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린 백작
천막을 나온 세틴은 지형지물에 의존해 설치된 50 여개의 천막을 꼼꼼히 돌아보았다. 이들 모두가 자신과 생사를 같이 할 소중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바람이 들어갈 구멍이 없는지, 천막을 고정한 돌맹이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날이 완전히 밝고 햇볕이 드는 가운데 바람도 조금은 잦아들었다. 예상대로 계곡을 찾는 사람은커녕 짐승들의 기척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자정이 넘어서야 제이 목적지인 게스트 강가에 도착해 보니 강은 단단히 얼어 있었다.
세틴은 테오를 타고 몇 차례 강 건너까지 오락가락하며 주변을 살폈다. 테오는 만약에 불안한 지점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만큼 예민하고 영리한 짐승이었다. 결국 말을 타고 건너도 좋을 정도로 강이 단단히 얼어붙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틴은 곧바로 도강을 명했다. 강을 건넌 후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강행군이었다. 강 건너에서 게스트린 산맥은 지척이었다.
그만큼 산을 타지 않는 한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조우할 가능성이 컸다. 다음 목적지인 벌목꾼들의 오두막에 날이 밝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벌목꾼의 오두막은 대체로 경사가 급한 네스트린 산맥의 북사면에서 드물게 완만하고 품이 넓은 계곡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름드리 침엽수들이 빽빽한 계곡은 농경지가 거의 없어서 왜 이곳에 벌목꾼의 오두막에 있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두막이라고는 하지만 큼직한 통나무 집들이 여러 채 지어진 이곳은 고진의 정찰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상시적인 벌목장이 아닌지라 전쟁 중인 상황에서 오두막은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즈음에야 벌목장에 도착한 친위대는 오랜만에 불을 피우고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삼백 명을 모두 수용할 만큼 오두막이 많지 않았어도 교대로라도 꿈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세틴은 벌목장으로 이동하던 중에 만난 중년의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우리의 행적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약속만 해주었으면 바로 놓아 주었을 것을 왜 고집을 부렸소 ?”
남자는 평범한 농사꾼의 행색이지만 고집스러운 표정이었다.
“죄없는 우리 땅에 침범한 수상한 군대를 내가 왜 지켜주어야 한단 말이오 ?”
세틴이 조금은 답답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충분히 설명했잖소 ? 우리는 제국에 반역을 일으킨 노스롭을 토벌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말이오.”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난 그런 건 모릅니다. 지체높은 어르신들이 일이야 나같은 사람이 어찌 알겠소. 하지만 평화롭게 살고 있는 우리 땅에 쳐들어온 군대를 우리가 두 손 들고 환영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소.”
말로 그를 설득할 방법이 없음을 자각한 세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겠소. 하지만 당신을 그냥 놓아줄 수는 없소. 힘들겠지만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록 하시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는 못하겠지만, 밥을 굶기거나 괴롭히지는 않을 겁니다. 이만 물러가세요.”
병사 둘이 남자를 끌고 나갔다. 세틴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가슴이 답답하고 막연한 심정이 되었다.
스스로 백성을 위하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끝없이 고뇌한다 한들 그런 마음이 백성에게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노스롭 반도는 제국에서도 특히나 고립된 지역이었다. 브라스트의 6백작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백성들에게 토벌군은 자기 땅을 침략한 외국의 군대나 다름없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떤 명분이 있다 해도 결국 전쟁은 백성들에게서 집안의 기둥인 남자들을 뺐고 생업을 망치게 하고 평화로운 삶을 무너뜨리는 원흉이었다.
오클린이 침울한 세틴을 위로했다.
“장군, 한낱 농사꾼의 말입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말을 저렇게 해도 자신이 목이 달아나도 모자랄 사고를 저질렀다는 걸 알 겁니다. 저런 허튼 소리를 잠자코 들어줄 귀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틴이 말했다.
“말을 어떻게 하든 대부분 백성들의 생각이 저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나는 노스롭만 무너뜨리고 나면 반도가 모두 내 손아귀에 들어온다는 착각을 하지 않았나 반성하고 있습니다.
과연 전쟁으로 저들이 받는 고통을 보상하고 남을 무엇을 백성에게 줄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자비한 정복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클린이 서둘러 사과를 했다.
“장군을 위로한답시고 짧은 소견으로 도리어 장군의 마음을 어지럽혀 죄송합니다. 늘 백성과 병사들을 먼저 생각하시는 장군을 조금이라도 따라 배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세틴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늘 말로는 백성과 병사들을 위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을 뿐입니다. 함께 조금 더 노력해 봅시다.”
세틴은 벌목장에서 가장 가까운 경로로 산등성이에 올라 능선길을 타고 가서 관문을 공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능선길이 순탄하게 이어지지는 않고, 특히 관문 직전에는 높고 가파른 봉오리가 솟아 있어 길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관문 방향에서 설치한 경계 초소까지 있어서 결코 쉽지 않은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관문을 정면에서 공략하지 않는 이유는 세틴이 관문을 장악했다는 사실이 노스롭에게 전해지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함이었다. 정면 공략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여러 마을과 가도를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벌목장에서 만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친위대는 다음날 아침 일찍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에 올라 능선을 타고 이동하여 하룻밤을 쉬고 관문을 공략할 예정이었다.
게스트린 관문 점령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경계 초소는 상카 단독으로 장악할 수 있었고 관문을 지키는 병력은 기껏 50 여 명 정도였다.
치열한 전투도 없이 항복을 받아내고 진입한 관문은 생각보다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남과 북 양쪽으로 설치한 성벽은 튼튼했고, 그 사이에는 능히 3천 명이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항복한 관문의 책임자를 취조한 결과, 관문을 점령한 사실이 노스롭에 알려지지 않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노스롭에게 매일같이 전령이 오가고 있었으니, 전령이 도착하지 않으면 노스롭이 즉각 이변을 알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게스트린 관문 점령 작전은 실상 전투보다는 기민하고 비밀스러운 이동이 관건인 셈이었다.
세틴은 관문을 장악하고 나서 어느 정도 정돈이 되자마자, 친위대와 주변의 정찰대를 모두 소집하여 관문 남쪽의 게스트린 영지에 대한 정찰에 주력하도록 했다. 지금쯤 세틴군과 노스롭군의 전면전이 시작되었을 테지만 전황을 알 수는 없었다.
세틴군 본대가 관문에 도착하기까지는 적어도 사흘에서 닷새 정도 시간이 있을 터였다. 세틴은 게스트린 영지의 상황을 최대한 파악하여 이후 작전의 그림을 그리는데 주력할 생각이었다.
오클린이 관문 경계와 본대와의 연락선 구축에 주력하고 상카가 정찰대와 함께 게스트린 정찰에 매달려 있는 동안 세틴은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상카와 함께 정찰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나, 세틴은 혼자 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휘하의 장수들이 노스롭을 공략하는데 큰 실수를 범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는 없었다. 압도적인 전력과 치밀한 작전 계획에 부대별 역할, 그리고 그들을 총괄 지휘할 호아니까지, 독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인 노스롭을 공략하는데 실수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세틴의 머리 속을 계속 감돌고 있는 질문은 벌목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만났던 농사꾼의 말과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처음 투항을 위한 사절로 왔던 보로킨 백작을 비롯해서 보카수스 자작이나 노스롭의 아들이 보인 태도를 세틴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그들은 한결같이 뻣뻣한 자세였고 무척이나 억울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세틴을 힘과 명분을 앞세워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로 보았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보기에 따라 그들은 모두 노스롭의 위세에 굴복하고 따랐을 뿐이었다.
귀족들의 특권을 박탈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은 이상 반역에 대한 징벌을 빌미로 그들을 제압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귀족들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기 않으려면 세심한 배려가 필요함을 인정해야 했다.
백성들에게 귀족은 억압자이자 수탈자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현재의 삶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백성들이 자신의 영주를 원수처럼 미워하지도 않고, 적어도 외부에서 쳐들어온 세력에 비해서는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 터였다.
자신이 모든 백성들을 일일이 찾아다닐 수 없는 한, 기존의 영주들과 손을 잡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세틴은 노스롭 후작과 그 식솔까지 포함해서 노스롭의 영주들을 적어도 목숨 만은 건드리지 않고 상황을 매듭짓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게스트린 관문을 점령한 지 사흘이 지난 후 호아니의 전령이 처음으로 관문에 도착했다.
군영 공략과 도강 작전을 완료하고 노스롭 군의 잔당들을 추격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보고였다. 도강을 완료했다면 호아니가 마음만 먹으면 당일이라도 관문에 올 수 있겠지만, 노스롭 본대를 추격하고 뿔뿔이 흩어진 잔당들을 최대한 추포하는 작전을 총지휘해야 하므로 다음날에나 관문에 도착할 것이라 했다.
또한 노스롭 본대가 관문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경로로 산맥을 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세틴은 노스롭이 관문으로 향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아마도 산맥을 넘고 나서 게스트린 영주성도 거치지 않고 곧바고 노스롭의 직할령으로 넘어가리라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세틴은 본대가 관문에 도착하는 즉시 게스트린 영주성으로 직행할 예정임을 호아니에게 통보하고 그에 맞게 계획을 짜도록 했다.
다음날 호아니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휘부가 관문에 도착하자, 세틴은 전군에 현재 수행하고 있는 작전을 모두 중단하고 관문을 넘어 게스트린 영주성으로 진군하도록 명했다.
전투를 치르지 않는다 해도 가파른 경사와 좁은 관문으로 인해 세틴군 전체가 관문을 넘는 데는 며칠이 걸리게 되었다.
게스트린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낮았기에 세틴은 군영을 제대로 꾸리기보다 임시 군영을 차리고 전군이 집결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게스트린 백작은 백발이 성성했지만 꽤나 활기찬 노인이었다.
다른 영주들이 세틴을 만났던 일이 전해져서인지 그는 순순히 세틴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투항의 의사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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