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군의 와해
마우니 평원의 전투는 북부군이 대부분 항복하고, 2 만이 넘는 동부왕국군이 전사하고, 2 만 가량이 포로로 잡혔으며, 채 1 만이 되지 않는 동부왕국군이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말할 것도 없이 제국군의 완승이자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전투였다.
이는 세틴과 제국군의 지휘부라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고, 이변은 거의 없었다.
직업적으로 훈련되고, 우수한 무장을 갖춘 군대와 그렇지 않은 전통적인 군대는 전체적인 병력 규모에 관계없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된 전투이기도 했다.
세틴은 이번 전투에서 칼 한 번 뽑아 보지 않았다.
대신 베른과 울브린 같은 젊은 장수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음껏 날뛰며 무용과 전투 지휘 능력을 과시한 전투였다.
고진도 초반에 돌진할 때와는 달리 점차 베른과 울브린이 앞장 서서 부대 전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격렬했던 전투가 이미 끝난 전장을 진두 지휘하는 사람은 난다였다.
포로와 부상자들을 적당한 지점에 분류해서 배치하고, 그들에 대한 관리 및 취조 심문, 치료까지 자로 잰 듯이 일사 천리로 처리하는 난다의 모습에서는 이미 노련한 군인의 위엄이 넘쳐 흘렀다.
제국군의 모든 지휘관들은 각자 자신이 이끌던 부대의 병사들과 함께 풍족하게 제공되는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죽거나 다친 병사들은 없는지 챙기고, 살아남은 병사들의 끝없이 이어지는 무용담을 빼놓지 않고 들어주는 것까지가 전투에 임하는 지휘관의 책무라는 세틴의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세틴은 고진과 단 둘이 앉아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장군, 오늘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대승을 거두었지만, 사실 저는 오늘 칼 한 번 빼들지 않고 본진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장군께서 나서주신 덕분에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
고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술을 즐기지는 않지만, 오늘은 한 잔 하고 싶군요.
사령관께서 주신다면 달게 마시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바네사가 유난히 향이 강하고 붉은 빛이 영롱한 포도주를 큰 유리잔에 가득 부어 고진에게 건네주었다.
세틴이 말했다.
“일부러 피보다 진한 붉은 색의 포도주를 준비했습니다.
저도 오늘은 같이 한 잔 하겠습니다.
오늘 평원을 적신 붉은 피를 붉은 포도주로 씻어버리자는 뜻입니다.”
둘이 건배를 하고 잔을 깨끗이 비우자 바네사가 다시 잔을 채워주려 하였으나, 세틴과 고진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잔을 뒤집어 내려 놓았다.
세틴이 바네사에게 손짓으로 그만 되었다는 표시를 했다.
“예상은 했지만, 모그란데는 일찌감치 전장을 빠져 나갔습니다.
예상을 했기에 마음만 먹으면 그를 잡을 수도 있었겠지요.”
고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를 놓아 주셨습니까 ?
모그란데는 살아 있어서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암적인 존재입니다.
사령관께서 먼저 말을 꺼내시니 꼭 묻고 싶군요.”
세틴이 지난 일들을 돌아 보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실 나 만큼 모그란데와 악연이 깊고, 철천지 원수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내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브라스트 가문의 어린 공자였을 때, 나를 암살하기 위해 그림자의 최정예 암살단을 보냈지요.
소드 마스터까지 포함된 전력이었습니다.
아마 모그란데는 그 암살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살아 남았고, 그림자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와해될 정도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후에 그는 옴비두스와의 협상이라는 연극에 나를 배우로 써먹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습니다.
모그란데는 브라스트령에서 반란을 부추겼고, 노스롭과도 손을 잡아 우리의 토벌군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고도 뻔뻔하게 내게 제국군 사령관직을 제안하며 손을 내밀었지요.
내가 그 제안을 받아 들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모그란데를 죽여 없애고자 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수단이 한 두 가지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줄 사람도 많았습니다.
내가 만약 장군께 우리 단 둘이서 모그란데를 암살하러 가자고 했다면, 장군께서는 거부하셨을까요 ?”
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리가요.
나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모그란데를 처단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따라 나섰을 겁니다.
사령관님과 함께가 아니라 나 혼자 가라고 했어도 말입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저도 장군이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모그란데를 암살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봤습니다.
하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달랐습니다.
모그란데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과 제국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가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입니다.
모그란데가 동부왕국과 손잡기로 작정을 하고 황도를 떠날 때, 내가 그에게 같은 뜻으로 직접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와 모그란데는 끊을 수 없는 악연으로 얽힌 사이입니다.
모그란데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들이 번번히 나로 인해 막혔으니, 나를 철천지 원수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번 결전을 앞두고 이제는 그만 악연을 끝낼 때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와는 질긴 악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길잡이 역할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암살 시도를 겪으면서 제가 무인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고, 그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해 황도에 인질로 끌려왔지요.
옴비두스와의 한 판 연극에서 놀아준 덕에 세틴이라는 존재가 제국에서 크게 부각되었고, 심지어 노스롭 토벌군을 이끄는 장군이 되기까지 했어요.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제 주변에 사람이 넘칠 정도로 많아졌지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 마우니 전투의 결과에서도 보듯 사실상 모그란데의 북부군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정확히 예단할 수는 없지만, 제국의 최대 적은 동부왕국군이 될 겁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마지막 시련이 될 수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변수가 바로 동부왕국입니다.
호아니 군사께 대략은 들으셨겠지만, 동부왕군의 변화된 모습은 아마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저는 또다시 모그란데를 우리가 동부왕국과 맞서기 위한 길잡이로 써먹을 생각입니다.
애초에 동부왕국을 끌어들인 장본인이 모그란데이니, 그가 쫄딱 망한 채로 자군드라 강을 건너 가서 또 무슨 일을 벌일지를 보면, 향후 우리가 동부왕국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시금석 같은 역할을 할 겁니다.
그것이 오늘 제가 모그란데는 놓아 보낸 이유입니다.”
고진이 말했다.
“사령관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그란데를 아예 제거해버렸다면 동부왕국에서 감히 제국을 넘볼 기회조차 주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분명히 그런 측면도 있지요.
하지만 나는 동부왕국에서 일기 시작한 바람이 결코 그리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모그란데는 그저 사소한 하나의 변수, 꼬투리, 써먹을 만한 수단 정도에 불과할 겁니다.
모그란데가 없다고 해서 제국을 넘보려는 야망이 사그라들지는 않겠지요.
장군의 말대로 모그란데를 살려보낸 것이 화근을 더 키우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아왔듯 모그란데는 적절하게 대비하고 대처를 하면, 우리가 충분히 감당하고 남을 사람입니다.
사람이 오만하고 인망이 없어서 결코 큰 적수가 될 사람은 아닙니다.
오늘도 모그란데가 제 몸 하나 빼는데 급급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토록 쉽게 대승을 거둘 수는 없었을 겁니다.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좀 더 지켜 보십시다.
모그란데가 화근 덩어리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알기 쉽고 예측하기 쉬운 사람도 없습니다.”
고진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사령관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십니다.
저도 솔직히 긴가민가 하는데 사령관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령관님의 뜻에 따라서 잘못되거나 엉뚱한 일이 벌어진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사령관님께서 의도적으로 모그란데를 놓아 주었다는 얘기는 저만 아는 비밀로 해두는 편이 낫겠습니다.”
세틴이 웃었다.
“저도 장군께나 이렇게 솔직한 심정을 모두 털어 놓지 누구에게 함부로 떠벌일 얘기는 아니지요.
그건 그렇고, 큰 전투가 벌어진 당일에 할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가 갈 길이 바쁩니다.
며칠 내로 신속히 이곳의 뒤처리를 마무리 하고, 우리는 다시 북동부로 급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저스틴의 별동대가 우살리드를 잘 막아 냈을지, 얼마나 타격을 주었을지 알 수는 없으나, 결과에 관계없이. 우살리드가 돌아오기 전에 북동부를 완벽하게 장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뒤처리를 소홀히 할 수도 없고, 이번 기회에 동부 가도를 완벽하게 장악해야 합니다.
또한 자군드라 강을 건너 동부로 넘어가는 관문인 세벤 항구에 단단한 군사 기지까지 구축을 해두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모두 마치고 나서 북동부로 나가자면 너무 늦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와 장군이 역할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1 만 5 천의 병력을 남길 테니 세벤 항의 일까지를 마쳐 주셨으면 합니다.
이곳의 일이 적지 않으니 난다와 잘낫을 남겨 두겠습니다.”
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난다와 잘낫이라면 인선도 아주 좋습니다.
우리가 서둘러 북동부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은 이미 책임자급 장수들에게 공유된 사항이니 그렇게 결정하셔도 무리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빠지게 되면 정찰 부대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
세틴이 신중하게 말했다.
“저도 그것을 제일 걱정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북동부행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다.
이미 북동부의 주력이 모두 빠져나간 상황에서 우리 군에 맞설 영주나 군대가 있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만약에 우살리드가 북동부로 돌아온다면, 그는 이미 패배로 큰 타격을 받고 지칠대로 지친 상태일 겁니다.
무엇보다 고진 장군을 제외하고는 이쪽 동부 가도와 세벤항을 총괄할 정도로 경험과 역량을 갖춘 장수가 없습니다.
난다가 여러 모로 능력과 위엄을 갖추어가고는 있지만, 아직은 직접 전투에 나서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아직까지는 이쪽에서도 어떤 변수가 생길지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니 제가 남는 편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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