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청하는 호아니
세틴은 직접 백작의 팔을 붙들어 일으켜주고 의자를 권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번 반란의 주역인 노스롭 후작을 제외한 다른 영주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충분히 보여왔다고 생각합니다.
아시겠지만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반란에 가담했던 영주들의 계승권과 군사권은 예외 없이 박탈합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고 지친 병사들과 백성들을 위무하는데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게스트린의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입니다. 반역에 가담한 것 치고는 관대한 처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틴 장군님의 관대하고 자비로운 처분에 깊이 감사드리는 입장입니다.
보카수스에서 군영을 심하게 공격하지 않은 것도, 사로잡은 포로들을 잘 대해주고 조건없이 석방해 주신 것도 우리 영주와 백성들을 배려하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노스롭 반도가 안정될 수 있도록 협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세틴이 감격에 겨운 음성으로 말했다.
“영주께서 제 마음을 그토록 잘 알아주시니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사실 제가 게스트린 산맥을 넘는 도중에 만난 농사꾼에게서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제국과 황실을 위해 반란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이 있다 해도, 노스롭 반도인에게는 그들의 삶이 있고, 어쩌면 나도 그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백성들의 삶을 지켜주지 못하는 귀족은 귀족이 아니다’는 솔라스경의 말씀을 글귀는 알아도 실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이제 열 일곱의 애송이입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게스트린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나야말로 나이를 헛먹었지요. 적어도 우리 영지민들에게는 장군의 숭고한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진력하겠습니다. 지나친 겸양에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둘의 환담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세틴은 노스롭에서 처음으로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하는 영주를 만난 셈이었고, 게스트린의 화통하고 솔직한 성격에 즐거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게스트린 영주성 주변으로 세틴군의 집결이 완료되자 곧바로 소집한 지휘관 회의에서 다음 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회의의 서두에 호아니가 먼저 죄를 청했다.
“지난 작전에서 우리는 초반부터 커다란 실책을 범했습니다. 최초의 작전 목표가 노스롭의 군용 물자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노스롭이 최소한의 물자를 제외하고 모조리 불태우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작전 목표 세 가지 중 하나에 완전히 실패한 점,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포로를 최대한 확보한다는 목표와 노스롭 본대를 집중 공략하여 힘을 뺀다는 목표는 비교적 충실하게 달성했습니다.”
세틴이 ‘그깟 일로 벌을 논할 필요가 있나’ 하고 넘어가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호아니를 지나치게 믿는다는 생각을 가진 장수들이 적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도 세틴이 호아니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기에 더더욱 그런 태도를 보여서는 안되었다.
“작전을 총괄 지휘하는 권한을 가진 군사가 그런 실수를 했다니 실로 유감입니다. 내가 자세한 정황을 모르니 죄나 벌을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보급대장 바드랑이 말했다.
“노스롭이 그런 일을 벌일 거라는 징후가 없었다거나, 우리가 그것을 파악할 수 없어서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만 볼 수는 없소. 하지만 우리는 노스롭의 퇴각이 시작되기 전에 공격을 가한다는 계획이 없었소.
설사 우리가 노스롭의 계획을 정확히 알았다 하더라도 소각을 막지는 못했을 거요. 나는 목적 달성에 실패한 책임을 군사에게 물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기병대장 솔로몬 데일이 말했다.
“노스롭이 소각한 물자가 실로 막대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대부분 손에 넣었을 때 얻었을 이익을 생각하면 실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노스롭이 이전에 스프링스에서 비슷한 일을 겪고 우리에게 많은 물자들을 헌납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소각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대책을 논한 바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 모두의 부주의이고 책임이지요. 군사에게만 죄를 물을 일이 아닙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 외에 더 많은 일을 세심하게 살피고 대비하는 것이 바로 군사참모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직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애초에 이번에는 호아니를 위해 한 마디도 변명을 해주지 않을 작정이었던 세틴이지만, 완강하기만 호아니의 태도는 다소 의아할 정도였다.
“군사께서 부득불 벌을 받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떤 벌을 받아야 할까요 ?”
고진이 나섰다.
“크게 보아 우리는 이미 대승을 거두었고 대부분의 군사적 목표는 달성되었습니다. 군사의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해도 벌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호아니가 다시 말했다.
“세틴 장군께서 몸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작전에 나서며 저에게 군 전체를 지휘할 권한을 양도하셨습니다. 또한 세 가지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침까지 명시해주신 바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작전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어떤 이유로도 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군사참모부의 직을 반납하고 백의종군함이 마땅한 처벌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아니의 폭탄 발언에 장내가 술렁이는 가운데 세틴은 그제서야 호아니의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처벌도 처벌이지만 향후 권한에 따른 책임을 엄정하게 묻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세틴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군사에게 처벌을 내리고 싶지 않지만, 또한 군사께서 말씀하신 명분에 반박할 말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세틴군의 엄정한 기강을 위해서 처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군에 대한 지휘권을 양도받고도 정해진 목표를 충실하게 달성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모든 직위를 박탈합니다. 소속은 그대로 군사참모부에 남도록 합니다. 추후 더욱 분발하여 공을 세우면 복직을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호아니가 큰소리로 외쳤다.
“명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는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으니 물러간다는 말과 함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지속적인 정찰을 통해 노스롭군이 이미 영주성에 진입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노스롭 성도 역시 성곽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세틴은 게스트린 영주성에서 보름 정도를 머물면서 노스롭이 항복해오기를 기다려주었다. 노스롭이 다시 병력을 모으고 싸울 태세를 갖출 수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이미 떠나간 마당에 반도 남부의 영주들이 다시 가세할 리도 없었다.
뜻밖에도 노스롭이 전체 가솔과 2500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노스롭 영주성을 떠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들이 떠난 방향은 동쪽도 아니고 서쪽이었다. 동쪽이라면 바다를 통해 반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었지만, 서쪽은 산간지대였다.
고진의 보고한 정찰 결과는 노스롭이 산간지대 초입에 있는 노스롭 산성에 자리를 잡고 농성할 태세였다.
회의 결과 세틴은 일단 노스롭 영주성으로 향하기로 결정하였다. 강은 여전히 해빙이 되지 않아 페로졸 강을 건너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노스롭을 죽이거나 생포하지 않는 한 토벌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산성이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노스롭을 서두를 필요는 별로 없다고 세틴은 생각했다. 봄이 올 때까지 지켜보면서 반도 전역에 대한 처리부터 확실히 해두고자 했다.
반도 남부의 보카린을 비롯한 세 영주들로부터 항복받는 절차를 거치고 게스트린과 마찬가지로 처결을 마무리했다.
바드랑 숄츠를 정식으로 노스롭 반도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각 영지에 군사담당관을 파견하고 나서, 세틴은 5 영주들과 총독, 세틴군의 주요 간부들이 함께 하는 회의를 개최했다.
총독을 임명하면서 호아니도 반란을 평정하는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슬그머니 복직시킨 상태였다.
“이제 이 전쟁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인 노스롭이 산성에 틀어박혀 끝까지 저항할 태세라고는 하나, 조만간 어렵지 않게 막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이 추운 겨울에 병사들을 산성이라는 어려운 전장에 내몰 필요가 없으니, 당분간 지켜볼 생각입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제국 남서부의 영주들에 대한 모든 저의 처분을 추인했지만, 남서부와 노스롭 반도에 각각 임명한 총독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습니다.
명색이 황제 폐하를 대신하는 섭정이라고는 하나, 모그란데는 이미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스스로 자임한 섭정을 인정하는 영주들이 제국 북부와 동부의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위세를 과시하려 시도한 전국적인 영주 소환령이 오히려 천하 귀족들의 반발만 사게 된 셈입니다. 나는 모그란데에게 반란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는데 연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히려 이 제국의 남서부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께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 다섯 영주들 뿐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해서 전국의 모든 영주들의 계승권, 군사권을 박탈하여 보다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통치를 실현하는데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계승권, 군사권 박탈이 반드시 반란에 가담하고 전쟁에 패한 징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제국이 이토록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의 삶이 불구덩이에 빠졌는데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고 영향력을 넓히는 데만 골몰하는 귀족들은 더 이상 특권을 유지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황실의 은혜와 선조의 후광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지키고 개선한 성과에 따라서만 한 지방을 통치할 권한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노스롭 반도가 반역의 땅이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제국 전체를 일신하는 시험대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 영주님들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그런 사명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뤄 나갈 것으로 믿습니다.”
세틴의 일장 연설에 이어 호아니가 군사에 대한 정책을 발표했다.
“현재 십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계속 유지하는 데는 비용도 많이 들고 당장 큰 전투를 치르게 될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3만 정도의 정예 병력만 남기고 병사들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병사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줍니다. 군을 떠나고자 하는 병사에 대해서는 복무기간과 군공을 감안하여 충분한 보상을 제공할 것입니다.
장교급 이상의 군직을 가진 사람들도 이에 해당됩니다. 지금 떠나면 직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떠나고자 하는 장수는 거의 없겠지만,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분들은 군사참모부에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