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여행
세틴은 어렵게 만난 울라프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황도에서의 일정이 빠듯했다.
이미 8 일 후로 총독회의 날짜가 다가와 있었다.
세틴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회의 당일에나 황도에 가게 된다면 꽤나 낭패스러운 상황이 적지 않을 터였다.
살면서 마음이 맞고 뜻이 통하는 사람과 만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 있으랴.
세틴은 울라프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많았고, 울라프에게 듣고 싶은 얘기도 많았으며, 그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울라프에게 어쩔 수 없이 황도로 급히 돌아가야 하는 사정을 말하며 큰 아쉬움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울라프가 자신의 부관들에게 몇 가지를 묻고 난 후에 세틴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사령관님께 명마가 있어 황도에서 여기까지 닷새 만에 달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다시 말을 달려 돌아가셔야 한다고 하니 걱정이 앞섭니다.
확인을 해보니 황도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가 아가란 강에 있는 아르가스라고 하더군요.
제게 빠른 배가 있어서 여기서 아르가스까지 사흘이면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아르가스에서 황도는 조금 무리를 하면 이틀에 가실 수 있을 터이니, 저와 함께 배를 타고 가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사흘 동안 배에서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고, 사령관님도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여유가 찾을 수 있습니다.”
세틴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육로는 거의 직선에 가까운 반면, 세벤에서 배를 타고 자군드라 강을 내려갔다가 바다를 빙 돌아 아가란 강을 거슬로 올라가야 아르가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국을 거의 반바퀴 도는 거나 마찬가지인 항로인데 사흘만에 주파할 수 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그렇게 빠른 배가 있습니까 ?”
울라프가 웃으며 말했다.
“제 배는 베얀크루에서부터 가져왔는데, 마력 기관을 사용하는 중형선입니다.
이곳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범선이나 노선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요.
동부왕국에서도 마력 기관을 개발하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는 소형선만 가능할 뿐입니다.
중형선임에도 원양 항해가 가능한 이유도 바로 강력한 마력 기관을 장착했기 때문이지요.
저를 믿고 한 번 맡겨주시지요.
편안하고 멋진 여행이 될 것입니다.”
사실 세틴은 울라프의 말에 혹하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걱정도 되었다.
이미 제국에서 으뜸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대부분의 일들을 주도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선뜻 바다 여행을 따라 나서기가 쉽지는 않았다.
세틴 자신도 그러하니 주변의 장수들이나 참모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울라프가 보는 앞인지라 직접 대놓고 말은 못해도 어떻게든 세틴이 울라프와 함께 배에 오르는 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사실 배에 대한 현대적 지식이 있는 세틴의 입장에서 쾌속선을 타고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흥미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유혹적인 제안은 ‘울라프와의 사흘’과 휴식이었다.
결국 세틴은 극구 반대해 마지 않는 고진을 비롯한 장수들을 설득하여 울라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많은 수행원을 동반하기에는 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고진과 무위가 높은 장수들 대부분이 동행하는 것을 허락하고서야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따.
어차피 동부왕국과의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제국군의 본영이 세벤 항구에 계속 머물 이유는 없었기에, 함께 황도로 가서 동부왕국과의 문제가 매듭지어지는 즉시, 제국군을 황도로 불러올릴 계획이었다.
울라프의 배는 ‘놀란 그리핀’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핀은 베얀크루에서도 오래 전에 사라진 전설 속의 거대한 새였다.
그리핀은 부리로 사람의 사지를 찢어 죽일 정도로 포악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그리핀이 무언가에 깜짝 놀랐을 때 취하는 공격적인 자세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몸이 굳어지게 만들 정도였다고 전해졌다.
놀란 그리핀호는 중형선 치고는 앞뒤로 길고 폭이 좁아 날렵한 데다, 돛도 없고 노가 삐죽삐죽 나와 있지도 않아서 매끈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갑판 아래쪽은 모두 기관실과 화물창이 자리하고 있었고, 갑판 위로는 선실이 일렬로 늘어선 형태였다.
십 여 명의 제국군 장수들이 동승하다 보니, 울라프 측의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울라프 측에서는 선원들과 잡일을 돕는 하인들 외에 누구도 동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동행하게 될 사람들을 점검해 본 제국군 장수들은 그제서야 울라프가 무슨 일을 꾸미고자 한들 할 수 없는 상황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항해의 시작은 자군드라 강을 따라 내려가는 항로여서인지 배의 엄청난 속도감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핀호는 하루도 지나기 전에 자군드라 강을 빠져 나왔고, 바다로 나오자 제법 높은 파도가 치고 있음에도 나는 듯이 달리면서도 범선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안정감을 유지하는 신기한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세틴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울라프를 거의 놓아주지 않았고, 끝도 없는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울라프의 고향인 베얀크루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 해서 동부 왕국까지 오게 되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동부 왕국에 정착했는지, 울라프가 여행했던 세계의 다른 지역이나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 등 사흘이 아니라 석 달을 들어도 부족할 만큼 이야깃 거리가 많았다.
울라프는 간혹 둘이서 만든 협상안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자 하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세틴은 그럴 때마다 마치 철없는 아이처럼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으로 다른 이야기로 돌리곤 했다.
실제 세틴은 세부적인 실행 방안에 대해 직접 나설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그런 일에는 놀란과 완다가 제격이어서 울라프의 짝으로 붙여주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울라프의 얘기들에 꽂혀있는 세틴에게 그런 얘기들은 조금 미뤄두고 싶은 성가신 얘기에 불과했다.
세틴이 울라프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세틴은 제국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면 시오미와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스물도 안 된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닳고 닳은 조정의 대신, 관료들과 씨름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울라프라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 모두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세틴을 상대하고 있는 울라프조차도 세틴이 자신의 얘기들을 청해 들으면서 세계 여행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들을 구체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제국군 사령관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건가 ?’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리핀호에 처음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에 대한 질문을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세틴은 그리핀호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현대의 쾌속 여행선을 몇 차례 타 본 경험이 있는 세틴에게 그리핀호가 그렇게 빠른 배도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울라프가 어찌 짐작할 수 있었을까.
세벤 항을 떠난 지 사흘 째, 점심 무렵에 이미 그리핀호는 아르가스 항을 앞두고 있었다.
울라프와의 좋은 시간도 끝나가는 셈이었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아르가스에 도착한다는 통보를 받은 세틴이 울라프에게 말했다.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울라프 대사에게 질문 세례만 퍼부었지요 ?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우리가 작성한 합의안을 제국 조정에서 관철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의식적으로 세부 사항에 대한 논의를 피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교역과 교류에 관한 일은 현재 군상 체계를 구축한 장본인인 놀란 경과 완다 장군이 맡게 됩니다.
세부 사항은 그들과 상의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제가 황도에 가서 합의안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 곧바로 놀란 경이 울라프 대사를 찾아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빠르고 편한 여행을 하게 해주셔서 너무 고맙고, 또한 제게 들려주신 많은 이야기들도 제게는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보물같은 얘기들이었습니다.
동부 왕국에 돌아 가셔서 혹시 합의안을 관철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해 주세요.
어떻게든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제가 협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울라프가 두 손을 내밀어 예를 표하며 말했다.
“사령관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장담할 일은 결코 아니나, 저도 어떻게 해서라도 사령관님과 제가 그린 그림이 완성될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불평 불만을 가질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아시다시피 동부왕국의 유력자들은 대부분 타고난 상인들입니다.
제국 전역과의 자유로운 교역, 이 하나 만으로도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합니다.
제가 포라쥬 왕국에서 작으나마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상업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여러 제도나 정치적인 제한을 풀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고, 또한 특산물의 가공과 교역에 필요한 여러 지식들을 전수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왕국들도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국 전역에서 자유롭게 영업활동을 할 수 있다는 희망 하나 만으로도 앞장 서서 불만세력들을 잠재울 사람들이 적지 않습닏나.
또한 제국에 비해 동부 왕국은 사실 명분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 않은 편입니다.
말로는 이쪽에서 사과를 하지만, 어떤 명목으로든 실질적인 배상은 우리가 받게 된다면 만족할 만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말로 설득을 해도 고집불통인 사람들이야 있게 마련이지요.
제가 그런 사람들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관철시켜 보겠습니다.
제가 사령관님께 가장 크게 감탄한 것은 사령관님께서 제국과 동부 왕국의 백성들을 아무런 차별없이 생각하신다는 점입니다.
제게는 동부 왕국, 그 중에서도 포라쥬 왕국이 제 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지만, 저도 앞으로 동부 왕국과 제국의 백성들을 똑같이 생각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건승을 빌겠습니다.
사령관님과의 만남이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세틴은 울라프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참으로 상냥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저 역시 울라프 대사와의 만남이 무척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자주 만나기는 쉽지 않겠지만, 조금 여유가 생기면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동부 왕국으로 한 번 찾아 뵙겠습니다.
몸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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