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천년 제국
“모그란데는 황자들을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질롱 사령관조차도 직위를 박탈했을 뿐이죠.
광범위한 연합세력을 구축하려면 모그란데를 황실에 반하는 역적으로 몰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아직은 모그란데를 그렇게까지 규정할 만한 정황이 없습니다.”
“정말 치밀하고 간교한 자로군요, 모그란데는. 황도와 황실을 장악하고 전국의 상황을 살피면서 칠 세력은 치고, 끌어들일 세력은 끌어들이겠다는 의도네요. 자칫 우리 군도 애매한 입장이 될 수도 있겠어요.”
호아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노스롭 공략을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모그란데는 옴비두스를 무려 승상의 자리에 올렸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
제국과 황실에 반한 전력이 있는 자라도 자신에게 굴복하기만 하면 살려주는 것은 물론 중히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노스롭이 모그란데의 손을 잡을 가능성이 큽니다. 황실과 조정을 농단하던 자들이 사라졌으니 새로운 조정에 협력하겠다는 명분을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모그란데와 노스롭이 손을 잡게 되면 우리는 설 자리가 없어지겠군요. 노스롭 공략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 봅시다. 바늘 요새에 도착하는 즉시 제장들을 소집해서 같이 대책을 마련해야겠습니다.”
턱을 괴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세틴이 호아니에게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호아니는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 전란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함께 큰 가닥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중시라고 무엇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며, 무엇으로 싸워나가야 할까요 ?”
호아니가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저 역시 장군과 그런 얘기를 나눌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먼저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천년 제국의 근간은 봉토를 받고 다스리는 영주들입니다. 또한 영주들의 권력은 황실로부터 나옵니다. 현실적으로 전란을 수습하고 대세를 장악하려면 영주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제국 황실의 권위에 의존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날 제국이 위기에 처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 또한 영주들의 특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군이나 저나 영지를 가진 귀족 출신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전란을 극복하는 일도 제국을 혁신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귀족 영주들의 특권을 그대로 두고서는 설사 이번 전란이 수습된다 하더라도 제국의 위기는 또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세틴이 말했다.
“대체로 공감하는 바이나 영주들의 특권을 혁파하는 것을 목표로 영주들의 협력을 얻어낸다는 것은 모순이네요.
솔라스경의 대의로 영주들을 갱생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생각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썩을대로 썩은 브라스트 가문 내부만 보더라도 영주 귀족들의 혁신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6 백작령은 브라스트 가문보다 더 심각한 상태이고, 그나마 브라스트 공국의 귀족들이 다른 제국의 영주 귀족들보다는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였습니다.”
호아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모순이지요. 제가 남작위를 받은 아카데미 졸업논문의 주제가 바로 그 모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영주들의 특권을 제거한다면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저의 생각은 솔라스경의 요체를 구현한 제도와 법률이라고 보았습니다. 제도와 법률을 충실하게 이행할 인재를 제대로 뽑고 육성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모순이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이 전란의 시대를 그런 모순을 극복해 나갈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황실과 영주들을 존중하되, 전란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영주들의 특권을 혁파하고 제도와 법률을 구체화해야 합니다. 물론 단숨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지요.”
세틴이 말했다.
“의도는 대충이나마 알겠소. 우선 명문화된 군율을 통해서 군을 통제하고, 공과에 따른 상벌과 인사 배치부터 철저히 해나가야겠군요.
사실 지금은 나와의 사적인 인연이나 신분에 좌우되는 일들이 적지 않고, 사람들도 그것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요. 그에 대해서는 호아니가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보도록 하세요.”
“네, 최대한 서둘러보겠습니다. 모그란데는 세틴군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은 자신을 위협할 가능성이 가장 큰 세력으로 보일 테니까요. 어떻게든 우리를 황실에 반하는 세력으로 몰아가려 할 것입니다.
그럴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스롭 공략을 서둘러야 합니다. 노스롭 공략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일 년은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제국의 가장 큰 적을 토벌한 공을 무시할 수도 없고, 우리를 황도로 불러들이거나 군을 해산시키려는 시도도 잔당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막아낼 수 있습니다.”
세틴은 바늘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각 대장들을 소집했다. 에메랄드 5 대 영지에서 합류한 병력은 일반 병사들은 기존의 병대에 편입시키고, 영지에서 차출된 기사단을 하나로 모아 별동대 개념의 기마대로 편성한 바, 하푼 백작의 기사단장 솔로몬 데일이 기마대장으로 대장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상카도 호위장이라는 명분으로 합류했다.
세틴이 황도의 소식을 전하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갈피를 못잡는 분위기였다.
세틴이 주의를 환기하며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충격이 적지 않을 것이오. 여기 계신 대장들 뿐아니라 병사들도 대부분 황도에 가족이 있을 터이니 걱정이 앞서겠지요.
하지만 모그란데가 아직까지는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르지는 않았소.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을 것이오.
오는 길에 호아니 군사와 대책을 의논해 봤는데 지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노스롭을 하루 빨리 공략하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소.
당장은 모그란데가 우릴 해산시킬 명분도 없고, 우리는 영주 소집령에서도 자유롭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그란데가 노스롭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끈 떨어진 연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이오.
노스롭을 가능한 빨리 공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노스롭 공략에 성공하고 나면 모그란데는 우리를 적대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것이오.”
호아니가 부연해서 설명하려는 것을 세틴이 저지했다.
“먼저 여러분들의 생각을 들어봅시다. 경황 중이라도 일단 제장들의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해 보시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우려되는 바는 없는지 뜻을 모아 봅시다.”
커티스 돈프로스트가 말했다.
“아버지께서 사령관직을 잃으셨으나 해를 당하지는 않으셨다니 일단은 다행입니다. 자식된 입장에서 당장이라도 황도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앞섭니다.
이번에 황도를 떠나올 때, 아버지께서 저에게 당부하신 단 한 마디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세틴의 위에 올라설 생각을 하지 말라’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힘만으로 과연 노스롭을 공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노스롭 공략을 서둘러야 할 이유에 대해서도 완전히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틴 장군의 판단을 믿고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바드랑이 뒤를 이었다.
“지금 우리 군은 새롭게 합류한 에메랄드호변의 병력들이 온전히 통합되지 못했습니다. 6 만의 군세라고는 하나 노스롭과 단독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틴 장군께서는 적어도 7, 8 할 이상의 승산이 없는 싸움에 병사들을 몰아 넣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셨습니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이 부분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고진이 말했다.
“지금 노스롭군은 아가란 강변의 스프링스 자작령에 주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반 년 가까이 전투다운 전투가 없어서인지 병력은 초반에 비해 오히려 줄어서 10 만이 안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둔하고 있는 노스롭군의 민폐가 적지 않아 스프링스 주민들의 민심은 최악입니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야전으로 맞붙게 될 터인데, 우리가 반드시 열세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관건은 노스롭이 과연 신속하게 병력을 보충할 수 있느냐이고, 그것은 노스롭의 지배하에 들어간 8대 영주들의 협조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이제 새봄을 맞아 농번기에 들어갑니다. 노스롭이 딱히 기세를 올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베르토프군은 우리보다 더 다급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현재 4 만 정도의 군세로 성장한 베르토프군과 연합 작전을 펼친다면 승산이 충분합니다. 지금 당장 누구도 무조건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전략은 대략 이렇습니다.
노스롭군을 한 번의 결전으로 격파하기는 어렵습니다. 설사 우리가 이긴다 하더라도 상당히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스롭군을 노스롭 반도로 물러가게 하는 것을 일차적인 전략 목표로 삼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 최대한 빨리 진군하여 대치전선을 형성하고, 베르토프군이 노스롭의 후방으로 도강작전을 감행한다면 딱히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이 없는 스프링스를 노스롭이 사수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노스롭 반도로 후퇴하는 노스롭군을 압박한다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반도로 후퇴시키면 우리는 절반 이상 승리한 것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하푼 페드로 보병대장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나는 꽤나 보수적이고 신중한 전략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제가 보기에 맨든 군사의 전략에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베르토프 장군도 아가란 강 저편에 눌러 앉아 있다가 모그란데에게 뒤통수를 맞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와 마찬가지로 황명에 따른 노스롭 토벌군이니 전공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군사의 전략에 찬성합니다.”
세틴이 말했다.
“크게 이견이 없으시면 군사의 전략을 기본으로 삼아 세부적인 일정과 전술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스프링스 공략을 위한 전술은 제가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군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중군과 좌, 우군, 보급대는 본진으로 탄탄한 진형을 유지한 가운데 서서히 진군합니다. 새로 합류한 에메랄드 병력의 융합과 훈련에 특히 주력합니다.
정찰대, 선봉대, 기마대, 친위대는 별동대로 노스롭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합니다. 유격전의 목표는 노스롭군의 정찰, 연락 차단, 스피링스의 각 지역에 파견된 소규모 부대 격파, 민심 교란입니다.
별동대는 기동력과 전투력을 발판으로 대규모 전투를 가능한 피하고, 노스롭이 우리 본진에 대한 대치전선을 쉽사리 형성하지 못하도록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기마대장 솔로몬 데일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우리와 노스롭의 상황에서 최적의 전술입니다. 합류하자마자 우리 기마대가 크게 활약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찰대장 고진과 선봉대장 핸리도 마찬가지였다.
세틴이 본진의 책임자로 보급대장 바드랑 숄츠를 지명했다. 바드랑이 직급, 경력, 인망에서 모두의 인정을 받는 장군인지라 이견은 없었다.
3 일 후, 세틴군이 도강작전을 펼쳤던 어촌 마을 부근의 가도까지 진군하고 베르토프군과 긴밀한 연락선을 구축하고 나서도 노스롭군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실제 노스롭은 모그란데의 소집령을 계기로 반란군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제국 남서부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가면서 장기전에 돌입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입장에서 토벌군과의 전면전을 벌이는 것을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일단 토벌군과 정면으로 맞붙는 형국이 되면 모그란데에게 협력하면서 타협을 보는 그림이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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