작이 진정 믿을 만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통이 작은 사람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간사하게 일을 꾸밀 사람은 아니지요.”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빈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타당한 것 같소. 하지만 공자가 너무 쉽게 사람을 믿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오. 티리아도 서스텐도 상카도 시오미도 마빈도, 지금까지는 결과가 나쁘지 않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오. 언제든지 표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이고, 속내를 감추는데 능숙한 사람, 목적을 위해서라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는 연기파도 있지요. 딱히 누구를 지목해서 하는 말은 아니오.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노파심으로 생각하고 각별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뒤통수가 얼얼하도록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저의 천성입니다. 언제라도 깨우침을 주시면 결코 고깝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늘 감사할 따름이지요.”
“사람을 쉽게 믿고 단점보다 장점을 높게 쳐주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은 성품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의 품성이지요. 평생 ‘기름장어’들과 씨름하며 의심병이 도진 사람의 말이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공자가 가는 길을 응원하겠습니다. 사악한 사람들이 들러붙는 것은 나나 슈타인, 바네사 같은 사람들이 막아야 할 일이지요. 슈타인과 바네사도 인생의 달고 쓴 맛을 볼 만큼 본 사람들이니 믿고 맡겨도 될 것입니다.”
기실 올란드 후작은 멀린의 아들 중에서 적당한 후계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사절단에 따라 나선 13 공자에게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고, 이번 순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개인적으로는 13 공자를 검증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까지는 13 공자가 기대 이상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세틴 일행은 이틀에 걸쳐 유적지 다섯 곳을 더 돌아보았다. 발견된 모든 유적들을 본 셈이었다. 유적들은 동일한 집단이 남긴 것이 분명해 보였고, 한결같이 비문이 하나씩 발견되었다.
야영지로부터 거리 순서로 이동하며 답사를 했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비문의 내용들도 얼추 시간순으로 들어맞았다. 처음 답사한 동굴에서 시작해서 이동하면서 생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비문의 내용은 뒤로 갈수록 격해지고, 지독한 분노와 절망으로 채워졌다. 유적을 남긴 무리들은 폴린 왕국을 세운 무리와 대립하다 결국 소멸했을 것으로 보였다. 동굴은 뒤로 갈수록 규모는 작아지고, 더욱 은밀하고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을 만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계속 비문에 담긴 주술의 힘을 흡수한 세틴은 시오미 덕분에 어느 정도 ‘재커드의 혼’을 통제할 수 있었다. 첫날처럼 정신을 잃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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