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파티
세틴의 아카데미 조기 졸업을 축하하는 기념 파티는 성대하게 열렸다.
천 명은커녕 1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홀을 갖춘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파티는 실외에서 점심 무렵에 열리게 마련이었다. 이 세계에는 건축에 쓸만한 석재가 거의 나지 않았고 높은 건물을 지탱할 철재도 매우 귀해서 거의 모든 건물이 목재와 벽돌, 흙을 이용한 단층 건물었기에 2 층 이상의 건물도 극히 드물었다.
궁내에서 일하는 신료들과 귀족들, 수도 프라움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력 인사들이 대공의 초대를 받아 파티에 참석했고, 대공의 일가 친척들만 해도 2백명이 넘어갔다. 천여 명이 모인 연회 장소는 마치 원형 경기장과 유사한 형태였다. 원형으로 어깨 높이의 단과 차양막을 설치해서 유력한 자들이 자리하고, 그 안쪽에 그밖의 사람들의 식탁이 마련된 형태였다. 한쪽에는 3 미터가 넘는 높은 단을 쌓고 대공 일가를 비롯한 특별한 손님들이 자리하였다.
드높은 나팔소리와 함께 멀린 브라스트가 입장하면서 파티가 시작되었다. 멀린은 등장하면서 곧바로 연단에 섰다.
“오늘 13 공자 세틴 브라스트가 아카데미를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일찍 마치게 된 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해보았소. 원래 졸업 기념 연회는 그저 가족끼리 모여서 조촐하게 치르는 경우도 많은데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는지 궁금한 분들도 많을 줄 아오. 하지만 대공가의 아카데미가 그리 녹녹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오. 검술, 궁술, 체술, 경학, 역사, 정치 등 그리 편하지 않은 기준을 충족해야 할 과목만 해도 열 가지가 넘고, 음악과 미술 같은 문화 소양은 말할 것도 없소. 14 세에 졸업을 한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내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소. 솔라스 경전 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조사 하나 틀리지 않고 자신있게 암송할 수 있는 분은 손을 들어보시오.”
멀린은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사 암송에 자신이 있다 한들 대공의 흥을 깨는 줄 뻔히 알면서 손을 드는 바보는 없을 것이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군. 물론 솔라스 경전은 모든 귀족들의 귀감이 되는 경전인데 암송할 수 있는 분은 많을 것이오. 여러분들도 소시적에 달달 외우던 기억이 없는 분이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 하하하”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놀라지 마시오. 세틴은 열 살에 솔라스 경전을 모두 암송하셨다오.”
다시 한번 좌중에서 탄성이 울렸다.
“대공인 나도 브라스트 가문의 아카데미 시절을 떠올리면 치가 떨릴 때가 가끔은 있어요.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던 선생님들의 질타와 재촉에 시달리던 때의 악몽을 40년이 지난 요즘도 가끔 꾼다오. 졸업을 위한 평가 기준은 어찌나 까다롭던지...... 과목 당 많게는 예닐곱이나 되는 선생 중에 한 명만 인정을 하지 않아도 통과할 수가 없소. 나도 16 세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마칠 수 있었지. 사실 대부분은 18 세, 상당수는 스물이 되어서야 간신히 졸업을 한다오. 그러니 겨우 열 네 살에 졸업을 하게 된 우리 세틴을 여러분께 자랑하고 싶어 하는 내 심정을 헤아려 주기 바라오. 아직도 내가 너무 유난을 떤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졸업파티치고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많은 분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소. 예순을 넘기면서 나는 해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으니 이제 슬슬 대공가의 후계를 생각할 시점이 되었지. 따라서 오늘을 기점으로 다음 대공이 될 브라스트 대공가의 소가주를 뽑는 절차에 돌입할 것이오.”
멀린의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소가주 선발은 가법에 따라 엄격하게 이루어질 것이오. 물론 모든 것을 떠나서 차기 대공은 내가 정하지. 소가주 선발에 대한 가법의 제 일 조항이 무엇이냐. 바로 가문 밖의 세력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오. 특히 외가나 처가의 힘에 의지하려는 공자는 일 순위로 자격을 박탈할 것이오.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다들 충분히 짐작하리라 믿소. 쓸데없이 대공가의 후계문제에 개입하려는 자가 있다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내가 똑똑히 보여줄 것이오. 지금 제국이 혼란스러운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분도 아실 것이오. 온갖 세력들이 차기 대권을 노리고 뛰어들어 제각기 지지하는 황자들을 내세워 난장판을 벌이고 있으니 나라 꼴이 어찌 되고 있소 ? 브라스트 대공가의 가법이 지엄함은 익히 알고 있으리라 믿소.”
13 공자의 졸업 기념 파티에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했던 연회장의 사람들은 멀린의 얘기에 무거운 긴장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무엇보다 대공이 하필 13 공자의 졸업파티 겸 성인식에서 후계문제를 거론했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대공이 은연중에 13 공자를 후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지레짐작도 가능했다.
멀린이 연설을 이어갔다.
“내 대의 소가주 선발은 3 년의 기한을 두도록 하겠소. 그 동안 물망에 오른 공자들은 여러 가지 시험을 받게 될 것이오. 결과에 따라 정확히 3 년 후에 소가주를 발표하겠소. 자, 이제 할 얘기는 모두 끝났으니 파티를 즐겨주기 바라오. 세틴, 13 공자는 내 앞으로 나오라.”
준비하고 있던 세틴이 한껏 차려 입은 화려한 복장으로 멀린 앞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어서라. 이제부터는 나와 황제 및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아도 된다. 세틴, 그대는 오늘 부로 브라스트 대공가의 13 공자가 되었다. 왜 13 공자냐. 사실상 막내나 다름 없는 네가 열 셋째 아들이어서가 아니다. 대공가의 정식 공자로 인정받는 것이 열 세번째여서 13 공자이다.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한 몇몇 형들은 물론이고, 나이가 스물을 넘겨 결혼이라도 시키려고 억지로 공자 칭호를 붙여준 아들들도 적지 않다. 어쨌든 순서에 상관없이 모든 공자들은 신분상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앞으로 브라스트 가문의 공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처신하도록!”
멀린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집사가 언뜻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검을 들고 나와 멀린에게 전해주었다.
“나는 새롭게 공자로 탄생한 아들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었다. 세틴에게도 마땅히 가장 어울리는 선물을 주어야겠지. 이 검은 대공가의 시작이자 뿌리이신 사울 브라스트 대공께서 마지막 전투에서 획득한 이후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외날검이다. 외날검이 브라스트 검술에 잘 어울리지는 않고 좀 가벼운 감이 있어서 쓰는 사람이 없었다. 네가 쓰기에 적합할지는 나도 판단하기 어려우나 기념으로 보관해도 좋고 외날검에 어울리는 검술을 익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멀린의 선물은 보기에 따라 그 뜻이 무엇인지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브라스트 대공가의 초대 가주인 사울 브라스트의 유물이라는 점에서는 많은 아들 중에서 세틴에게 선물한 의도가 있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대공가를 대표하는 검술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검을 왜 굳이 세틴에게 주는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자, 이제 검을 뽑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을 호강시켜 주거라.”
외날검은 아직 한창 성장하고 있는 세틴이 뽑아 들기에도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일반검보다 짧은 편이었다. 세틴을 검을 들어 세 방향을 향해 한 번 씩 들어올리자, 연회장 여기 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길이는 짧아도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고, 직선으로 쭉 뻗은 검신과 두툼한 검배(劍背, 칼등)는 언뜻 보기에서 무엇이든 썰어버릴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뾰족한 삼각의 검첨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압권이었다. 사람들은 저 검으로 찔러서 뚫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틴이 한동안 선보이던 외날검을 수납하자 멀린이 말을 이어갔다.
“내가 왜 세틴에게 이 검을 선물했는지 쓸데없는 입방아는 삼가도록 ! 내가 주고 싶어서 주었고 세틴에게 어울리는 검이라 주었소. 그뿐이야.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멀린 브라스트는 당대의 검성이라 불리고 있소. 겸손을 떨고자 해서가 아니라 허명일 뿐이오. 실상 나는 전쟁다운 전쟁을 지휘한 적도 없고, 참여조차 해본 적이 없소. 태평성대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오. 몬스터 사냥이야 지겹도록 했지만, 원래 검술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한 무술이지 몬스터 사냥에는 적합하지도 않아.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오. 이 몸은 늙어가는데 세상은 빠르게 전란의 기운이 퍼져나가고 있소. 브라스트 대공가의 충성스러운 백성과 신하들이여. 그리고 내 아들들아. 오늘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이야. 태평성대는 끝났다. 다가오는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오. 세틴에게 검을 선물한 뜻이 바로 그것이라오.”
멀린이 길었던 연설이 끝나고 사람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퇴장하자, 세틴은 하루 종일 꽤나 부담스러운 주인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분과 직위에 따라 정해진 순번대로 세틴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갖가지 소소한 선물을 바치는 사람들이야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지만, 역사나 정치에 관한 진기한 서적들이 그나마 세틴을 흡족하게 하였다. 그런 책을 선물한 사람들은 세틴 따로 메모를 해가며 기억해두었고, 책에 대해서 몇 마디나마 대화를 나누었으니 그들은 세틴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셈이었다.
세틴이 끝까지 의연한 자세로 인사치레를 하는 사이, 어느덧 연회장은 흥겨운 놀자판으로 변해 있었다. 멀린의 연설을 들으며 자못 숙연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하게 바뀌었다.
황제가 병석에 들면서 날로 흉흉하게 변해가는 제국의 상황은 어쩌면 이들에게는 남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명목상 제국에 속해 있을 뿐 사실상 독립적인 국가나 다름없는 브라스트 대공령은 공공연히 ‘공국’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러니 제국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우리는 태평성대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틀리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파티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세틴과 같은 어머니를 둔 3 공자 제임스였다. 이미 세간에서 ‘안락공자’라 불리며 유명한 난봉꾼인 그는 자신의 집에서 키운 가무단까지 데리고 와서 왁자지껄하게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제임스가 선물이라고 건네준 것도 책은 책이었는데, ‘이젠 어른이 되었으니 이런 것을 봐도 된다’고 귓속말을 하며 준 책이 삽화가 들어간 성애소설이었으니, 멀린이 그를 내놓은 자식 취급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스핀이 결혼하고 몇 년 사이에 정확히 2 년 터울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제임스는 그중 두 번 째였다. 가법에 따라 결혼하고 일찌감치 분가하여 궁을 나간 제임스는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의 두 아들이 세틴과 아카데미에서 같이 수학했는데 둘 다 세틴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아버지가 그 모양이니 아카데미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지 못해 아카데미에 나오기는 하지만 노는 것에만 온정신이 팔린 자들이었다.
멀린과 함께 자리를 떴기에 망정이지 조스핀이 제임스의 그런 모습을 봤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남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틴은 그런 제임스가 도리어 고마웠다. 멀린의 뜻대로 파티가 계속 숙연하게 흘렀다면, 오늘의 주인공이 세틴에게 너무 많은 시선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고, 뒷말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세틴으로서는 차라리 시끌벅적한 놀자판을 만드는 것이 부담을 덜어주는 셈이었다.
세틴의 졸업 기념 파티 겸 성인식은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날의 파티가 세상에 거친 바람이 몰아치는 신호탄이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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