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은 사서 해야 제 맛
드디어 멀린이 공자들을 소집했다. 대전 회의를 앞두고 순행 사절단에 참가할 공자를 선발하기 위한 자리라는 공지가 있었다.
상석에 자리한 멀린은 신년 행사에 무리를 해서 고뿔이라도 걸렸는지 안색이 썩 좋지 않았고 연신 기침을 했다.
“미리 알렸다시피 오늘은 순행 사절단에 누가 참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자리이다. 매 3 년마다 파견하는 순행이지만, 올해는 각별한 의미가 있고 중대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네. 그래서 명실상부한 열 세 명의 공자들 중에 적어도 한 명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 거두절미하고 참가를 원하거나 의견이 있는 공자는 말해 보라.”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비교적 나이든 공자들은 괜히 나섰다가 바가지를 뒤집어 쓸까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던 중 7 공자 미리암이 입을 열었다.
“아들된 도리로 대공 전하를 도와 궂은 일을 마다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싶으나, 지금 맡고 있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농사철을 앞두고 어디서 몬스터들이 극성을 부릴지 알 수 없습니다. 혹여 저를 대신해서 그 일을 맡아줄 형님이 있다면 제가 사절단을 따라 나서겠습니다.”
미리암은 말을 하면서 은근히 대공자 털린을 바라보았다. 굳이 ‘형님’을 언급한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사람이 없었다. 은연중에 대공자를 물고 늘어지며 자기는 빠지겠다는 의사를 표한 거나 다름없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미리암의 마음가짐이 가상하구나. 하지만 굳이 ‘형님’을 거론할 필요가 있었을까 ? 누가 됐든 억지로 내몰 생각도 없고, 나선다고 무턱대고 ‘네가 가라’ 하지도 않을 것이야. 기왕 말이 나왔으니 털린이 ‘큰 형님’으로서 어찌 생각하는지 말해 봐.”
털린은 전날 마신 술이 덜 깨서 거북한 속에 초장부터 자기를 걸고 넘어지는 미리암이 죽도록 미웠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대공자’다운 품위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앞섰다.
“대공 전하, 순행하는 일도, 몬스터 퇴치 일도 모두 긴요하기 짝이 없으니 마땅히 제가 앞장서야 할 줄로 압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일로 저에게 자문을 구하는 자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은 됩니다. 이런 시기에 한쪽에 치우쳐 자리를 비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멀린은 버럭 역정을 냈다.
“어떤 정신나간 자들이 자네같은 사람에게 나랏일을 물어 ? 그 잘난 ‘차기 검성’에게 아부나 떠는 자들이 득실거리겠지. 내 분명 경고하건데 ‘어차피 대공자 말고 누가 대공 자리를 물려받겠어’하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려. 20 년이 넘게 지켜봐도 실속이라고는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계속 그러다 변방에서 매일같이 몬스터들과 씨름하는 곳으로 보내버리는 수가 있어. 대공비가 울고 불고 난리를 치지 않았다면 진작에 그러고도 남았을 사람이야 자네는. 사절단에 가겠다고 해도 어디 믿을 구석이 있어야 보내지. 자원을 한다고 해도 자네는 내가 사절하지.”
털린은 평소에 차기 검성을 운운하고 다닌 자신의 행각을 멀린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끝없이 이어지는 폭언에 사색이 되고 말았다.
“대공 전하, 건강을 생각하셔서 노여움을 거두세요. 아들이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계기 삼아 대공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아들이 되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털린은 생각이 없는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여전히 ‘대공자’라는 명분에 연연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169’ 중 1이 더 이상 가망 없어 보일 정도로 멀린에게 혹평을 당하자, 6 공자 시온이 한 마디 하려는데 9 공자 갤리가 이때다 싶었는지 선수를 쳤다.
“이번 임무는 저에게 맡겨 주세요. 외가인 나바니아에 다녀온 지도 꽤 오래 됐고, 나바니아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전언도 있는지라 제가 꼭 가보고 싶습니다. 외삼촌께서 저를 보시면 얼마나 반가워 하실지......”
멀린이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갤리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자네는 안돼. 6 백작령 순행이 어디 소풍가는 일인 줄 아나 ? 자네가 브라스틴과 나바니아의 분쟁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수도 없을 거고, 외삼촌이 보고 싶으면 휴가를 내줄 테니 개인적으로 다녀 오든가, 그건 마음대로 하게. 어디 영양가 있는 소리를 할 줄 아는 공자 없는가 ?”
멀린이 노한 기색이 가라앉지 않은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런 기회를 놓칠 시온이 아니었다.
“저는 이번 순행의 의미가 심대하다고 생각하옵니다. 무엇보다 3 년이나 지속된 가뭄에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대공 전하의 넓으신 은덕을 보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최소한 20만 골드에 해당하는 식량을 공수하여 골고루 배푸셔야 합니다. 또한 나바니아와 브라스틴의 분쟁을 중재할 대책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워낙 서로 골수에 맺힌 원한이 쌓인 두 집안인데다 극심한 재해로 인해 서로 양보할 여지가 없는 지경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공가에서 통큰 지원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중재를 하는 일도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흉흉한 민심을 빌미로 발호하고 있는 도적떼들을 어떻게 물리칠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역시 대공가에서 대규모 군사지원을 해준다면 모두가 대공의 은덕에 감읍하지 않을 턱이 없습니다. 제가 대신들과 의논하여 대책을 마련하여 나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대공께서 맡기신 브라스트 가문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도 더이상 미룰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영양가가 많아도 너무 많군. 그래도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책을 봤다고 자부하는 ‘학식 공자’답기는 해. 자네 말이 나라의 정세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잃지 않았다는 증좌로 충분하다고 보네. 하지만 20만 골드가 누구 집 애 이름인가 ? 지금 공국과 대공가의 재정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뭐야 ? 그리고 두 가문에는 대체 무엇을 가져다 지원하겠단 말이지 ? 도적떼를 물리치기 위해 대공가의 병력을 동원한다면 6 백작들이 쌍수를 들고 환호하겠군. 흥, 전형적인 책상물림이야. 가문의 역사, 중요하지. 자네 뜻대로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하게. 그 일을 맡은 지가 벌써 15 년이야. 내가 잊은 줄 알았어 ? 자네 스물 한 살 생일에 자네가 간곡하게 원해서 내가 선물 주는 셈 치고 맡긴 일이야. 그게 어디 15 년 씩이나 끌 일이야 ?”
원래 자식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엄하고 직설을 마다 않는 대공이었다. ‘차기 대공’으로 유망하다는 네 공자들이 한 마디 했다가 멀린에게 머리가 터지도록 깨지는 모습을 보며, 다른 공자들은 더욱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멀린의 시선이 세틴을 향했다.
“너희들의 막내, 세틴이 사전에 대공비를 통해 사절단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려왔네. 이제 막 성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인 건 분명하지. 나는 세틴의 희망을 받아 주지 않을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 자리는 대공가의 어엿한 공자로서 할 말은 할 수 있는 자리이니 세틴의 생각도 들어는 보자꾸나.”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저는 오늘 형님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고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은 단순하옵니다. 사절단에서 공자의 임무는 경험입니다. 제가 공자가 되고 처음으로 맡고 싶은 일이 바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녹녹치 않은 상황에서 공국 전반을 순행하는 사절단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중요한 일들이야 대공과 대신들께서 충분히 숙의하여 준비하셨을 것이고, 직접 순행에 나섰을 때 맞닥뜨릴 돌발 상황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사절단의 정사(正使)가 주관하여 대처하시면 될 일입니다. 괜히 제가 나서 설치다 걸림돌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테구요. 저는 사절단의 혹이 될 생각이 없고, 사절을 맡은 신하들이 제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부족한 소견이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멀린이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세틴을 바라보는데, 눈치가 없는 것인지, 대공 행세를 하고 싶은 것인지 털린이 야단을 치고 나섰다.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생각이 없어도 그렇게 없나 ? 브라스트가의 공자가 돼서 사절단 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구경이나 하겠다고 ? 넌 아직 멀었어. 머리에 피나 말리고 나설 자리를 찾으라구.”
몇몇 공자들이 눈짓으로 말리는 데도 털린이 자신의 호통에 취한 듯 계속하자, 멀린이 이번에야말로 진짜 대노했다.
“털린, 지금부터 너는 입 다물어. 한 마디라도 했다간 치도곤을 당할 줄 알아. 저것을 대공자라고 떠받드는 자들부터 정리를 해야지 원.”
멀린이 화를 삭이느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입을 열기 힘든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사실 세틴이 한 말은 내가 그대들에게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이다. 어려운 시기에 사절단을 맡길 만큼 식견과 능력을 두루 갖춘 공자가 있었다면, 왜 할 일 많은 대신을 차출해서 사절단을 맡기겠나. 세틴의 말대로 끼어든 공자가 사절단의 걸림돌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3 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사절단에 참가한 공자가 적절한 처신으로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 있다면 그게 어디 본인에게만 영광스로운 일이겠어 ? 대공의 채면을 살려주는 일이지. 다만 돌발 상황을 만나 불의의 사고라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애비된 자로서 내 마음이야. 다들 허튼 소리나 해댈 시간에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해. 오늘 이 자리에서 정했다. 이번 순행에는 세틴을 보내기로 했어. 이견이 있는 사람은 말해 보도록 !”
멀린이 ‘어찌 하도록’으로 말은 맺으면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는 신호였다. 더는 눈치없이 토를 다는 공자는 없었다. 사실은 자신이 가지 않게 되어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공자는 하나도 없었다. 내심 험한 일을 자처하고 나선 세틴이 아직 어려서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여길 정도였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말 그대로 잘 해봐야 ‘걸림돌’ 취급이나 받을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대전 회의를 통해서 확정된 일은 아니었지만, 대공이 하는 일에 딴지를 거는 대신들은 거의 없기에 세틴이 순행에 참가하는 것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을 당할지 알고 그런 일에 나서느냐며 눈물 바람을 하는 조스핀을 간신히 위로하고 집에 가니 세틴의 식구들은 벌써부터 순행에 나설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재해 지역의 주민들에게 배풀 구호 물자들의 조달과 수송을 슈타인 상단이 맡게 된 사실을 알고, 난다와 완다는 자신들이 사절단의 일을 절반이나 할 것처럼 신이 나 있었다. 슈타인 남작이 일의 중요도를 감안하여 직접 상단을 인솔한다는 소식도 그들을 더욱 고무시켰다. 생전 처음으로 먼길을 나서는 그들에게 슈타인 상단의 동행은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대공가의 사절단이 여기 다 모였군. 이봐, 이봐, 우리는 그저 꼽사리라고. 공자의 수족입네 하고 여기 저기 간섭을 하거나 눈치 없이 나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세틴이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찬물을 끼얹었다.
난다가 어느새 세틴을 따라 배웠는지 ‘엄지척’을 하며 말했다.
“쟁쟁한 공자들을 물리치고 사절단에 선발되신 걸 축하드려요.”
“쟁쟁하긴 무슨...... 다들 남에게 떠밀지 못해 안달이더만. 이거야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프고, 여하튼 이번 우리의 임무는 없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구경만 하다 오는 거야. 좋게 생각해서 세상 구경이나 한 번 제대로 하고 오자고. 그러니 준비한답시고 유난 떨지 말고 간편하게 짐을 꾸려야 할 거야. 옷은 예복은 제일 무난한 걸로 딱 한 벌만 챙기고 음식은 사절단에서 준비한 걸 먹으면 되니 아예 다 빼 버려. 하인들은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두어 명만 데려 가고, 나머지는 우리 없는 동안 할 일이나 제대로 챙겨 주어야 할 거야. 너무 놀아도 안되고, 하인이란 게 주인이 있을 때나 유세도 하고 그러지, 주인을 떠나면 엄마 없는 아이 신세가 되는 법이거든.”
표정없는 바네사가 다소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인들의 처지까지 마음을 쓰시는 공자께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대공가를 대표하는 공자의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공자님의 전용 마차는 반드시 가야 하고, 음식을 몽땅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저희들의 의무이기도 하니 고집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것만 해도 최소 하인이 다섯은 필요합니다.”
세틴이 끝없이 이어지려는 바네사의 사설을 가로막았다.
“잠깐, 잠깐. 전용 마차를 가져간다고 ? 울브린과 토마스는 따로 말을 탈 테고, 그럼 순행하는 내내 여기 세 분 여자들과 내가 마차 안에서 지내야 한다는 거잖아. 그냥 나도 말을 타고 그대들은 다른 마차를 타면 안될까 ?”
하지만 바네사에게 그게 통할 리 없었다.
“아니될 말씀입니다. 대공가의 위신을 스스로 깎아내릴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 공자님의 뜻은 충분히 알았으니 제가 최소한으로 간소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보다 저희들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 순행하는 동안의 방침을 정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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