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다
제국 황실에서 그토록 빨리 자신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나설 줄 몰랐던 것이 모그란데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는 동부왕국군의 도착 시점에 맞춰 페링 전선에 합류하려고 시간을 맞추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동부왕국군이 제국에 진입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모그란데가 동부왕국군과 연합해서 우살리드에게 공격을 가하고, 바람대로 승리를 거두기 전에 조정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이미 전투에 참가한 상태에서 동부왕국군이 모그란데가 자신들을 속였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돌이킬 방법이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세틴이 그의 행동과 계획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조정에서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 모그란데에게 치명타를 안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세틴, 모그란데, 우살리드 3 자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형국에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형국이기도 했고, 그나마 가장 갈 길이 바쁘다 할 모그란데는 동부왕국군의 미온적인 태도로 전투를 개시할 여건이 아니었다.
서서히 훈풍이 불어오고 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3 월 말이 되자, 모그란데가 무슨 수를 썼는지 알 수 없으나, 동부왕국이 전쟁에 적극적인 자세를 띄는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런 어느날 밤, 모그란데의 군영에서는 대규모 탈주 사건이 일어났다.
시오미를 비롯한 마법 병단 전원과 베그던과 그를 따르는 영주 둘, 그리고 그들의 영지군들이 깊은 밤을 틈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모그란데의 군영에서 하라무스 병참까지는 불과 2-3 일 거리였다.
모그란데의 탈주군이 하라무스에 도착했고, 미리 통보를 받은 세틴과 주요 간부들이 기지 밖까지 마중을 나갔다.
베그던 백작과 시오미가 일행을 대표해서 제국군에게 정식으로 투항을 요청했다.
세틴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임은 물론 특히 베그던 백작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훗날 북부의 백성들도 베그던 백작님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법 병단 여러분도 열렬히 환영합니다.
일단 오늘은 하라무스에서 하루 편히 쉬시고, 내일 천천히 향후 거취에 대해서 의논해보기로 합시다.
미리 통보를 받아서 조촐한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어서 들어갑시다.”
세틴은 연회에서 현재의 전황이나 계획 등에 대해서는 일체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이번에 탈주한 주요 인사들 개개인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냈으며, 제국군의 간부들과도 개인적인 교분을 나눌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세틴은 탈주한 이들을 굳이 이번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본인이 특별한 이유로 꼭 참전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게 아니라면 전투를 강요하지 않으려 했다.
베그던을 비롯한 북부 영지군들은 하루 아침에 자신의 형제와도 같던 사람들과 싸움을 벌이기 난처한 입장임을 고려했고, 마법 병단에 대해서는 원래 세틴이 굳이 전쟁에 마법을 동원할 필요가 있을지 부정적인 편이었다.
세틴은 오히려 마법사들이 실용 마법 연구에 몰두해서 마법 무구를 개발하는데 주력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회 내내 참전에 대한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었고, 북부의 사정이나 풍습 등을 화제로 삼거나, 마법의 활용에 대해 시오미와 나눴던 얘기처럼 다양한 응용에 대해 질문을 하곤 했다.
세틴에게서 이런 입장에 대한 언질을 미리 받았던 제국군의 간부들도 일체 전쟁을 입에 올리지 않고, 세틴과 비슷한 화제나 무술, 무기, 결혼문제 등등 다양한 얘깃거리로 웃고 즐길 뿐이었다.
시오미가 모그란데를 떠나올 때, 장문의 편지를 남겼다.
‘양부께 부족한 딸이 마지막으로 작별의 인사를 올립니다.
오늘 이렇게 떠남으로 부녀 간의 인연이 끝나게 되니, 저의 마음도 답답하고 쓰리기 짝이 없습니다.
그동안 저를 친딸 이상으로 귀애하고 많은 것들을 양보하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천애 고아로 자라나 어버이처럼 따르던 스승에게 버림받은 저를 거두어 주시고, 한 명의 마법사로서 영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심에 늘 깊이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동부왕국 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를 저에게 미리 알려주거나 상의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양부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동부왕국을 끌어들여 그렇지 않아도 혼란이 극에 달한 제국을 더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부녀의 인연마저 외면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서든 양부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을 벌이셨습니다.
떠나는 마당에 저에게는 그저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하지만 설사 양부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승승장구하신다 한들 제가 돌아오는 일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빌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양부께서 부디 일신이나마 평안하고 장수하시는 것 뿐입니다.
이만 바쁘게 줄입니다.
불효녀 시오미 올림’
다음날 아침, 세틴은 베그던과 북부의 영주 둘을 먼저 면담했다.
베그던이 무인답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가 제국군에 편입하여 전쟁에 참여하여 한 손이라도 보태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우리와 함께 탈주한 병력이 못 해도 1 만은 되니 적지 않게 도움을 줄 수 있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지 사령관께서 가지고 계신 복안이 있으시오 ?”
세틴이 잠시 답을 미루고 베그던과 두 영주들을 둘러 보았다.
“사실 며칠 전에 시오미로부터 세 분께서 함께 탈주를 감행하실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생각을 해두었습니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주적은 바로 모그란데의 북부군입니다.
북부군이 고향을 떠나온지 이미 일 년 반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고락을 함께 해온 북부군과 흔쾌히 맞서 싸우실 수 있겠습니까 ?”
베그던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그, 그건......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난감한 게 사실이오.
우리가 우살리드와 맞서게 된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있는 힘을 다할 각오이긴 합니다.
하지만 북부군은 확실히 껄끄럽겠지요.”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북부의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북부군의 장병 대다수가 가족의 살림을 책임지는 장정들입니다.
북부에서 농사를 비롯한 생업을 제대로 영위하는 집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세 분께 모든 병사들을 데리고 북부로 돌아가시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단, 세 분의 영지만을 챙기지 않고, 북부 전체에 활력을 불어 넣는 일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대다수 영주들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서 영지의 상태가 엉망이겠지요.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토벌하거나 점령했던 지역들에서 영지를 구분하지 않고 전체를 통괄하는 총독을 임명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 행정은 기존의 영주들이 맡고 총독은 군사만 총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행정을 총괄할 책임자도 중앙에서 임명하여 파견하는 체계를 갖추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영주들이 대부분 자리를 비운 북부에서 우선적으로 지역 전체를 관리하는 체계를 시험해보려 합니다.
베그던 백작님을 총독으로, 다른 두 분을 그 보좌역으로 해서 말입니다.
필요하다면 황도에서 행정과 군사를 담당할 관료들을 필요한 만큼 데려갈 수 있도록 제가 조치를 해놓겠습니다.
어떻습니까 ?”
베그던이 조금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한숨지었다.
“어쩌면 나나 다른 영주들도 마음 속으로 가장 바라던 바가 바로 사령관께서 말씀하신 대목일 것이오.
고향의 산천과 백성들을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을 거요.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거라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런 배려를 받게 될 줄은 진정 생각하지도 못했소.”
다른 두 영주들은 말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세틴이 말했다.
“우리가 전장에 나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제국의 백성들이 모두 평안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북부가 비록 직접 전화를 입지는 않았다 해도 어느 지역 못지 않게 백성들이 겪은 고통은 큽니다.
인력이 많이 부족할 텐데 그 부분은 제가 해드릴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데리고 있는 병력들을 해산해서 집으로 보내지 말고, 지역 전체를 위해 활용할 방법을 찾아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면 북부로 돌아가는 장정들이 꽤 많이 생길 것입니다.
제가 세 영주분들과 병력이 이미 북부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북부군에 알릴 예정입니다.
아마도 동요가 적지 않겠지요.”
베그던이 진심으로 탄복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 그것까지 미리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오 ?
사령관은 실로 하늘이 내린 장군이오.
백성들의 삶과 병사들의 마음을 헤아림이 진정 놀랍구려.
한 사람의 무인으로 사령관의 전략과 작전 능력을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크나, 고향으로 돌아감은 감히 청할 수는 없어도 진정 마음으로 바라던 바요.
북부가 지나친 징병과 전비 마련으로 피폐한 현실이 무엇보다 다급한 것도 사실이지요.
무조건 명에 따르겠습니다.”
세틴이 한 걸음 더 나갔다.
“말씀드린대로 인력을 지원할 방도를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급한 것은 엄청나게 소요될 비용입니다.
황실이나 조정에 손을 내밀어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시는 길에 황도에 들르시면서 오골보르 상단을 찾아 가십시오.
십만 골드를 차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제가 보증은 하지만 언젠가는 북부가 갚아야 할 부채입니다.”
베그던을 비롯한 영주들은 곧 엎드려 절이라도 할 기세로 세틴에게 격렬한 감사의 표시를 했다.
전쟁에서 빼주기만 해도 감사의 인사를 백번이라도 해야 할 처지에 모든 면을 꼼꼼하게 고려하여 북부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방책을 준비한 세틴에게 탄복할 따름이었다.
세틴은 다른 마법사들은 몰라도 자신만은 세틴 곁에 남아 전쟁을 지켜보려 하는 시오미를 온갖 말로 설득하여 황도로 돌려 보냈다.
황도에 가서 마법 병단을 공식적으로 해산하고 황실 직속의 마법 연구소로 탈바꿈하는 일은 시오미가 직접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모그란데의 북부군을 벗어난 인원 전부가 하라무스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베그던이 반역에 가담한 일도 없고, 빠르게 모그란데로부터 탈주했기 때문에 그의 처분에 대해 조정에 상주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처리될 터였다.
다만, 북부 재건을 위해 관료들을 파견하는 일에 대해서는 세틴이 정성스레 당위성을 설명하는 상주문을 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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