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복귀 명령
티리아는 안색이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놈들은 ‘그림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제국 전역을 무대로 활약하는 청부조직인데 모그란데 공작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우리가 머물던 거점이 누군가에게 알려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그자들은 거침없이 쳐들어왔어요. 그 정도 정보력과 실행력을 갖춘 집단은 그림자 외에는 없을 겁니다. 새날의 빛과는 제국 전역에서 치열하게 맞붙고 있기도 하구요. 스승님이 그자들을 조심하라고 그렇게 당부하셨는데 이렇게 하루 아침에......”
티리아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시오미는요 ?”
단순한 질문이었으나 세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다급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사매는 나보다 뛰어난 마법사요. 어떻게든 몸을 빼내기는 했을 테지만, 아직은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세틴이 추궁이라도 하듯 물었다.
“시오미 하나 만이라도 챙겨서 같이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까 ? 참으로 답답하군요.”
“시오미가 우리에게 돌아온 뒤로 자기 방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습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어요. 갑작스레 들이닥친 괴한들이 무차별로 살상을 해대는 데다 우리가 저항할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위도 높아서, 저를 포함한 몇 몇 사람들은 제 한 몸 도망치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매가 걱정되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틴은 가슴을 쥐어짜듯 아파오고, 그런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시오미가 엄마 잃은 새처럼 자기를 찾아올 듯한 기분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한 세틴은 티리아와 함께 올란드 후작을 찾아갔다. 곤히 자다 일어난 후작이었으나, 그의 자세는 언제나처럼 꼿꼿했다.
“그대의 무리들이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애석하나,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소. 애초에 그쪽은 우리를 협박해서 물자를 탈취하려던 무리가 아니오 ?”
“그린호에서의 일은 제가 백배 사죄해도 모자라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저는 대공을 적대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스승님께서도 대공께 맞서지 말라는 지침을 주셨습니다. 제가 경황 중에 13 공자를 찾아온 것은 몇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함이지 딱히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멀리 제국 동쪽에 있다는 그대의 스승과 그리 빠르게 연락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
후작이 스승에게 지침을 받았다는 말을 콕 집어 물었다.
“어렵지만 마법 통신이 가능은 합니다. 그래서 제국 전반의 상황을 제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스승님은 제국 동쪽 변방의 백작령을 완전히 장악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고, 인접한 소국들과도 연계하고 있습니다. 제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고, 새날의 빛은 이름난 무가 한 곳과도 손을 잡았습니다. 우리는 천년 제국의 종지부를 찍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후작이 물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날의 빛과 뜻을 같이 하자는 건가 ?”
티리아가 주저하며 말했다.
“지금의 저의 처지를 제가 잘 압니다. 우리 인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부분은 생사조차 불분명합니다. 제가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후작께 그런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요. 사절단이 그린테일에서 습격당한 일을 들었습니다. 단 한 명이 강 한복판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보통 능력이 아니지요. 그런 전문 살수를 보유한 데는 그림자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그림자는 제국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고, 돈만 주면 가리지 않고 청부를 받는 집단입니다. 그래서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진 자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저를 습격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브라스트 공국에서 벌이고자 하는 일에 방해물이 된다 생각해서 우선적으로 제거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저희가 비록 미약하나마 협력하신다면 그들에 대처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당분간 후작께 의지해서 저의 동지들을 추슬러 볼까 합니다.”
티리아의 간곡한 청에 후작이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새날의 빛과 공식적인 협력을 할 수는 없네. 대공 전하께서 허락하실 리 없고, 나도 대공을 설득한 자신이 없어. 사절단에 자네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은밀하게 협력하는 것도 쉽지 않을 걸세. 이렇게 하세. 내가 자금을 조금 지원해줄테니 사람들을 수습하는데 쓰게. 그리고 그림자의 동향에 대한 정보가 있을 때만 13 공자를 통해 은밀하게 연락을 주게. 13 공자를 직접 접촉해서도 안되네. 공자의 호위 중에 토마스가 이런 일에 전문일세. 떠나기 전에 그와 만나서 연락 방법 등을 의논해보게.”
세틴이 덧붙였다.
“티리아, 후작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리고 시오미의 행방을 알게 되거나 행방을 수소문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을 주시오. 한때나마 내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큼 정이 들어서, 사실 나는 무엇보다 시오미의 안위가 걱정이오.”
티리아는 새벽까지 토마스와 의논을 계속하고, 날이 밝기 전에 떠나갔다. 사절단이 나바니아 백작성을 향해 막 출발하려던 차에 멀린으로부터 특별 전령이 도착했다. 매일 같이 줄을 지어 도착하고 떠나는 전령들이 있었는데 그와는 별개로 멀린이 긴급 파견한 전령이었다.
“순행을 조속이 마무리하고 바로 프라움으로 복귀하라는 대공 전하의 긴급 명령입니다. 사절단의 일을 모두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고, 나바니아에서 리스톤과 거윈의 일까지 매듭을 짓고 복귀하실 것을 명하셨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6 백작 모두에게 소집령을 내리셨으니, 수일 내로 리스톤 백작과 거위 백작도 나바니아로 오실 것입니다.”
후작이 물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는가 ?”
전령이 대답했다.
“그에 대해서는 대공께서 특별히 언급하신 바가 없습니다. 제가 따로 알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만, 제가 트라움을 떠나기 전에 황제 폐하의 사절이 프라움으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그 일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이건 오로지 저의 추측일 뿐이니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알았네. 필시 자네의 생각이 맞겠군. 대공께서 어지간한 일로 사절단을 중도에 복귀시킬 리는 없으니......”
연달아서 급박하게 일들이 터지는 상황이어서 일단 사절단을 추스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율리는 나바니아로 출발하는 것을 연기했다.
“긴급히 프라움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소. 우리가 당장 출발한다 하더라도 프라움까지는 24, 5 일이 걸릴 것이오. 나바니아에서 리스톤과 거윈의 일까지 마무리를 하고 가야 하니 우리가 프라움에 복귀하는 시점은 빨라도 한 달 후가 될 것이오. 하마터면 우리 모두가 강 한 복판에서 수장당할 뻔한 일도 있었고, 정체모를 괴한들이 구호 물자를 습격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데 이곳 상황을 수습하기도 전에 복귀를 서둘러야 할 판이오. 이럴 때일수록 일의 경중을 가려 대처해야 할 것이오. 또한 사절단이 흔들림 없이 난관을 헤쳐 나가려면 우리가 어느 때보다 단합해야 할 것이오. 하여 나바니아로 떠나기 전에 세 분의 생각을 충분히 들어보고 싶소.”
율리는 셔틀리, 발탄, 세틴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발탄이 말했다.
“서둘러서 구호 물자 배분 문제를 처리하려다 보면 아무래도 빈틈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만의 하나 세 백작 중에서 딴소리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난감할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네. 이미 브라스틴까지의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백작들에게까지 소집령이 떨어진 마당에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는 못할 거요. 혹여 그런 일이 생기면 일정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우리는 원칙대로 대처하면 되오. 아무리 급해도 우리의 임무를 허투루 할 수는 없소.”
셔틀리가 입을 열었다.
“제 짐작이기는 하나 지금 6 백작령에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세력이 한 번은 크게 일을 벌일 것 같습니다. 나바니아에서 일을 벌이지는 못할 테고,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기회를 노릴 것입니다. 야영을 계속 하면 경계도 배는 어려울 뿐 아니라 병사들의 피로도도 계속 쌓여 갑니다. 앞으로는 영주성이나 관사에 들어가도록 방침을 변경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사절단과 내 채면만 생각해서 고집을 피울 문제는 아닌 듯하오. 나바니아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성 내에서 머물도록 합시다.”
세틴이 말했다.
“지금 6 백작령에서 암약하고 있는 자들은 ‘그림자’라는 청부조직으로 밝혀졌습니다. 티리아가 그들과 충돌이 있었다고 알려왔어요. 셔틀리 공은 혹시 그림자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
“얘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악명높은 청부조직이라 호위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제 1 호 경계 대상입니다. 수단이 악랄하고 집요하여 청부받은 일은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고 합니다. 모 공작이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린테일 강에서 우리를 습격한 자가 그림자라면, 청부 대상이 후작 각하나 13 공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청부조직의 특성상 목적이 불분명한 일을 청부받지는 않지요.”
후작이 말했다.
“아무 일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할 수 없다는 말이구려. 셔틀리 공은 특히 13 공자의 안위에 각별히 신경을 써주셔야겠소. 우리가 아무리 일을 잘 해도 13 공자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며 모든 게 다 허사요.”
세틴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를 생각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흑룡기사단과 병사들은 후작 각하를 비롯한 관리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주시오. 나는 이번에 기연을 얻어 새로운 경지에 들었을 뿐 아니라, 상카 용병단을 이미 휘하에 수습했습니다. 상카 용병단을 내 수족처럼 쓸 수 있고, 아시다시피 제 주변의 식구들도 하나같이 한 가닥 합니다. 그린테일 강에서와 같은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정식 군대가 몰려 오더라도 제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지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일반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특별한 감각이 생겨서 5 백 보 이내에서는 제 눈과 귀를 속일 자가 드물 것입니다.”
셔틀리가 말했다.
“공자께서 이미 저 못지 않은 경지에 오르신 것을 저도 느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분들을 위주로 경계 태세를 갖추는 것이 타당합니다. 실제 모두가 위태로운 상황이 온다면 그때 다시 생각하더라도 말입니다.”
발탄이 물었다.
“상카 용병단을 수습하셨다는 말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요 ?”
“상카 단장을 비롯한 단원 전원이 저에게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얻은 재커드의 혼을 남긴 고대 부족의 후예들입니다. 단원 하나하나가 일반 기사 못지않은 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지요. 만약 그림자가 일을 꾀한다면 저 자신의 무위와 상카 용병단이 큰 변수가 될 것입니다. 용병단을 잡부 정도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일정이 늦어져서 원래 점심 무렵에 도착할 예정이던 나바니아에는 늦은 오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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