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황제 등극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황궁에서는 모든 대신들과 조정 관료들에게 즉시 입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내관들이 모두 없는 마당이니 명령은 제국군 병사들에 의해 전달되었다.
황궁 앞에 도착한 관료들은 삼엄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는 제국군 병사들을 보면서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대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설왕설래 하고 있었다.
관료들 뿐만 아니라 황자들, 황도의 유력한 귀족들과 제국군의 장군들까지 들어와 있어서 대전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꽤나 긴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올 사람이 없지 않을까 생각할 즈음에 황태자 오디어스와 세틴, 저스틴 세 사람이 동시에 입장했다.
오디어스가 중앙에 서고 세틴과 저스틴이 좌우에 시립하는 자세를 취했다.
“오늘 여러분께 슬프고도 끔찍한 소식을 전해야겠소.
간밤에 황궁에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참변이 일어났소.
300 여 명이나 되는 거의 모든 내관들이 완전무장을 갖춘 채로 황제 폐하의 처소에 침입하여, 병석에 누우신지 오래인 폐하를 시해하는 일이 벌어졌소.
근위대는 중과부적인 데다 내관들이 나조차도 모르는 비밀통로까지 이용해서 폐하의 거소에 침입하는 바람에 폐하를 지키지 못했소.
가까스로 폐하의 시신은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으나, 이미 폐하께서는 숨을 거두신 뒤였소.
제국군 세틴 사령관이 신속하게 대응을 해 줘서 주동자 비언차이를 비롯한 내관들은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거나 잡혀서 감금되어 있소.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잠시 더 참고 끝까지 내 얘기를 들어주기 바라오.”
이쯤에서 오디어스는 목이 타는 듯 물을 청해 마시고 나서 말을 이었다.
“누구도 바라지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벌어졌소.
폐하께서 승하하신 마당이니 마땅히 누가 보위를 이을 것인가가 가장 시급하다 할 수 있겠소.
내가 황태자의 지위에 오를 때는 이럴 경우를 대비하여 하루라도 나라에 주인이 없는 상황을 초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차마 스스로 보위에 오르겠다는 말을 할 수 없소.
폐하께서 이런 참담한 일을 당하게 된 상황에 황태자인 내 책임이 없다 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보위에 오르면 두고두고 뒷공론이 끝이 없을 것이오.
그래서 나는 밤새 고민한 끝에 내 스스로 황태자의 지위에서 내려 오기로 마음을 정했소.
그동안 나와 다른 황자들이 무능하여 못난 꼴을 많이 보였고,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는데 적지 않은 빌미를 제공해 온 것도 사실이오.
그렇다고 차기 황제 자리를 놓고 누가 좋으니 나쁘니, 옳으니 그르니 말이 오가는 것도 꼴사납고 유례가 없는 일이오.
그래서 내가 황태자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내려놓기 전에 정당한 계승자의 자격으로 차기 황제를 정하기로 했소.
다음 황제는 이제는 내 후계자로 지정된 저스틴 부마요.
어떤 이론이나 반대도 용납하지 않겠소.
폐하의 국장 또한 저스틴 부마가 제위에 오른 후 주도하게 될 것이오.”
오디어스가 내려 오고 저스틴이 단상에 올라 제위를 수용하겠다는 선언을 하면 사실상 권력 승계의 최소한 절차가 마무리 되는 셈이었다.
오디어스가 내려오면서 저스틴에게 단상에 오르라는 손짓을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4 황자 파이란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이오.
폐하께서 내관들에게 시해를 당해 돌아가셨는데 셋째 형의 한 마디로 다음 황제를 정한다 ?
세상에 이런 법도가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소.
먼저 어젯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막을 확실하게 규명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 뒤에 보위 승계를 논해도 늦지 않소.
그렇지 않소, 여러분 ?”
파이란의 고함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5 황자, 6 황자가 제각기 뭐라 떠들어 대자 여기 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세틴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세틴은 단상에 오르려던 저스틴을 잠시 기다리게 하고 자신이 단상에 올랐다.
“모두들 조용히 하세요.
여기가 무슨 시장바닥입니까 ?
이런 엄중한 시국에 나라를 대표한다는 분들이 이 무슨 고약한 작태란 말입니까 ?”
세틴이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으나, 낮게 깔려나가는 그의 목소리는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직접 대고 말하듯 강하게 전달되었다.
일시에 침묵이 흐르고 세틴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자세를 보였다.
“간밤에 일어난 사건을 수습하고 내관들이 황비들과 공모하여 저지른 거사에 대해 밤새 조사를 해온 장본으로서, 제국군 사령관으로서 내가 여러분이 궁금하게 여길 사안들에 대해 지금부터 하나씩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질문도 받을 터이니 지금부터 허락없이 발언을 하는 사람은 자격이 없는 것으로 알고 즉시 추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일의 주모자인 비언차이는 그동안 황태자 전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셨고, 실질적으로 황궁에서 일하는 내관들의 머리 끝에 올라 있던 자였습니다.
비언차이는 스스로 결사대 12 명을 이끌고 폐하의 처소까지 직접 쳐들어가 폐하를 시해한 장본인입니다.
그는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제압하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어 말을 제대로 못함은 물론 정신마저 오락가락하여 제대로 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내관들과 모든 황비들이 공모한 사실까지는 확실히 밝혀졌고, 그들이 누군가를 제위에 올리기 위해 무모한 거사를 진행한 사실도 밝혀졌으나, 그 누군가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오로지 비언차이만 알고 있다고 합니다.
내관들이 스스로 제위에 오를 생각을 했을 리는 만무하니 그 누군가는 반드시 황자들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황자들께서는 스스로 범인임을 증명하고 싶지 않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구도 입을 열면 안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황자 분들 중에 입을 여는 사람이 바로 스스로 용의자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제국군이 비록 폐하께서 시해당하는 사태를 막지는 못했으나, 반역자들을 조기에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근위대와 저 사이에 비상 통신이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거사에 참여했던 내관 300 여 명은 모두 전투 중에 사망하거나 잡혀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거사의 목적을 명확히 밝히기는 어렵게 되었으나, 조사가 진행되고 내관들의 처소에서 나온 증거물들을 조사하다 보면 차츰 전모가 밝혀질 것입니다.
어떤 황자분이 모든 내막이 완전히 밝혀진 후에야 차기 제위를 논할 수 있다 하셨는데, 그런 소리야말로 완벽한 무지의 소치이자 되는대로 떠드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법무장관은 나와서 관련 사안에 대한 법규에 대해 설명하시오.”
수기란이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국법에 따르면 황제의 궐위 시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즉각 차기 황제를 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 순위는 돌아가신 황제께서 명확하게 지명을 하신 경우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불분명할 경우, 황태자의 지위를 가진 분이 즉각 제위를 계승합니다.
황태자가 제위에 오를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그의 의사에 따라 지명된 사람이 제위에 오릅니다.
이상의 조건이 모두 총족되지 못할 경우, 황태자의 다음 순위 황위 계승권을 가진 사람이나 그의 의사로 지명된 사람이 제위에 오릅니다.
제국이 천년을 이어오는 동안 말씀드린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사건의 진상은 제위의 계승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만약 황태자를 비롯한 계승권자가 황제를 시해한 범인임이 밝혀졌다면 당연히 이는 예외입니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에 따라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경우라면 계승을 미룰 명분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차후에 그런 사실이 밝혀진다면 누구라도 문제를 제기하여 제위를 박탈할 수 있습니다.
이상 제국법에 명시된 관련사항입니다.”
세틴이 보충했다.
“제국법이 이렇게 명시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
나라에 하루라도 주인이 없으면 끝없는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파이란 황자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억지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반론할 생각 하지 마세요.
입을 여는 순간 내가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이제 황태자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제국법에 따르더라도 어떤 하자도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황태자 오디어스의 자발적인 뜻에 따라 저스틴 부마가 황제로 등극하는 것에 대해 다른 말씀이 있습니까 ?”
세틴의 태도는 전에 없이 강압적이었다.
이럴 때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가는 걷잡을 수 없이 소동만 커지게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틴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황자들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못을 박은 것이 주효한 셈이었다.
황자들도 나서지 못하는데 누가 감히 이런 자리에서 미운 털이 박히고 싶겠는가.
한동안 사방을 둘러보며 좌중의 모든 사람들과 눈을 맞추다시피 한 세틴이 조금 더 뜸을 들이고 나서 말했다.
“그럼 저스틴 부마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단상에 오른 저스틴이 잠시 사방을 둘러 보며 쉽사리 말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순간 마음을 굳힌 듯 낮은 목소리를 발언을 시작했다.
“나는 저스틴 브라스트, 아니 황태자 전하의 후계자로 지명되면서 저스틴 하만으로 개명한 사람입니다.
단 한 번도 내가 제위에 오를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제위를 물려 주셨습니다.
주제 넘는 일인 줄 알고 있지만, 피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이 시간 이후로 천년 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내 비록 부족한 사람이지만 제국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할 각오를 했소.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 함께 힘을 합해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라오.
누구든, 언제든 내게 충언을 하고 조언을 하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겠소.
딱 한 가지만 당부하겠소.
나는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이오.
다 좋지만 거짓말로 나를 속이려다 들통이 난 사람 만큼은 내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 하나만 명심해주기 바라오.
그럼, 앞으로 잘 해봅시다.”
오디어스가 앞장 서서 바닥에 엎드렸다 허리를 펴며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황제 페하 만세.”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옆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분주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자들도 꽤나 있었기에 처음에는 박자가 맞지 않았으나, 그런 상황이 잠시 지나고 나자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오랜 혼란과 제국 전역에 걸친 반란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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