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입가경
휘하의 장수들은 실로 엄청난 정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틴이 담담하게 대응책들을 논하는 모습을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노스롭 토벌군부터 세틴과 함께 했던 장수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화를 내는 세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모그란데와 우살리드의 연합군이라면 적어도 25만에서 30만에 이르는 대군일 터였다.
그런 병력의 규모 만으로도 크게 낙담하거나 절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세틴은 그저 변화가 있으면 그에 맞게 대처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였다.
하지만 누구도 세틴의 그런 태도가 너무 낙관적이라거나 무신경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숱하게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지만, 하나 하나 뚫어 나오면서 오히려 세력의 우위를 점하고 상대를 궁지로 몰아가는 세틴의 전략을 익히 봐왔기 때문이었다.
지휘관 회의가 열린지 사흘이 지나고 상카가 서부와 서남부 지역에서 모집된 정예병으로 구성된 2만의 병력을 이끌고 하라무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신병들을 배치하고 진지 방어전에 맞게 부대를 재편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라무스에서 모그란데와 우살리드의 연합 공세에 맞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어느날, 급박한 정보가 들려왔다.
우살리드가 페링 진지를 거두고 철수하려는 기미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하랑가 !’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세틴이 머릿 속에 떠올린 단어였다.
설사 모그란데와 우살리드 사이에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거나 적당한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살리드가 갑자기 철수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우살리드가 황도로의 진격을 완전히 포기하고 돌아가 군대를 해산할 생각이라면 그런 결정을 세틴에게 먼저 전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냥 말도 없이 철수하여 군대를 해산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아야 했다.
그런데도 철수를 한다 ?
이건 철수가 아니고 새로운 작전이었다.
세틴의 감각에 확실하게 잡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세틴이 추정한 우살리드의 작전은 이러 했다.
설사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손을 맞잡고 세틴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황도로 진격하고자 한다 해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없을 터였다.
그럴 바에는 모그란데로 하여금 세틴을 하라무스 진지에 묶어두게 하고 우살리드 자신은 하랑가 고원을 넘어 제국 북부를 공략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황도로 진격하여 장악에 성공한다면 모그란데와 안팎으로 세틴을 포위 공격하는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세틴이 느끼기에 우살리드는 이런 식의 대담한 전략을 구사하고 남음이 있는 장수였다.
세틴은 즉시 고진을 호출하여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하랑가 고원 지역에 대한 정찰을 대폭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어떻게든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넘기 전에 저지해야 했다.
일단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어 북부에 진입하는데 성공한다면 북부에서는 그를 막아낼 만한 세력이 없다고 보아야 했다.
북부로 돌아간지 얼마 되지 않은 베그던 장군은 그동안 방치되어 피폐해진 북부를 돌보는 일만도 벅찰 터였다.
우살리드군에 맞설 만한 군대를 동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세틴 자신이 하라무스를 떠나 직접 우살리드군을 치러 갈 수도 없었다.
모그란데군이 아무리 강하지 않은 군대라 해도 일단 병력에서 상당히 우위에 있었고, 동부왕국군이 더욱 강하게 개입하여 공격을 밀어붙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유격전에 특화한 우살리드의 레인져 부대와의 전투가 수월하지도 않을 터였다.
하랑가를 넘는다는 세틴의 짐작이 맞다면 실로 우살리드는 대단한 전략가이자 승부사였다.
그만큼 세틴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세틴은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저스틴과 상카, 토마스 만을 불러 의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세틴이 말했다.
“하랑가 고원을 넘어 북부를 친다는 전략은 내가 오래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하랑가는 워낙에 척박하여 인적이 드물 뿐 대군이 통과하기에 그렇게 어려운 난관은 아니라고 들었어요.
우살리드가 갑자기 페링에서 철수를 준비한다는 건 내 생각에 거의 틀림없이 하랑가를 넘는 전략을 생각하고 있다고 봐야 해요.
아마도 내 생각이 맞을 거에요.
지금 내가 하라무스에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세 분이 맡아 주어야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넘어 북부로 진입하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저스틴이 물었다.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는다면 병력은 어느 정도 데리고 갈까 ?”
세틴이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많아야 5만일 거에요.
우살리드 직속의 레인저 부대가 원래 2만 정도인데 그들은 모두 데리고 가겠지요.
북동부 다른 영지 출신의 군대는 우살리드의 레인저 부대와 격차가 상당할 겁니다.
많은 병력을 데리고 가기도 힘들고 그러자면 속도나 병참 등 오히려 문제의 소지가 더 많겠지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맞설 상대는 우살리드 정예군 2만이라고 봐도 되요.”
저스틴이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는 ?”
세틴이 다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많아야 1 만 5 천, 그 이상 차출하기는 힘들어요.
너무 무리한 임무라서 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민망하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랑가에서 우살리드군을 완전히 격파한다는 생각은 무리일 거에요.
하랑가에서 북부로 진입하기 직전에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적절한 지점에서 막기만 하면 되요.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우살리드 스스로 군대를 물릴 테니까요.
병력을 궁병을 중심으로 편성할 거니까 화살 공격 만으로 아예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의 지형을 찾아야 해요.
적당한 관문이 존재하는지조차 나도 아직 몰라요.
세 분이 그쪽에 도착해서 물색해야만 합니다.
지금 북부 총독을 맡고 있는 베그던 장군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거에요.
우살리드가 하랑가로 향하는 것이 확실해진 다음에 출발하면 늦어요.
그러니까 내일 아침 일찍 부대를 편성해서 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세틴의 짧은 설명으로 세 사람은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세틴이 다급한 심정인지 충분히 느끼고 남음이 있었다.
이때, 토마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만약에 우살리드가 하랑가로 오지 않으면 어떡하죠 ?
괜히 우리만 서둘러 헛짓을 하고, 우리 전력만 약화시킬 수도 있지 않나요 ?”
지극히 토마스다운 당돌한 질문이면서도 사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토마스라면 당연히 그 질문을 할 줄 알았어.
아직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이고, 우살리드가 하랑가 고원을 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지.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닌데 우리가 반드시 대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어.
먼저, 최근 우리가 펼친 심리전으로 우살리드가 자기 진영 내에서 꽤나 궁지에 몰린 건 사실이지.
하지만 내 생각에 그렇다고 우살리드가 쉽게 포기를 하거나 물러설 사람이 아니라고 봐.
그러니까 지금 페링에서 철수한다는 건 반드시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거지.
만약에 모그란데와 협상이 완전히 깨져서 제국군에 협력할 생각이 있다면 내게 연락을 했어야지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물러가는 모양새를 취하지는 않을 거야.
사실 내 짐작이 맞고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는 것으로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다고 가정하면, 실제로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빠지는 건 우리 제국군이야.
다음으로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을 것이 확실해지고 나서 대처하기는 어려워.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는 데는 대략 7, 8 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우리가 북부로 병력을 파견해서 그에 대처하는 데는 못해도 12 일에서 보름이 걸려.
그러니까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거지.
만약 우리가 그렇게 움직였는데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어.
그땐, 이쪽에서 역으로 하랑가를 넘어 북동부를 칠 거야.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우살리드가 이곳을 통해 황도로 진격하려는 시도를 계속한다면 우살리드의 뒤통수를 치자는 거지.
그렇게 되면 우살리드군은 돌아갈 고향이 없는 군대가 되고 말 테지.
하지만 나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는 전략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십중 팔구라고 봐.”
토마스는 세틴의 얘기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령관님의 말씀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 셋이 나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야 그렇다 쳐도 저스틴 경과 상카 경은 사령관님께 가장 필요한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 분들이 동시에 빠져버리면 하라무스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상카 경은 오랜만에 제국군에 합류하여 미처 자리도 정돈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나가셔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카가 어렵게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저는 사령관님께서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달려갈 용의가 있습니다만, 토마스 경의 지적이 일반적으로는 일리가 있습니다.
제가 제국군 내에서 무슨 정치질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국군의 장수들, 특히 새롭게 편입된 젊은 장수들과 교분이 너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번에 제가 통솔해온 서부의 증원군을 제국군에 편입시키는 있어서도 제가 필요한 구석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어려운 임무를 회피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닙니다.”
세틴도 조금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보니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면들이 있는 게 사실이네.
무조건 따르라는 게 아니라 내가 세 사람에게 이번 임무를 맡기려는 이유를 좀 더 자세히 말해 볼게.
먼저 이번 작전은 제국군 내에서도 공식적인 절차를 모두 거쳐서 차근차근 진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우살리드가 하랑가를 넘을 거라는 사실을 단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고, 지금으로선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지.
따라서 별도의 부대를 편성해서 작전을 펼치기 위해 충분한 논의를 거치거나 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어.
이번 일은 사령관의 독단으로 모종의 임무를 위해 파견한다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임무에 파견을 나가는 사람들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지.
그것이 내가 세 사람을 생각하게 된 첫 번째 이유야.
이번 작전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중요한 작전이야.
그렇다고 내가 이곳에서 발을 뺄 수는 없지.
알다시피 저스틴 형은 나의 첫 번 째 검술 사부이고, ‘검을 배운다는 건 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야.
그리고 상카 경은 재커드 검술을 내게 전수해 준 또 다른 사부와 같은 사람이고, 내가 재커둠의 힘을 깨우칠 수 있도록 인도해준 사람이지.
토마스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면서 봐온 친구들 중에서 가장 크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야.
나는 이번 임무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세 사람의 역량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한편으로는 이번 임무를 통해서 세 사람에게 독자적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전쟁을 치를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
이제부터 우리는 두 곳이 아니라 세 곳, 네 곳에서 동시에 다양한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
제국군의 경험 많은 장군들은 이미 대부분 각 지역의 총독으로 눌러 앉았고, 현재 이곳의 제국군에는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갖춘 장수가 드물어.
이것이 이번에 세 사람이 꼭 같이 가줬으면 하는 두 번 째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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