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기싸움
황도로 출발하기 하루 전날 세틴이 청랑대를 소집했다. 청랑대는 대장을 포함해서 모두 6 명이 정식 기사로 임명을 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수습의 신분이었다.
“소가주를 뵙습니다.”
60 명의 인원이 동시에 올리는 인사는 함성에 가까웠다.
“항간에 내가 황도에 볼모로 잡혀간다는 식의 소문이 돌고 있다고 들었다. 그대들은 왜 하필이면 재수없이 청랑대가 걸려들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대들을 데려 가겠다고 요청한 사람이 바로 나다. 원망할 생각이 있으면 나를 원망하도록.”
“아닙니다. 소가주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청랑대가 이구동성으로 외쳤으나, 분위기는 여전히 죽을 자리 찾아가는 사람들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내가 분명히 말하건데 나는 결코 볼모로 잡혀가는 것이 아니다. 칙명에 따라 외할아버지인 황제를 보필하러 가는 것이지. 많은 사람들이 허울 뿐인 핑계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인질로 잡고 싶어 한다고 해서 꼭 인질이 되라는 법은 없지. 내가 인질이 되고 안 되고는 모두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그대들이 브라스트 사나이들의 의기와 투지를 결연하게 보여준다면 누가 감히 나를 인질로 잡을 수 있겠는가. 이 자리에서 그대들에게 딱 한 가지 행동 지침을 주겠다. 황도에 이르는 동안, 그리고 황도에 도착해서도 공식적인 일정에 협조하는 것 외에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려는 모든 시도는 거부한다. 그대들은 거부하는 이유를 밝힐 필요도 없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나한테 물어보라 하면 된다. 알겠는가 ?”
“넵. 명심하겠습니다.”
“황도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매일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이고, 이는 이동 중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전쟁에 나가는 군대에 준하여 행군을 하고, 행군과 주둔시 진형을 갖추고, 그에 필요한 훈련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것이다. 이를 위해 청랑대의 편제를 개편한다. 지금부터 청랑대의 대장은 본인이고, 기존 청랑대장은 내 참모이자 호위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대장 포함 6 명의 기사들은 십인장으로 부를 것이며, 각각 아홉 명의 대원을 통솔한다. 대장은 지금부터 공식적으로 참군으로 호칭을 통일하고, 나머지 다섯 기사는 각자 특기와 적성에 따라 임무를 분담할 것이며, 그에 걸맞는 대원을 선발하도록 하라. 지금부터 저녁식사 전까지 내가 말한 편제를 마치도록 한다. 질문 있나 ?”
질문이 없자, 세틴은 저녁 식사 후에 참군과 다섯 십인장이 함께 와서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다.
다음날 출발을 앞두고 카우리 백작은 세틴의 예상대로 열 개도 넘는 조항을 적어와서 세틴의 행동 반경을 제한하려 했다.
“카우리 백작, 칙사의 임무는 칙명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난 것으로 알고 있소. 칙명에는 내가 그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언급은 털끝만큼도 없소. 나는 황제의 명을 받아 황도로 향할 것이니 나와 동행을 하든 말든 그건 백작 마음대로 하시오. 황제폐하께서는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하라 하셨으니 각자 출발해서 누가 먼저 도착하니 내기를 해도 좋소.”
카우리가 비웃기라도 하듯 말했다.
“누가 들으면 그대가 대공이 되기라도 한 줄 알겠어. 무슨 배짱으로 폐하께서 임명한 칙사가 그렇게 우스운가 ? 칙명에 따라 황도로 가려면 칙사 말을 들어야지. 아무리 어리다지만 세상 물정을 그렇게 몰라 ?”
세틴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나는 할 말 다 했소. 어차피 우리 일행은 기사단 하나가 전부이니 나는 급속행군을 해서 최대한 빨리 황도에 도착할 것이오. 따라오든 말든 맘대로 하시오. 계속 그렇게 반말 짓거리를 할 거면 내 얼굴은 볼 생각도 하지 마시오.”
세틴은 테오의 등에 올라 청랑대의 우렁찬 함성 소리와 함께 먼저 출발해버렸다. 세틴의 일행이 야영지를 차리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야 칙사의 일행이 간신히 따라 잡았다. 세틴은 바네사의 지휘 하에 시녀들, 청랑대와 함께 식사 준비를 같이 하고 있었으나, 카우스 일행이 오는 것을 보고는 막사로 들어가 버렸다.
카우스가 지금은 청랑대 참군이 된 청량대장 오클린 바트에게 세틴에게 사과를 할 터이니 제발 만나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나서야 그는 세틴을 만날 수 있었다.
“소가주, 내가 무례했다면 사과하겠네. 하지만 그대도 명색이 칙사인 내 체면을 좀 봐 줘야 하지 않겠나.”
“그쪽이 나를 한낱 철부지 어린아이로 취급하는데 내가 왜 그쪽의 체면을 봐줘야 하오 ? 내가 분명히 말했소. 칙사로서 임무가 완수된 이상 내가 그대를 칙사로 대우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소. 설마 백작이 대공가의 적법한 후계자이자 황제 폐하의 외손자인 나보다 윗사람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오 ? 그건 제국의 근간인 신분질서를 어지럽히는 짓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오. 브라스트에는 황제 폐하를 들먹거리면서 어물쩡 찍어누르려는 사람을 두려워 할 무골충은 하나도 없소. 다시 말하지만 그 말투부터 고치지 않으면 내가 그대를 상대해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소.”
세틴은 일부러 언성을 높여 카우리를 나무랐다. 막사 밖에서 듣고 있을 청랑대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카우스는 다급한 심정이었다. 앞으로 행보도 행보지만 당연히 칙사를 떠받들어줄 것으로 생각하고 야영 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었다. 당장 저녁부터 굶어야 했고, 잠자리를 만들기도 힘들었다.
“카우스 알스타인이 브라스트 소가주께 정식으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그간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황도에 이를 때까지 무난히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다 같은 황제 폐하의 신하로 괜한 신경전으로 계속 다툴 이유가 없기에 백작의 사과를 받아드리겠소.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세틴은 칙사의 일행들에게도 숙소를 마련해주고 저녁 식사를 제공해주도록 지시했다. 다음날 하루를 꼬박 걸려 가게 될 길고 긴 하산길까지가 대공령이기는 했으나, 사실상 브라스트 공국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청랑대는 밤 늦게까지 진형 교육과 훈련, 대련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야 잠자리에 들었다.
멀린은 신분이 낮은 귀족이나 평민 출신도 기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했다. 누구나 조건을 갖추면 기사가 될 수는 있었으나, 나라에서 말과 무구를 마련해주지는 않았고, 본인이 스스로 준비를 해야 했다. 이것이 평민이 기사가 되기 어려운 가장 큰 진입장벽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말의 털에 푸른 색이 감돌면 불길하다는 속설이 있어서 청마의 값이 낮은 편이었고, 짐말이나 농사용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청랑대원들은 대부분이 푸른 빛을 띄는 말을 타고 있었기에 ‘청마대’라는 조롱섞인 이름으로 불리곤 했는데, 멀린이 이는 너무 심하다 해서 청랑대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이었다.
청랑대원들은 평소보다 오히려 강도 높은 훈련과 새로운 교육 내용이 왜 필요한지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카우스를 비롯한 제국의 사람들에게 결코 기가 꺾이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는 공감했다.
세틴이 의도적으로 카우스의 기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자, 청랑대의 사기가 높아졌고, 황도에 가서도 주눅들지 않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기에 힘든 훈련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카우스는 속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브라스트에서 인질을 잡아 간다’는 본래의 임무는 반드시 달성해야 했기에 세틴에게 고개를 숙이기는 했으나, 황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세틴의 기를 꺾어놓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그였다.
고갯길을 내려가 브라스트 대공령을 벗어나면 거기서부터는 대략 하루 간격으로 묵을 수 있는 역참이 있었다. 천년 제국은 그 역사 만큼이나 다양한 제도를 마련했는데, 역참이 그중 하나였다. 역참은 공무를 위해 여행하는 자나 전령들에게 숙소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필요할 때는 말을 대여해주는 것이 주 업무였다.
칙사인 카우스는 역참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최고의 잠자리는 물론이고, 매끼마다 호화로운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카우스는 내심 ‘촌놈이 역참에서 홀대를 받아 보면 제 주제를 알게 될 거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카우스는 첫 역참에 도착하자마자 책임자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이런저런 사정을 말하고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역참 책임자의 반응이 의외였다.
“소관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제국법에 따르면 황명을 받고 통행하는 자는 특등급의 대우를 해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백작께서 제시한 증서에 따르면 브라스트 대공의 소가주이자 폐하의 외손자로 황제를 보필하기 위해 황도로 향하는 중이므로 특등급의 대우를 해드리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백작의 사사로운 명에는 따르기가 어렵겠습니다.”
역참은 군사시설에 속했으므로 제국의 군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역참 책임자가 장군 바로 아래인 부장급이라고는 하나, 군에서는 누구도 가기 싫어 하는 한직 중에 한직이었다. 더구나 브라스트 경계에 접한 변방의 역참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성도 없이 잘낫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역참장의 태도에 카우스는 기가 찰 지경이었다.
자신이 외무대신이자 칙사라고는 하나 규정대로 하겠다는 잘낫의 말에 반박하기도 어려웠고, 요구를 강요할 수단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최근 들어 왜 자기 앞에 꽉 막힌 꼴통들만 계속 나타나는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황도에서 자신의 말 한마디면 되지 않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세틴에게 제공되는 특등급의 식비는 청랑대 전체에게 제공되는 식비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많았다. 세틴의 일행 모두에게 제공할 만한 숙소는 없었기에 야영을 선택했다. 또한 식비에 해당하는 식재료를 제공받아 청랑대와 같이 만들어 먹었다. 큼직한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모두가 푸짐하게 먹고도 남을 정도였다.
역참에서는 뜨거운 목욕물로 목욕도 할 수 있었고, 세탁을 대신 해주는 일꾼들도 있어서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받았기에 야영을 하더라도 불편함이 거의 없었다. 세틴의 명에 따라 막사를 원형으로 설치하고 중앙에 훈련장을 마련하는 등 삼엄한 군영의 모습을 견지한 야영지는 외부에서 언뜻 보기에도 그럴 듯 해 보였다.
한직으로 밀려난 설움을 안고 있는 잘낫은 세틴의 군영을 바라보면서 한때 잘 나갔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평민 출신으로 일신의 출중한 무력과 일가친척들의 지원을 받아 기사가 되고, 승승장구하여 부장까지 된 잘낫이었다. 고위층에 연줄이 없어 장군이 되지 못하고 경쟁자들의 모략으로 여기까지 밀려났다. 혼란스러운 정세로 군이 할 일이 많아지고 경력을 꽃피워야 할 40대 중반의 나이에 역참이나 지키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할 만도 했다.
세틴이 부른다는 말에 급히 야영지를 찾은 잘낫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살벌한 군기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세틴이 불렀음에도 입구부터 세 차례나 신분을 밝히고 용무를 말해야 했다. 그나마 청랑대원들의 태도가 위압적이지는 않았다. 세틴이 불렀다는 말에 순순히 통과를 시켜주었다.
“역참장, 어서 오게. 평생 군에서 썩은 사람으로는 보기 드물게 역참 운영에 관한 규정을 숙지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집행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술이나 한 잔 대접하려고 불렀네. 그대 덕분에 우리 청랑대가 돼지를 잡아 푸짐하게 먹었는데 아직도 음식이 많이 남았지 뭔가. 그래서 오랜만에 모두 딱 한 잔씩만 하기로 했네. 나는 아직 술맛을 모르지만 아마도 ‘딱 한 잔’ 하고 물러날 사람이 별로 없겠지 ? 하하하.”
잘낫이 술잔을 받고 둘러보니 일반 대원이나 간부나 세틴 앞에나 차린 음식이 차이가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역참장을 이렇게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밖에서 군영에 준해 설치한 야영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렇게 불러주시고 모든 대원들과 동락하는 소가주님을 뵈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이 다하도록 싸우다 죽는 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하늘이 무심치 않으시다면 언젠가 저의 소망을 들어주실 날도 있으리라는 기대만을 품고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세틴이 잘낫을 위로했다.
“부장급인 역참장의 처지가 어떤 줄은 내가 잘 알고 있네.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자네를 꼭 기억하겠다고 약속하지.”
“그 한 마디 말씀이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실 겁니다. 제가 우리 역참에서 제공한 식비와 각종 편의의 내역을 문서로 정리해서 아랫사람에게 전하겠습니다. 향후 계속 묵게 될 역참에서 딴 소리가 나오거든 그것을 제시하거나, 대조하시면 작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그 정도 뿐인 게 한스럽습니다. 차후 말 잘 듣고 싸움 잘하는 개 한 마리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를 불러주십시오. 모든 것을 뿌리치고라도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잘낫, 자네의 절박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겠네. 사나이라면 말보다 행동이지. 어디 두고 보세. 그건 그렇고 요즘 제국 군의 상황은 어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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